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든은 사람들을 데리고 복도를 지나 큰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서재, 식당, 침실이 있었다. 거실에는 흰 연구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사십 대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공손히 일어나 말했다. “레이든 씨.”레이든은 일행들에게 소개했다. “여기 이곳의 책임자인 라펠트 교수입니다!”라펠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소희는 손을 꽉 쥐었다. 라펠트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소희는 라펠트의 눈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쩐지 라펠트를 찾을 수 없었다. 이 환경을 보니, 라펠트는 하루 24시간 이곳에 머무르며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소희는 구택의 뒷모습을 보았다. 구택이 갑자기 레이든의 마이크로파 연구실을 보자고 한 것은 소희가 찾고 있던 사람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소희는 자신의 임무를 구택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구택은 추측했고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금발의 여자가 침실에서 나와 레이든을 약간 두려워하며 라펠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소파에 앉아 있는 구택과 남궁민을 힐끗 보고는 라펠트에게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네요?”라펠트가 웃으며 말했다. “이 두 여성분을 데리고 좀 구경시켜줘.”“좋아요!” 여자는 소희와 강아심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아심과 소희는 눈빛을 교환하고 금발의 여자를 따라갔다.레이든의 전화가 울려서 레이든은 다른 방으로 전화를 받으러 갔고, 라펠트도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때 남궁민은 구택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디야 씨, 왜 레이든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추측해 보세요.”마이크로파 무기는 핵무기보다 강력하다. 지금 여러 큰 나라들이 그것을 연구 중이다. 오늘 이디야가 제안했을 때, 레이든은 거절하지 않고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데 꽤 자신만만한 것처럼 보였다.구택은 소파에 앉아 시크하게 되물었다. “남궁민 씨는 왜 그런 것 같습니까?”남궁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웃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맑게 흐르는 강물, 강가의 풀밭, 금빛 버드나무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강 건너편에는 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광경은 끝없이 넓고 광활했다. 강아심은 강가로 다가갔다. 물은 맑고 투명해 예쁜 자갈들과 몇 마리의 작은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정말 지하 12층이 맞을까?’금발의 여자는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고, 깨끗한 식탁보 위에는 다양한 신선한 과일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그네가 있었는데, 이곳이 금발의 여자와 라펠트가 평소에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잠시 이곳에 머문 후, 금발의 여자는 소희와 아심을 다시 복도로 안내하여 또 다른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여름의 더운 날씨와 함께 해변과 바다가 펼쳐졌다.세 번째 문을 열자,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밀밭이 나타났다. 밀밭에는 나무로 된 망루가 있었고, 망루 위에는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이는 소희가 처음 온두리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풍경과 비슷했지만, 이곳은 더욱 아름다웠다.네 번째 문을 열자, 눈과 얼음의 세계가 나타났다. 큰 스케이트장이 있었고, 모든 장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이 지하 12층에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언제든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겨울의 눈밭에 서서 아심은 멀리서 스키복을 입고 있는 금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심은 눈송이를 떠받들고는 소희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자도 있고, 사계절도 만들어 놓았으니, 레이든 씨는 라펠트를 평생 여기서 지내게 할 생각인 것 같아요.”소희의 맑은 눈은 얼음의 차가움을 반사하며 빛났다. ‘나라를 배신하고, 팀을 배신하고, 모든 팀원의 성과를 훔쳐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아니, 라펠트는 분명히 고통받고 있을 거야. 그래서 내가 라펠트의 고통을 끝내러 온 거잖아.’곧이어 소희는 아심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돌아가죠.”환상은 결국 환상일 뿐, 그 속에 빠지는 것은 자
곧 레이든은 이디야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거두고 웰오드에게 신재생 에너지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임구택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사색에 잠긴 듯했다....구택이 임시로 머무는 별장으로 돌아온 강아심은 문을 닫고 나서 한결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뭐 마실래요? 술 한잔할래요?”“아니요, 그냥 물 한잔이면 돼요.” 소희가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커피 한잔해요. 레이든이 이디야에게 보낸 좋은 커피 원두가 있는데 맛이 꽤 괜찮더라고요.” 아심은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희는 주방에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아 아심이 커피 원두를 계량하고, 갈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심의 동작은 질서 정연하고 우아했으며, 한 동작 한 동작마다 독특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희는 아심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는 아심이 성연희의 친구여서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만나보니, 그 매력은 아심 본인이 지닌 것이었다. 아심은 매우 매력적이고 우아해서 남자들에게는 매혹적이고, 여자들에게도 호감을 불러일으켰다.곧 방 안에 향긋한 커피 향이 퍼졌다. 아심은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식탁에 놓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장담하건대, 우리가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이디야가 돌아올 거예요. 지금 레이든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마음은 여기로 돌아와 있을테니까요.”이에 소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자 아심은 고개를 저었다.“괜히 끌어들여서 미안해요.”“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사실 나도 진언을 찾으러 왔거든요. 이디야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지만, 혼자서는 요하네스버그에 들어올 수 없었어요.”“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죠.”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네요.”“맞아요. 우리가 목표를 빨리 이루고, 진언이 무사하기를 바라죠.” 아심은 커피잔을 들어 소희와 살짝 부딪쳤다. 아심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반쯤 눈을 감으며 미소 지었다.“소
임구택이 긴 다리로 소희를 누르고, 팔을 소희의 얼굴 옆에 지탱하며 완전히 덮쳤다. 그리고 뜨겁고도 격렬하게 입술을 탐했는데 때로는 깊다가 또 때로는 가벼운 키스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에 소희는 온몸이 힘이 빠져서 손을 들어 구택의 얼굴을 감싸며 부드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소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임구택, 여기서 떠나. 요하네스버그를 떠나서, 차라리 온두리에서 나를 기다리든지. 내가 임무를 마치면 찾아갈게.”지하 12층은 단순한 곳이 아니었다. 레이든이 라펠트를 막기 위해 단순히 이익만으로 유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이크로파 무기가 가동되면 요하네스버그 전체가 폐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희는 직감적으로 레이든이 화가 나면 매우 위험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느꼈다. 그랬기에 소희는 자신이 맡은 임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위험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구택은 이마를 소희의 이마에 맞대고 소희의 마음을 읽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온두리? 마이크로파 무기가 가동되면 온두리 전체가 황폐해질 거야. 내가 어디에 있든 차이가 없어.”“그렇다면 말리 연방으로 돌아가.”“쉿!” 구택은 긴 손가락을 소희의 입술에 대며, 깊고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였다.“나를 화나게 하지 마.”구택은 고개를 숙여 소희의 입술을 탐하고는 속삭였다.“지금은, 너를 아주 격렬하게 원할 뿐이야.”구택은 소희의 허리를 끌어안고, 곧장 침실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소희에게 키스하며 말했다.“너무 보고 싶었어. 그러니 잠시 후에 내가 너무 거칠게 굴어도 좀 이해해 줘.”문이 세게 닫히고, 커튼이 자동으로 닫혀 방이 어두워졌다. 구택은 인내심이 바닥이 나 소희의 치마를 벗겼고, 소희의 등을 부드러운 침대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소희는 눈을 감고 구택과 키스를 했다. 구택은 소희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낮게 속삭였다.“사랑해.”소희는 잠시 이곳의 모든 것을 잊고, 임무도, 진언도 잊고, 구택에게만 집중하였다....남궁민은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여러 가지
이에 남궁민은 진지하게 말했다.“매일 레이든의 그 음침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가장 큰 고통이죠.”이에 소희는 어이없어 할 말을 잃었다.“...”남궁민의 얼굴을 보자 소희는 갑자기 심명이 떠올랐다.‘아니야, 심명은 이 사람보다 훨씬 귀여워!’오후에 소희는 장명양과 간미연과 연락을 했다. 그들에게 온두리에 머물며 경솔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희는 이미 목표를 찾았고, 암살 계획을 세울 것이며, 후에 그들이 요하네스버그로 들어오도록 할 것이었다.하얀 독수리와 푸른 독수리가 번갈아 가면서 문자를 보냈다.[보스, 임구택이 갔잖아요. 그 사람 많이 화난 건 아니죠? 막 괴롭히진 않았죠?][보스를 걱정하는 거 맞아? 그런데 지금 네 표정이 왜 이렇게 들떠 보이지?][왜 내 속마음을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그래?][대장을 속이려 하지 말라고!]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몇 분 후 하얀 독수리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진지하게 말할게요! 보스, 목표는 어떤가요?]이에 소희가 대답했다.[약간 어려워.]소희는 아직 지하 12층에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날 돌아온 후, 남궁민은 소희와 함께 지하 12층의 상황을 분석하며 라펠트에게 이미 레이든이 폭탄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라펠트가 죽으면 지하 12층 전체가 폭파될 수도 있고, 마이크로파 무기가 가동될 수도 있다. 비록 마이크로파 무기가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더라도, 현재 개발된 결과만으로도 위력은 무시할 수 없다. 임구택이 말했듯이, 한 번 가동되면 온두리 전체가 황폐해질 것이다.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작았다. 레이든은 라펠트와 함께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삼각용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온두리는 삼각용의 근거지니까. 하지만 라펠트를 죽이기 전에 모든 가능성을 예측해야 했다. 소희의 임무는 라펠트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 성과를 가져가는 것이다.이에 푸른 독수리가 문자를 보냈다.[라펠트의 컴퓨터를 해킹해 봤지만, 핵심 자료를 찾지 못
소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바람이 소희의 귀 옆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부드럽고 하얀 뺨에 드리웠다. 검은 눈동자, 붉은 입술, 하얀 치아가 한데 어우러져 빛을 발했다. 부드러운 모습은 사람의 방심을 풀게 했는데 소희는 핑크빛 입술을 오므리며 미소 지었다.“그럼, 가서 신재생 에너지에 관해 얘기하는 건 어때?”그러자 임구택은 냉소하며 말했다. “난 그보다는 서희의 위패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데?”소희는 놀라며 숨을 들이마셨다.“알았나 봐?”그러자 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네 말은 너도 알고 있었다는 거네. 그래서 남궁민에게 말했어? 네가 서희라고?”이에 소희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서희는 이미 공식적으로 죽었다. 그랬기에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었지만 구택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 한 사이인가?”소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솔직히 말해서, 만나기 전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어.”“그 후에는? 남궁민이 너를 위해 사당을 지었다는 걸 보고 감동받았나?” 구택이 다그치자 소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남궁민이 혼을 떠돌게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약간.”소희의 대답에 구택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눈이 살짝 가늘어지며 냉랭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갑자기 일어나며 말했다.“지금 당장 찾아가서, 그 약간의 감동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얘기해 보자.”소희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장난이었어!”“아니, 난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구택은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갔다.“자기야, 곧 봐.”구택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소희는 답답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이마에 두드렸다. ‘왜 약간이라고 말했을까? 왜 이 남자의 소유욕을 과소평가했을까? 이제 어떻게 하지? 구택이 정말로 남궁민에게 서희에 대해 얘기할까?’소희는 바로 구택에게 영상 통화를 걸자 구택은 전화를 받았다. 구택은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얼굴이 썩 좋지 않았다.“무
성 중앙에 있는 10미터 높이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레이든은 트리에 진짜 금과 은으로 된 선물을 걸어두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가장 위에 있는 10캐럿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웠고, 계속해서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소희와 강아심이 그곳을 지나갈 때, 누군가 떨어져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아예 몸을 밟고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레이든이 일부러 이 사람들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것 같지 않아요?”소희의 말에 아심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정말 그러네요, 레이든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소희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 사람 정말 이상해요.”오늘 밤 레이든은 파티를 열었고, 이디야와 남궁민도 초대에 응했다. 소희와 아심은 함께 저녁을 먹고, 이후 술집에서 축제에 참여하기로 했다. 술집은 평소보다 더 붐볐다. 크리스마스이브보다는 할로윈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상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었고, 아무나 붙잡고 키스를 나눴다. 심지어 상대의 성별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마치 성안의 모든 괴물이 한꺼번에 나온 것 같았다.아심은 여전히 고양이 가면을 썼고, 소희는 이전에 썼던 가면을 썼다. 두 사람은 술집에 들어가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조용한 구석을 찾아 두 잔의 술을 주문했다.잠시 후, 양재아가 술을 가져왔다. 재아는 산타클로스 모자를 쓰고 있었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이 사람들 정말 미쳤어요!”이윽고 소희는 아심과 재아를 서로 소개했는데 재아는 아심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라나 씨 정말 아름다워요!”이에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고마워요!”소희가 재아에게 묻자 재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남자친구는 어때?”“어제 봤는데 상태가 좋지 않더라고요. 내가 뭘 물어도 대답하지 않아요.”소희는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아
임예현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이곳에 오면서부터 내 인생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어요. 게다가, 내가 쓸모가 없었다면, 양재아를 도와 당신을 구할 때 이미 죽었을 거니까.”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각자 자신의 인생과 선택이 있는 법이기에, 남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그러다가 임예현이 갑자기 말했다.“소희 씨, 이 일은 재아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재아가 내가 이곳의 쾌락을 즐기느라 재아를 배신했다고 믿게 해 주세요.”소희는 맑은 눈빛으로 대답했다.“알겠어요, 비밀을 지켜줄게요. 그리고 저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세요.”이에 예현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알겠어요.”소희는 눈을 돌려 물었다.“예현 씨가 일하는 곳은 어딘가요?”“48층이요.”소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묻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갔다.술집강아심과 재아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재아는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났다. 아심은 자신의 잔을 비운 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바 쪽으로 갔다. 겨우 빈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옆자리에 관리자 헤이브가 한 여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아심은 의자에 앉아 칵테일을 주문하는데 헤이브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라나 씨!”이에 아심은 고개를 돌려 살짝 끄덕였다.“헤이브 씨!”헤이브는 물었다.“라나 씨, 이곳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가요? 어떤 불만이든 말씀해 주세요. 손님의 컴플레인은 우리의 발전 방향입니다.”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모든 것이 좋아요. 헤이브 씨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당연한 일입니다.” 헤이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옆의 금발 여성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심은 잔을 비운 후 다시 한 잔을 주문해 모두 마셨다. 그리고 헤이브는 아심을 한번 돌아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한 남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