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내가 늙었다는 거야?”“아마도?”임구택이 진지하게 묻는 모습에 소희가 웃음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그리고 그 대답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캠퍼스 커플들을 살펴보았다.확실히 그와 다르게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순간, 임구택의 얼굴색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럼 당신도 내가 늙었다고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비록 당신이 저 아이들보다는 늙었지만 멋있잖아.”웃음기가 가득 찬 소희의 눈빛에 화가 난 임구택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윽하게 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내가 늙었다고 생각해?”“아니! 농담이야.”소희가 듣더니 바로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에 임구택이 미소를 드러내며 말했다.“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대가를 치러야 해.”“주문하신 국수 나왔습니다!”그런데 이때, 마침 주인 아주머니가 국수를 들고 와서는 웃으며 말했고, 소희가 보더니 바로 화제를 돌렸다.“일단 국수부터 먹자.”국수의 맛은 예전 그대로였다.소희는 조용히 국수를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마침 임구택도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의 눈에는 모두 잃었던 보물을 다시 찾아낸 후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함께 추억 속의 장소로 올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국수를 다 먹고 두 사람은 함께 시끌벅적한 방고 거리를 걸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방고 거리 전체가 어느새 밝고 오색찬란한 불빛에 휩싸여 있었다.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붐비는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뭐야, 언제 샀어?”“당신 데리러 가는 길에.”2년 전에도 임구택은 매번 소희와 방고 거리를 올 때마다 사탕을 미리 준비해 소희에게 주곤 했었다.소희가 웃으며 사탕 종이를 까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그러는 소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임구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정으로 돌아가 볼래?”소희가 듣더니 순간 발길을 멈
성연희가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늠름한 표정으로 임구택을 쳐다보며 물었다.“말씀해 보시죠, 어떻게 내가 없는 틈을 타서 소희를 꼬셨는지?”덩달아 맞은편 소파에 앉은 임구택이 침착하고 여유롭게 대답했다.“소희는 내 집사람입니다.”성연희가 듣더니 바로 비웃음을 터뜨렸다.“집사람? 소희와 이혼할 생각이었던 거 아니었어요? 질렸다면서요?”“그건 오해였습니다.”“아니요! 그건 오해가 아니라 그쪽이 애초부터 소희를 믿지 않았던 거죠!”“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정말이에요?”되묻고 있는 성연희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섞여 있었다.“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또 장은서, 이은서가 나타나 소희가 다른 목적을 품고 그쪽한테 접근한 거라고 하면, 또 소희를 버릴 건 아니고요?”“절대 버리지 않습니다.”임구택의 눈빛은 확고했다.하지만 성연희는 오히려 화를 내며 소리쳤다.“남자들은 항상 그런 듣기 좋은 말로 여자들을 속죠. 그리고 소희만 바보같이 그쪽이 한 듣기 좋은 말에 넘어가고!”성연희가 말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희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노여움이 가득 찬 표정으로 소희를 질책했다.“너 전에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는지 잊었어? 다시는 임구택한테 돌아가지 않을 거라며! 다시는 임구택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며! 그런데 저 자식이 듣기 좋은 말로 몇 번 달랬다고 바로 쫄래쫄래 돌아간 거야? 그런 거냐고!”옆에서 듣고 있던 임구택의 안색이 순간 가라앉았다.“연희 씨, 지난 2년 동안 연희 씨가 줄곧 소희를 챙겨줬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불만이 많은 것도 당연한 거고. 나를 욕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욕하세요,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나한테만 화를 내요, 소희한테 뭐라 하지 말고.”“허! 이제 와서 마음이 아픈 거예요? 소희가 전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때 그쪽은 어디에 있었죠? 소희가 눈이 멀어 앞이
임구택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다시 성연희를 바라보았다.“연희 씨, 화를 가라앉히고 소희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해요, 소희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나와 소희가 다시 합치게 되는 건 단지 시간 문제였어요. 난 한 번도 소희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요.”말을 마친 후 임구택은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소희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성연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화내고 싶으면 나한테 화풀이를 해. 네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약해졌어.”“너희 두 사람이 한마음 한 뜻이고, 내가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인 거잖아, 안 그래?”“연희야!”“잠깐!”성연희가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물었다.“임구택이 방금 옆집에 있을 거라고 했던 게 무슨 뜻이야?”“구택 씨가 내 옆집을 샀어, 지금 내 이웃인 거고. 참, 이 집도 구택 씨가 샀어.”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성연희가 미간을 찌푸리고 냉소를 드러냈다.“허!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감동했어?”소희가 성연희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맑고 평온한 눈빛으로 성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연희야, 너도 사랑을 누구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잖아. 너 전에 명성 씨와 헤어지게 되면 평생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 나도 그래.”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성연희는 소희의 말에 순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러다 한참 후 숨을 깊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쉽게 임구택과 화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네가 너무 불쌍하다고!”“구택 씨가 나의 옆집으로 이사 왔다는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사실 구택 씨가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했어. 처음엔 나도 이미 헤어진 판에 다시는 돌아가지 말자고 다짐했어. 하지만 연희야, 난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어. 구택 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난 너무 행복해.”소희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성
“알았어, 그럼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게. 다만 그 자식이 또 너에게 상처를 준다면 난 목숨 걸고 그 자식한테 복수할 거야.”성연희가 여전히 화난 말투로 말했다.그런데 이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임구택의 메시지였다.[내가 가서 연희 씨와 잘 얘기해 볼까?]“그 자식이야? 뭐라는데?”성연희가 소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묻자 소희가 임구택이 보내온 메시지를 성연희에게도 보여 주었다.그리고 성연희가 보더니 바로 휴대폰을 앗아가 임구택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소희는 그쪽 말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어요. 그쪽을 버리겠다는데요?”소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연희야! 그런 장난을 치면 어떡해?”“왜, 내가 널 그 자식한테 줬는데, 장난도 못 쳐?”그런데 이때, 성연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현관 문이 열렸고, 임구택이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긴장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이에 소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연희가 농담한 거야.”임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소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고개 숙여 키스했다.“엄마야!”임구택의 뜬금없는 동작에 성연희가 놀라서 바로 소파에서 일어섰다.“임구택 씨, 지금 일부러 나한테 시위를 하는 겁니까?”임구택이 다시 한번 소희의 입술에 소리를 내며 뽀뽀하고는 천천히 고개 돌려 성연희를 쳐다보았다.“소희에 대한 나의 결심을 봤죠?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화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욕하면서 화풀이를 해요, 소희를 가지고 나한테 장난치지 말고.”심한 집착이 섞여 있는 임구택의 눈빛에 성연희는 순간 할 말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임구택을 향해 입을 열었다.“그래요, 한 번만 더 믿고 소희를 그쪽한테 맡길 게요. 다만 또 소희를 괴롭히거나 소희한테 상처를 줬다간…….”말하고 있던 성연희는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눈시울마저 붉어졌다.“난 절대 그쪽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걱정 마요, 난 연희 씨보다 더 소희가 상처
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다.”“임구택과 다시 만나기로 결정한이상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인생은 짧으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즐거운 게 제일 중요한 거야.”성연희가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남은 술을 원샷 해버렸다. 그러고는 또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가 성연희의 인생 신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소희는 웃으며 술잔을 들어 성연희와 건배를 했다.반짝이는 불빛아래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진 성연희는 유난히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잔잔한 음악에 따라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과 소희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그렇게 한 잔에 한 잔을 이어 마시다 보니 성연희의 손 옆에는 어느새 빈 술병 두 병이 놓여 있었고, 그제야 성연희의 정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소희는 급히 계속 술을 따르고 있는 성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명성 씨와 무슨 일이 있었어?”이미 반쯤 취한 성연희가 듣더니 애교와 투정이 묻은 어투로 대답했다.“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자.”이에 소희가 성연희의 술잔을 빼앗아내고 정색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인데?”성연희는 등을 가죽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소희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소희야, 명성 씨가 결혼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아. 혹시 마음이 변한 거 아닐까?”소희가 순간 멍해졌다. 전에도 성연희는 노명성과 감정상의 문제가 생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희는 여민과 함께 술자리에 참석한 노명성을 만났었고, 심지어 그때 노명성을 쫓아가느라 큰 오해도 생겼었다.‘그 후 이현이 은퇴하면서 여민도 연예계를 탈퇴했고, 연희가 노명성과 함께 프란스로 간다고 해서 두 사람 간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명성 씨가 언급하지 않으면 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 봐, 어떤 태도인지.”소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하지만 성연희
[어디야?]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임구택의 물음에 소희가 술집 이름을 말해주었다.[당신과 연희 씨 둘 다 술 마셨어?]“난 괜찮은데, 연희가 많이 마셨어.”소희가 대답하면서 고개를 돌려 성연희 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성연희와 김영이 오랜만에 만난 친형제 마냥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내가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남들이 와서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말고.]‘하지만 연희가 곧 김영 씨와 의형제를 맺을 것 같은데?’임구택의 당부에 소희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웨이터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부탁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소희는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소파 등받이에 엎드려 몰래 성연희와 김영을 찍고 있는 수상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다.반쯤 취한 성연희는 자신과 김영 사이의 거리가 애매할 정도로 가깝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웃으며 김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진 소희는 바로 손에 든 물컵을 사진 찍고 있는 남자에게 던졌다.그러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컵은 남자의 팔을 명중했고,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손에 든 휴대폰도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하지만 남자는 팔의 통증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일어나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그런데 이때 소희가 신속히 몸을 움직여 남자 먼저 휴대폰을 주웠고, 바로 발을 들어 빼앗으려고 달려드는 남자를 세게 걷어찼다.뻥-묵직한 소리와 함께 소파에 부딪힌 남자는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그리고 그 소리에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이 분분히 시선을 소희 쪽으로 돌렸다.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휴대폰 앨범을 찾아냈다.앨범 속에는 성연희를 몰래 찍은 사진이 십여 장 넘게 있었다. 심지어 일부러 각도를 잡고 찍은 게 분명했다. 사진으로 봐서는 성연희와 김영이 서로 애매하게 기대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소희가 듣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한번 훑었다.“피해자가 비난을 받는 건 또 처음 겪어보네요. 오늘 내가 이 사람의 범행을 제때에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발견하지 못했더라면요? 이 사람이 몰래 찍은 내 친구의 사진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누가 알아요? 이 사람은 지금 내 친구의 초상권을 침해했습니다. 그리고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으니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는 건데, 참 쉽게 여러분들의 가여워하는 대상이 되었네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를 위해 불평을 토하던 몇 사람은 소희의 말에 순간 난처해져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대체 뭘 찍었는데요? 저도 보여줘요.”이때, 옆에 있던 김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성연희의 손에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앨범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무릎 꿇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김영의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내고는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주위의 사람들이 보더니 전부 어리둥절해졌다. 특히 방금 남자의 편을 들었던 몇 사람은 더욱 고개도 들지 못했다.그렇게 편을 들어줬는데 전혀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남자가 도망가게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었던 소희는 신속히 쫓아갔다.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남자의 눈빛에 한줄기의 한기가 스치더니 바로 휴대폰을 창문밖으로 던졌다.술집은 6층에 자리 잡고 있어 휴대폰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산산조각이 났고, 남자는 그제야 겁도 없는 웃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휴대폰이 망가지고 사진도 찾지 못하게 되었으니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겠는데요?”“…….”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소희는 바로 발을 들어 남자를 걷어찼다. 그러자 남자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히면서 피를 토하고 말았다.순간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술집 사방에서 들려왔다.술이 반쯤 깬 성연희도 소란에 큰소리로 외치며 급히 달려왔다.“소희야!”소희는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는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러는지 이젠 중요하지
노명성은 성연희를 데리고 먼저 술집을 떠났고, 뒤따라 임구택과 함께 술집을 나가던 소희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려 술집안을 둘러보았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김영이 보이지 않았다.“왜 그래?”임구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술집에서 나와 차에 오른 후 소희는 문득 임구택을 향해 물었다.“당신이 노명성을 불렀어?”“응. 명성 씨의 여자 친구가 술에 취했는데, 명성 씨를 부르지 않으면 누구를 불러?”농담이 섞인 어투로 대답하고 있는 임구택의 의도는 너무 뻔했다. 그러나 소희는 굳이 그걸 들춰내지 않고 걱정이 되어 다시 말을 이어갔다.“방금 그 사람 절대 술김에 충동적으로 연희를 몰래 찍은 게 아니야. 왠지 의도적인 것 같았어.”‘그의 휴대폰에는 다른 몰카 사진이 없었어. 그러니 상습범은 아니라는 거지. 설령 정말로 연희가 예뻐서 몰카한 거라고 해도 한 두 장만 찍으면 되는데, 굳이 열 몇 장이나 찍었어.’‘게다가 각도도 마침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애매한 각도였고.’‘그러니 고의적인 게 분명해.’‘아니면 누가 시켰거나.’임구택이 듣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럼 방금 그 사람을 그렇게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소용없을 거야. 그 사람이 휴대폰을 망가트렸잖아. 게다가 그 능청스러운 태도로 봐서는 범행을 승인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경찰들은 더욱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야.”“연희 씨가 그래 봬도 명성 씨의 곁을 그렇게 오랫동안 따라다녔는데,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닐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응.”임구택의 위로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근심이 되는 건 여전했다.경원주택단지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소희는 곧장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의 손목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봐 봐, 누가 돌아왔는지.”임구택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맞은편 문에 붙은 스크린에서 지니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들뜬 어투로 소희에게 인사를 했다.“소희 님, 오랜만이에요!”소희가 보더니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