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장씨 그룹에서 몇몇 입찰 회사들의 미팅을 소집했다.배강은 스탤 그룹의 사람들에게 특별히 당부했으며, 그들의 책임자인 우민율도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오전 열 시, 회의가 정시에 시작되었고 이정 회사를 제외한 다른 네 회사는 모두 참석했다.장시원이 들어올 때, 몇몇 회사들이 낮은 목소리로 장씨 그룹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토론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원의 일행이 들어오자 모두 순간 조용해졌고, 일어나서 공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했다.“장시원 사장님, 배강 부사장님!”“사장님께서 갑자기 우리를 부르셨다는 건 결과가 나왔다는 뜻인가요?”“사장님은 앞으로 우청아 씨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인가요?”……시원은 모두에게 앉으라고 한 후, 시크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찰 가격 유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이미 일부 단서를 찾아냈고, 여러분도 오랫동안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에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배강이 이어서 말했다. “저희 측 조사에 따르면, 저희 회사의 우청아 씨가 이정으로부터 6천만원과 귀중품을 받았다는 주장은 모두 모함이고 허위 사실입니다.”배강이 말을 마치자, 다른 회사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스탤 그룹 조 부사장이 곧바로 말했다. “당신들이 모함이라고 하면 그냥 모함인가요? 장씨 저택은 큰 회사이고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그리고 저희는 장씨 그룹에 대한 신뢰성을 보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를 속일 수 없고요!”이에 배강은 비웃으며 말했다. “제 말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조 부사장님,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조 부사장은 우민율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민율은 시원을 향해 한눈을 팔며 미소 지었다. “부사장님이 청아 씨가 모함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누가 그런 모함을 했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 잘 귀를 기울여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배강은 말했다. “6천만원에 대한 송금은 청아 씨가 이미 상황을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또
우청아가 전화를 끊고 배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정의 고태형 사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태형의 도착 소식에 모두가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입찰 가격 유출 사건이 터진 이후 태형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드디어 나타났다.잠시 뒤, 태형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청아에게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장시원과 배강에게 왜 늦었는지 설명했다.그러자 배강이 입을 열었다. “고태형 사장님께서 딱 좋은 타이밍에 오셨어요. 사장님께서 찾아낸 단서를 모두에게 공유해 주시죠.”태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해 우청아 씨에게 먼저 사과드립니다.”“저희는 원래 동문 사이였고, 제가 청아 씨에게 작은 부탁을 했는데, 그것이 남에 의해 이용되어 많은 문제를 일으켰네요.”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또렷이 말했다. “최근 모든 것을 전면적인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그 6천만원의 송금 기록은 제 비서가 제 휴대폰에서 몰래 전송한 것이었습니다.”“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오늘 그를 데리고 왔으니 직접 모두에게 설명하게 하겠습니다.”태형이 말을 마치고 회의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오시죠!”회의실 문이 열리고 35살 정도의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인 채 민망한 표정으로 굳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스탤 그룹의 조 부사장 옆에 있는 사람이 저에게 2천만원을 주고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조 부사장이 얼른 일어나며 얼굴이 붉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그러자 민율도 차갑게 말했다. “고태형 사장님, 모함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어요!”모든 증거가 스탤 그룹을 가리키자 다른 회사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고, 이스트의 사장이 갑자기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만약 스탤 그룹 사람이 청아 씨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면, 고태형 사장의 손에 들어간 입찰 가격은 어떻게 된 건가요?”“그것도 스탤 그룹이 준 것은 아니겠죠?”“맞아요, 스탤 그룹에서 보낸 겁니다!” 태형이 말을 꺼냈다. “정확히는
배강이 전화를 걸어 최결을 회의실로 부르게 했다.최결은 오늘 입찰 회사들을 위한 회의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아마도 마음이 불안했기 때문에,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들어섰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프로젝션에 비친 사진을 보고 얼굴색이 확 변했다.‘우민율이 괜찮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진이 있을 수 있지?’최결은 회사에서 자신의 계정을 조사할까 봐 그 돈을 자신의 계좌로 옮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문제가 생길 수 있었을까?최결은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순식간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최결 씨,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해보시죠!” 배강의 표정은 냉담했다. “말하지 않으면, 저희는 지금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회사 기밀을 훔쳐 개인 이득을 취하는 건 징역 구형이 되니까!”“경찰에 신고하지 마세요!” 최결의 얼굴색이 창백해지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우민율을 쳐다봤다. 하지만 민율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시죠.”배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최결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배강의 손에 무슨 증거가 더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 인정하면 자신의 커리어도 끝날 것이었다.“아직도 입을 안 여는 겁니까?” 배강이 비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말할게요!” 최결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였어요. 제가 우청아의 입찰 가격을 몰래 보고 우민율 사장님에게 유출했어요.”사람들이 탄식했고 장시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 곁에서 일한 세월이 몇 년인데,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최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얼굴은 창백했고 우울해 보였다. “저……, 저는 돈 때문이 아니었어요. 우청아가 39층에 온 이후로, 사장님께서 중용하시고 점점 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셨어요.”“그리고 저는 언
우민율의 목적은 분명했다. 우청아를 장시원의 곁에서 쫓아내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경쟁자인 이정을 동시에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이 사건이 터진 후 시원이 진실을 알아낸다 해도 모든 것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사실이 밝혀지면 장씨 그룹과 스탤 그룹의 협력, 심지어 우씨 가문과의 모든 협력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청아를 앞세워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그러니 민율은 도박을 한것이었다. 시원에게 우씨 가문과의 협력이 중요한가, 아니면 우청아가 더 중요한가? 결국, 시원은 청아를 선택했다.곧 시원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여러분 모두 상황을 명확히 알았을 겁니다. 이건 단지 한 건의 불미스러운 입찰 사건일 뿐입니다.”“물론, 저희 회사 내부에 문제가 있었고, 저희도 책임이 있습니다.”“입찰과 관련된 사항은 배강 부사장이 추후에 다시 알려드릴 겁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마친 후 시원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다른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몰랐지만 진실은 마침내 밝혀졌다. 또한, 한 번에 두 명의 경쟁자를 제거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 사람들은 민율에게 고마워하면서도 그녀의 실패를 즐겼다.민율은 분노로 온몸이 떨렸고, 얼굴을 굳히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 성연희와 소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연희는 손에 선물 상자를 한 아름 들고 있었고, 민율 앞에 그것들을 툭 던졌다. “본인 물건은 본인이 챙겨가세요. 이왕 살거면 좀 비싼 걸로 살것이지, 이런 쓰레기들을 뇌물이랍시고 주다니, 참 대담하네요!”연희의 조롱에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민율이 눈을 부릅떴다.“성연희 씨, 이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우청아는 내 친구고, 나는 청아 딸의 이모예요. 근데 그래도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요?”“그러니까, 청아한테 이딴 쓰레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연희는 거만하게 말했다. “
39층에서 우청아는 몇 가지 문서를 정리한 후 반 시간쯤 지나 최결이 사장실에서 나왔다. 몇 날 며칠 동안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최결은 완전히 낙담한 모습이었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온 그녀는 몇 번 숨을 크게 쉬고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해고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전략기획팀에서 신주영이라는 여성이 올라와 최결과 업무를 인계하기 시작했다. 청아는 문서를 들고 장시원에게 서명을 받으러 갔고, 배강도 그곳에 있었다. 청아가 들어오자 배강이 농담을 던지며 말했다. “방금 사장에게 이번 일로 청아 씨가 겪은 고생을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이야기했어요.”이에 청아는 차분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일에 저도 책임이 있어요. 사장님께서 저를 질책하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게다가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저는 이번 입찰에 더 이상 참여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사장님께서 다른 인원을 배정해 주시면, 필요한 곳에서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시원은 문서를 살펴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청아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주영 씨에게 맡기세요.”“알겠습니다.” 청아가 대답하고는 시원에게 문서를 건네주었고 시원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서명을 마친 시원은 더 이상 말없이 문서를 밀어냈다.그날 이후, 시원은 회사에서 청아에게 냉담하고 거리를 둔 채, 엄격하게 업무적인 관계만을 유지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며 청아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고,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청아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서류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배강은 청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원에게 물었다. “왜 너랑 청아 씨 사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지?” “아무 일도 없어.” 시원은 무심한 얼굴로 계속 문서를 검토하며 말했다.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시죠. 궁금증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야.”배강은 몸을 기울여,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태형이 자신의 비서가 우민
우청아는 탕비실에서 한참 있다가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최결은 이미 자리를 떴고, 새로 올라온 신주영이라는 여자가 청아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주영입니다. 주영 씨라고 부르시면 돼요!”청아는 그녀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우청아라고 합니다.”“청아 씨, 앞으로 39층에서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주영은 청아보다 세 살이 많고, 장씨 그룹에서 이미 4년을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또한 매력적인 인형 같은 얼굴을 가진 주영의 인사에 청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주영 씨가 저보다 장씨 그룹에서 근무한 시간이 더 길어서, 저도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청아 씨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에요?”주영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장시원 사장님 성격은 어때요? 잘 지낼 수 있을까요?”이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부하 직원들에게 정말 잘해주세요.” “제가 4년 동안 사장님을 몇 번 보지 못했어요. 갑자기 39층으로 올라오게 되어 조금 떨려요.”“청아 씨, 사장님 앞에서 제 좋은 말 좀 잘 해주세요. 그리고 모르는 게 있으면 잘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주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분명 사장님께서 주영 씨의 업무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일 거예요.” 불안해하는 주영을 청아가 안심시켰다. “고마워요, 청아 씨!” 주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 일하러 가볼게요. 청아 씨도 뭔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청아는 자리에 앉아 일을 계속하다가 가끔씩 사장실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입찰 업무는 주영에게 넘어갔고, 주영은 열심히 일하며 청아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물어보고, 이정 등 몇몇 회사와 상세히 소통했다.점심에 주영이 청아를 불러 함께 식사했다. 그녀는 청아를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세팅했고, 부엌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 청아를 위해 밀크티까지 준비했다. 둘은 이제 막 알게 되었지만, 주
배강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신주영 씨가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저는 아름다운 분들에게 항상 친절합니다.”배강의 말에 주영이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제가 충분히 예쁘지 않았나 봅니다.”이에 배강이 농담조로 말했다. “제가 전에 주영 씨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던 거죠!”“부사장님, 정말 말을 잘하시네요!” 주영이 입술을 깨물며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부사장님, 혹시 우청아 씨를 좋아하시나요?”주영의 어이없는 질문에 배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단지 디저트를 사 줬다고 해서 제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주영 씨,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질 수는 없는 건가요?”하지만 주영이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며 의도적으로 말하면 안 될 걸 말하려는 척했다.“부사장님, 최결이 떠나기 전에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세요?”“뭐라고 했나요?” 배강이 커피잔을 들고 바에 기댄채로 물었다.“최결이 저에게 장시원 사장님이 청아 씨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주영은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배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사장님, 최결이 말한 게 사실인가요?”이에 배강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장님이 청아 씨를 왜 좋아하는지 압니까?” “저야 모르죠!”주영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배강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청아 씨는 쓸데없는 말을 안 하고 과묵하거든요!”배강의 말에 주영이 어색하게 말했다. “부사장님, 제가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셨나 봐요.”하지만 배강이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사장님 곁에서 일을 하려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규칙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이건 주영 씨에게 하는 충고입니다.”주영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웃음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테이블 위의 무스 케이크를 집으려 했다. 그러나 배강이 살짝 몸을 피하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건 청아 씨 겁니다.”딱 잘라 선을 긋는 부사장에 주
“회사 그만두면 요요 데리고 시카고로 돌아갈 건가요?” 장시원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시원이 서명을 마쳤는데 청아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춰 섰는데, 힘이 너무 세어 종이를 뚫을 듯했다.이내 평정심을 찾은 시원은 사직서를 청아에게 밀어주었다. 준수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표정이 어두웠고, 깊은 눈빛은 마치 심연 같았다.“잘 가세요.”청아는 목에 뭐가 걸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장님도요,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청아는 사직서를 들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곧은 등은 마치 몇 킬로그램의 짐을 짊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청아는 여전히 느리지 않게,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시원은 청아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함께 사라진 듯 허무했다....저녁에 시원은 약속이 있었고, 끝나고 났을 때에는 이미 반쯤 취한 상태였다.벌써 밤 11시였기에 주성이 운전하며 공손히 물었다. “사장님, 본가로 돌아가시겠습니까?”시원은 창밖의 화려한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쯤 취한 시원의 검은 눈동자에 불빛이 반사되어, 눈 속의 허무함을 비추었다.잠시 후, 시원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정으로 가죠.”주성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어정 쪽으로 운전했다.반 시간 뒤, 차가 건물 아래에 멈췄고, 주성은 시원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고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고 차에서 내려 그를 도우려 했다.“필요 없어요!” 시원이 주성의 손을 밀어내고 굳건히 혼자 걸어갔다.“혼자 올라갈 수 있습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을 연 시원은 불을 킨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마 가슴도 빈 집처럼 텅 빈것같아 굉장히 힘들어 보였다.시원은 언젠가 청아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게스트룸으로 걸어가 문을 열자, 시원의 눈에 깊은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방 안에는 크고 작은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