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낀 임구택은 눈썹을 올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소희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나에게 시간을 좀 줘, 우리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게."소희의 진지한 말투에 임구택이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뭐가 문젠데? 내가 같이 해결해 줄게."하지만 소희는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우고 임구택의 살짝 열린 셔츠 네크라인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숙여 소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지금 나를 못 믿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높은 벽을 세웠다는 것도 알고.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에게로 접근할 거니까 당신도 천천히 나에게로 와줘. 우리 함께 그 장벽을 뛰어넘자, 응?"소희가 잠시 침묵하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밝은 달빛은 넓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두 사람의 몸에 은은한 빛을 씌워주었고,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여태껏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꼭 붙어 있다.그러다 한참 후, 소희가 임구택을 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 졸려, 가서 잘래."임구택은 소희를 더 이상 잡아두지 않고 그녀를 세워 일으켰다.그런데 소희가 첫걸음을 내디디자마자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왜 갑자기 당신한테 속은 거 같지?""뭐?"소희가 의아하여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소희를 품에 안고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만약 계속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한테는 가장 기본적인 이득조차도 없을 거고.""그럼 당신이 선택해, 나의 육체를 원해 아니면 내 마음을 원해?"임구택이 듣더니 이를 악물었다."역시 일부러 의도한 거였어."소희가
일찍 방으로 돌아온 장시원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마침 우민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시원 도련님, 제 방에 있는 샤워기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한 번 와서 봐주면 안 될까요?"장시원이 듣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담담하게 말했다."정비공을 찾아. 정 안 되면 방을 바꾸든지.""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디 가서 정비공을 찾아요? 게다가 오늘 호텔도 꽉 찼는데 누구와 방을 바꿔요?"우민율의 애교 묻은 어투에 장시원은 여전히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어쩔 수 없지, 씻지 말고 그냥 자.""저 지금 땀을 엄청 흘려서 안 씻으면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아니면 저 시원 도련님 방에 가서 씻어도 될까요? 씻고 바로 나갈게요."장시원의 태도는 너무 미적지근하여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래, 건너와.""네! 저 지금 바로 갈게요, 기다려요!"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한쪽에 올려놓은 장시원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장시원이 가서 문을 열었다. 우민율은 여전히 전날 저녁의 붉은색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그녀는 팔에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장시원의 몸을 흘겨보며 물었다."도련님 휴식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방해했다고 하면, 갈 거야?"장시원이 농담이 묻은 어투로 묻었다.이에 우민율이 앞으로 다가가 장시원의 몸에 달라붙은 채 매혹적인 눈으로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저 이미 왔는데 이대로 돌려보내 게요? 아쉽지 않아요?"장시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방문을 닫았다."씻어.""금방이면 돼요."우민율이 그에게 윙크 한 번 날리고는 욕실로 들어갔다.곧 물소리가 들려왔고, 반투명 형식으로 만들어진 유리에 비친 여인의 매혹적인 몸매는 남자에게 있어 치명적인 유혹이었다.장시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의 밤은 강성의 밤과 완전히 달랐다. 소란스러운 경적소리도 없고 오색찬란한 네온사인도 없고, 온통 그윽한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당장 꺼져."그런데 이때 장시원이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난 눈치 없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우민율은 순간 상처를 받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단념할 수가 없어 다시 뒤돌아보며 물었다."저 줄곧 도련님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도련님은 바람기가 있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지난 2년 동안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었죠. 그게 저 때문이 아닌가요?""그럴 리가."여전히 덤덤하고 차가운 장시원의 목소리에 우민율은 몸을 한 번 세게 떨었다. 그녀가 나타난 후로 장시원은 더 이상 여자 친구를 만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당연히 자신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헛된 망상이었다니."휴식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우민율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힌 후 장시원은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내가 2년 동안이나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고?’그는 2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괴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우민율 같은 미인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그 순간, 그는 자신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심리적인 문제인 건가, 아니면 신체적인 문제인 건가?’장시원은 초조하게 담배 연기를 뱉으며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와 이상한 말들로 잔잔한 그의 마음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우민율을 원망했다.……유정이 다 놀고 호텔로 돌아왔을 땐 이미 새벽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다 조백림과 같이 배치된 스위트룸에 도착하니 조백림이 마침 한 여인과 문밖에서 치근덕거리고 있었다.여인은 술에 취한 듯 온몸이 나른하여 뼈 없는 연체동물마냥 조백림에게 기대어 있었다."조 도련님, 저 심장이 엄청 빨리 뛰고 있어요, 한 번 만져봐요."이에 조백림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마침 유정이를 발견하게 되었다.유정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마냥 곧장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다 조백림
유정이 듣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제발 참아요. 백림 씨 지금의 상황에서 주동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고 또 걱정할 것 없이 얼마든지 물러날 수도 있는데, 얼마나 좋아요?"조백림이 유정에게 술을 따라주었다."비록 내가 한 사람한테만 일편단심인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다리는 걸치지 않아. 그러니 걱정 마, 너와 약혼을 맺은 동안은 절대 다른 여자와 얽매이지 않을 거니까. 방금은 단지 전 전 전 여자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야."유정이 듣더니 경악하여 조백림을 쳐다보았다.그러자 조백림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눈빛이야?""전 전 전 여자친구가 아직도 백림 씨를 잊지 못한 걸 보면, 백림 씨가 확실히 좋은 사람이긴 했나 보네요."유정이 진심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이에 조백림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 갑자기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아 유정을 흘겨보았다."나를 풍자하는 거야?""아니요!"유정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저는 전 남자친구와 안 좋게 헤어져 지금은 원수처럼 지내고 있거든요. 그런데 백림 씨는 여자친구들과 다 좋게 좋게 끝난 거니까 백림 씨의 인성이 괜찮다는 걸 설명해주고 있잖아요."유정이 말하면서 조백림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조백림은 유정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가 없어 웃으며 물었다."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게 그 사람의 첫사랑이 돌아와서였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이었어?""저와 아직 사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전에 좋아했던 첫사랑이 돌아왔거든요. 그래서 바로 저를 버리고 첫사랑의 품속으로 돌아갔어요."유정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담담하게 말했다.조백림이 듣더니 냉소하며 말했다."다시 빼앗아 오면 되잖아, 바보 아니야?""하지만 둘이 이미 잠자리도 가졌는걸요.""그게 뭐가 대수라고? 넌 그 자식이랑 안 잤어?"조백림이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누구에게나 사랑을 추구할 자격이 공평하게 있는 거야."조백림의 말에 유정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조백림의 입에서 사
유정이 차가운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어. 이따가 내 남자친구가 올 거거든."손에 주스 한잔만 들고 있는 여인이 유정의 태도에 다정하게 웃었다."유정 씨, 저 줄곧 유정 씨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 저 성준 씨에게 다시 유정 씨한테로 돌아가라고 권한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성준 씨가 유정 씨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고, 유정 씨와 사귄 것도 가족들의 강요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성준 씨의 태도가 엄청 단호했어요. 설령 가족들이 반대하더라도, 심지어 그를 집에서 내쫓는다 하더라도 더는 참고 싶지 않대요."유정이 조용하게 다 듣고 나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말 다 했으면 꺼져."이에 여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유정 씨가 저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와 성준 씨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요."그러다 여인이 갑자기 몸을 숙여 유정의 앞으로 다가가 자랑하듯 웃었다."성준 씨가 그러던데, 유정 씨와 사귈 때 유정 씨를 건드리고 싶은 욕망이 털끝만치도 없었대요. 심지어 유정 씨가 성준 씨의 곁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성준 씨는 속이 울렁거렸다고."여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유정은 바로 손을 들어 커피를 여인의 얼굴에 뿌렸다. 그러고는 안색이 차가워져 입을 열었다."걱정 마, 난 너와 경쟁할 생각이 없어. 너희 둘이야말로 제일 어울리는 한쌍이니까, 보기만 하면 구역질이 나는 부분에서.""꺅!"놀란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오렌지 주스를 바닥에 떨어트렸고, 유리컵이 깨지면서 주스와 유리 조각들이 여기저기에 튀었다.이때, 성준이 갑자기 튀어나와 여인을 품에 안았다."선이야, 어떻게 된 거야?"이선이 눈물을 글썽이며 유정을 가리켰다."난 단지 유정 씨한테 인사하러 온 것뿐인데, 유정 씨가 다짜고짜 나한테 커피를 뿌렸어."성준이 듣더니 노발대발하여 일그러진 얼굴로 유정을 노려보았다."유정, 너 미쳤어? 널 찬 사람은 나잖아!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복수해, 선이를 괴롭히지 말고!"유정이
조백림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됐어, 울지 마. 내가 대신 복수해 줄게.""뭘 하려고요?""성준이라는 그 녀석 전 여자친구를 괴롭히는 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 상대가 만약 나의 약혼녀라면 난 참을 수가 없지."조백림이 말하다 갑자기 몸을 숙여 유정의 턱을 들었다."그 쓰레기 인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다시 나의 얼굴에 먹칠했다간 나 정말 화낼 거야."조백림의 경고에 유정은 붉어진 두 눈으로 차갑게 그를 쳐다볼 뿐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전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도 있고 오전에 별다른 일도 없어 소희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그런데 임구택이 갑자기 문을 밀고 들어와 손에 든 흰색 드레스를 소희의 침대에 내려놓고 커튼을 걷었다.눈부시게 쬐어들어온 햇빛에 소희는 부득불 눈을 떴다.임구택이 소희의 침대 옆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일어나."소희가 잠이 덜 깬 눈으로 임구택을 쳐다보며 물었다."오후에야 강성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응. 백림이 축구 경기를 조직했다고 우리더러 경기 보러 오래. 지금 일어나 아침 먹고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거야.""웬 축구 경기?"소희가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소희의 멍해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임구택은 가슴까지 저려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목소리도 더욱 부드러워졌다."백림이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필업할 때까지 내내 학교 축구팀의 주장이어서 공을 아주 잘 차거든.""혼자 가서 구경해."축구에 관심이 없는 소희는 눈을 감고 다시 자려했다."그래도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임구택이 소희의 이불을 잡아당겼다."아니면 내가 직접 옷을 갈아입혀 줘?""아니!"소희가 이불을 꽉 잡은 채 약간의 화가 묻은 어투로 말했다. "알았어. 먼저 나가있어!"이에 임구택이 몸을 숙여 소희의 얼굴에 입술을 살짝 맞추었다."밖에서 기다릴게."소희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임구택이 가볍게 뽀뽀만 하고 물러난 모습에 입을 오므린
소희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잠깐 멍해있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우리가 지금 사는 곳이 병원이랑 가까워 청아가 아줌마 돌보는데 편리하거든.""청아 씨의 어머니 곧 퇴원하실 거잖아, 그럼 퇴원한 후에 들어와."소희가 여전히 거절했다."안 돼, 나 청아와 함께 살면서 요요를 같이 돌봐줘야 해."임구택이 반박할 수 없는 이유다.그렇다고 청아의 현재 상황으로는 또 이전처럼 장시원의 집에서 살 수도 없을 거고.임구택은 눈썹을 찡그린 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냈다.......성준과 함께 식당에서 방으로 돌아온 이선은 샤워를 하고 나와서 성준의 품에 안겼다."미안해, 성준 씨. 난 단지 유정 씨와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유정 씨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어."성준이 이선의 어깨를 다독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여인은 신경 쓰지도 마, 어쩌다 마주치게 되더라도 에돌아가고. 그 여인은 그냥 답 없는 미치광이야. 예전에는 내가 정말 눈이 멀어서 그런 여인과 사귀었지."성준의 품에 기대어 있는 이선의 눈빛이 반짝였다."두 사람 그래도 1년이나 사귀었는데 자기 정말 이젠 유정 씨를 좋아하지 않아?""난 한 번도 그 여인을 좋아한 적이 없었어, 처음에 그 여인과 사귀게 되었던 것도 우리 아버지가 나를 강요해서였고. 아버지가 유씨 가문에 의지하여 장사를 크게 하려 했거든.""그럼 자기 집에서 나를 받아들일까?"이선이 걱정되어 물었다.이선은 아주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성준의 집이 명문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장사를 하는 집안이었으니 이선의 집보다는 돈이 많았다."그럼!"성준이 이선을 껴안고 그녀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샤워 후의 향기를 맡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었다."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아, 나만 자기를 좋아하면 돼."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안고 침대 쪽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방안의 전화가 울렸다. 프런트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성준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
같은 팀 팀원 리스트를 한 번 훑어본 성준은 갑자기 감격에 겨워 이선에게도 보여주었다."이것 봐! 장승이 나와 같은 팀이야! 장승은 강성 축구팀의 팀원인데, 이 사람도 이런 곳에 오다니!"이때 이선이 휴대폰으로 모 앱에 들어간 후 성준에게 보여주었다."지금 도박판도 세팅되었어. 배당률이 1:10이라는데, 우리도 한 번 걸까?"성준이 보더니 순간 눈빛이 반짝였다."장승이 나와 같은 팀이니까, 우리 팀이 틀림없이 이길 거야!""그럼 우리도 돈을 걸자! 나한테 지금 백만 원이 있어, 다 걸어도 돼!""고작 그 몇백만 원을 거는 게 무슨 재미가 있어? 이겨보았자 몇십만 원밖에 안 되는데."성준이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내며 휴대폰으로 자신의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그가 지금 쓸 수 있는 자금은 6천만 원 정도였다.그는 곧 또 회사의 구매 담당 총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급하게 돈 쓸 일이 있다며 원료를 구매하는 데에 사용될 4천만 원을 먼저 자신한테 계좌이체 해달라고 했다.구매팀 총책임자는 한참 망설이다 성준의 아버지에게 한번 여쭤보겠다고 했다.그러자 성준이 즉시 얼굴색이 어두워져 차가운 말투로 총책임자를 한바탕 위협하여 끝내는 4천만 원을 얻어냈다.회사의 4천만 원에 그의 6천만 원까지 전부 골인하여 이기게 되면 그는 쉽게 10억은 벌 수 있었다.그리고 그 돈만 있으면 그는 적어도 한동안은 그의 아버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이때 이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부 골인하는 건 너무 모험적인 거 아니야?"성준이 이선을 껴안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비즈니스를 하는 것과 같은 거야. 시기를 잘 보고 빠르고 단호하게 투자해야 하는 거라고. 일초라도 망설이게 되면 돈은 남의 것으로 되는 거야. 큰돈을 벌고 싶으면 반드시 나 같은 패기가 있어야 해! 이제 10억이 입금되면 네가 제일 좋아하는 포르셰를 사줄게."이선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 하지만 또 곧 내숭을 떨며 말했다."아니야, 나한테 돈 쓰지 마. 자기만 즐거우면 돼. 내 백만 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