엄수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방금 내뱉은 말의 의미를 곱씹을 새도 없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밤에 돌아오든 말든, 그건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백시후의 턱끝에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감기라도 들까 봐 걱정이 앞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비 맞았네. 수건 갖다줄게.”엄수아는 욕실로 들어가 새 수건을 꺼내왔다. 그의 앞에 다가가 수건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몸 좀 닦아. 샤워도 하고. 감기 들면 큰일이야.”하지만 백시후는 그녀가 건넨 수건을 받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백시후의 몸에서 매서운 냉기가 쉼 없이 번져나갔다. 자신의 연락처를 받아 간 건 엄수아였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것도 엄수아였으며 오늘 약속을 잡고 싶어 했던 것도 엄수아였다고 믿고 싶었다.하지만 현실은 그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모두 착각이었다. 혼자서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독백이었을 뿐이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조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저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백시후의 시선이 차갑게 스쳐 갔다.“데리고 나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검은 옷을 입
백시후는 멈칫했다.“오늘 내가 여기서 데이트하는 거 어떻게 알았죠? 누가 말해줬습니까?”그의 매끄러운 얼굴 위로 짙은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조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조서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왜 그러세요. 우리 오늘 여기서 보기로 약속했잖아요.”“시후야!”그때, 임채린과 문하윤이 다가왔다.문하윤은 낯선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시후야, 이 사람은 누구야? 엄수아 씨는 왜 안 왔어?”임채린도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지금 벌써 여섯 시야. 또 엄수아한테 바람맞은 거 아냐
백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문하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진짜 답도 없다. 저 백시후 절대 못 알아들어. 이번 생은 그냥 엄수아한테 다 걸었나 보다.”임채린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하고 애써 왔는지, 그런데도 왜 매번 엄수아를 이기지 못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문하윤, 혹시 백시후랑 엄수아,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는지 알아?”“그건 왜? 뭐 하려고?”“그냥 가서 좀 보고 싶어서.”문하윤은 짧게 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한번
문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백시후의 기묘한 논리에 더는 입을 뗄 수 없었다.역시, 달콤한 판타지 속에 살고 있는 철없는 남자 주인공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법이었다.문하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첫사랑, 그것도 미화된 과거의 기억은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느꼈다. 백시후는 엄수아를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었다. 한창 가난했던 시절, 불쑥 그의 인생에 들어와 마음 한편을 차지했던 그 여자를 그는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하지만 문하윤은, 적어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진나래는 두 사람 사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들이 이어졌다.그 말을 듣던 엄수아는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재빨리 손으로 진나래의 입을 막았다.“나래야, 그만 말해. 제발.”당황스러운 표정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 그 모습 너머로 진나래는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시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소리 없는 웃음이 미세하게 번졌다....그날 밤, 엄수아와 진나래는 같은 방에서 잠을 잤고 백시후는 손님방에 머물렀다. 이튿날 아침, 그는 별다른 말 없이 회사로 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