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솔, 네가 경성으로 돌아간 걸 알아. 하지만 나는 강성을 떠나지 않았어.][넌 한때 나를 위해 M 국까지 쫓아왔으니, 이제는 내가 강성에서 너를 기다릴게.][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 기다릴 거야.]강솔은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넣고 표를 확인한 후 영화관에 들어갔다.설 전에 개봉한 코미디 영화는 전체 관객들을 웃게 했다. 강솔도 함께 웃으며, 이 기간에 쌓인 고통과 억압을 모두 발산하는 듯,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이에 진석은 티슈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어도 돼. 어차피 아무도 못 보니까.”강솔은 고개를 돌려 눈에 눈물을 머금고도 고개를 저었다. “울지 않아.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울지 않아.”진석은 미소를 짓고 계속 영화를 보았다. 두 시간의 영화가 끝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밖의 차들과 불빛이 번쩍이는 야경을 보며 진석은 물었다. “집에 가서 먹을래, 아니면 밖에서 먹을래?”강솔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밖에서 먹자. 네가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녀 줬으니, 내가 살게!”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을까?”강솔은 털 방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사는 거니까, 네가 결정해!”“날씨가 추우니 샤부샤부 먹자.”강솔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역시 나를 배려해 주는구나!”샤부샤부는 진석보다 강솔이 더 좋아했다.“가자!” 진석은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둘은 소문은 없지만 맛이 뛰어난 전통 샤부샤부 집을 선택했다. 뜨거운 증기가 피어오르는 샤부샤부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진석은 강솔의 입맛을 잘 알았기에 강솔이 좋아하는 소스를 준비했다. 강솔은 턱을 괴고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진석아, 만약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를 이렇게 잘 알고 매일매일이 이렇게 행복할 텐데.”진석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
진석은 말했다. “그래, 내일 나랑 뛰러 가자.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강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강솔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바쁜 와중에 하루 종일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너랑 놀아준 게 아니야.”진석은 강솔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정말 즐거웠어.”강솔은 진석의 깊고 진지한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를 느낀 듯했지만, 곧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진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추워. 들어가자.”“응!” 강솔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잘 자!”강솔은 곧장 집으로 걸어갔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진석은 그녀를 계속 바라보다가 강솔이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서야 차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강솔을 감쌌다. 강솔은 롱패딩을 벗고, 신발을 갈아신으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아까 진석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강솔은 그저 자신이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갈아신고 나서 윤미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창가로 걸어갔다. 창가에 서서 진석의 차가 이미 떠난 것을 보고 나서야 강솔은 긴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역시 자신이 신경이 예민하다고 느꼈다.“뭘 보고 있니?” 윤미래가 다가와 묻자 강솔은 거실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빠는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연말이라 너무 바쁘셔.” 윤미래는 웃으며 강솔에게 갓 끓인 과일 차를 건넸다. “하루 종일 밖에 있었는데, 어디 갔다 왔니?”강솔은 따뜻한 차를 받아 들고 무심코 말했다. “놀이공원, 영화관, 샤부샤부 먹었어요.”“어머!” 데이트 코스의 정석을 하고 왔다고 하자 강미래는 놀라며 웃었다. “너희 데이트하고 왔네. 진석이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강솔은 그제야 진석이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시간을 내서 데려가 놀아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미래는 강
강솔은 헐떡이며 말했다. “시험 볼 때도 이렇게 심박수가 높지 않았어!”진석은 손을 들어 강솔의 옷 지퍼를 올리며 웃었다. “몇 시에 나갈지 메시지를 보냈잖아. 왜 미리 준비하지 않았어?”“메시지를 봤을 때 이미 늦었단 말이야!” 강솔이 불평하자 진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어?”“아니야, 한 번에 아침까지 잘 잤어!” 강솔은 웃으며 대답하자 진석은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자!”진석은 먼저 달리기 시작했고, 강솔은 곧 진석을 따라잡았다. “우리 경주하자!”진석은 비웃으며 말했다. “스스로 망신거리 만들지 마!”오기가 가득한 강솔은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거북이와 토끼 경주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어?”진석은 비웃으며 말했다. “넌 거북이의 속도와 토끼의 게으름을 모두 가지고 있잖아!”강솔은 진석을 잡으려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나 거북이지, 네가 더 게을러!”진석은 뒤돌아보며 비웃더니, 성큼성큼 달려 나갔다. “먼저 나를 따라잡고 나서 말해!”“두고 봐!” 강솔은 아침 안개를 헤치고 진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이웃은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진석아, 강솔아, 너희도 돌아왔구나?”강솔은 속도를 늦추며 밝게 웃었다. “지선하 이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새해 복 많이 받으렴, 작은 강솔아. 새해가 지나면 나이가 한 살 더 먹는데, 이제 진석이와 결혼식 올릴 때가 된 거 아니니?”“청첩장은 꼭 미리 보내줘야 한다, 이모가 축하하러 갈게!” 지선하가 웃으며 말하자 강솔은 당황해서 뭔가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진석이 이미 강솔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랬기에 강솔은 그저 지선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강솔은 말없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모 아직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데, 벌써 헛소리를 하시다니. 우리 둘이 언제 결혼한다고 했냐고? 소문을 퍼뜨리려면 제대로 좀 퍼뜨리지.”진석은 강솔의 손을 놓으며, 얼굴이
진석은 그녀의 발목을 놓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마사지하며 말했다. “다리가 아프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강솔이 다리가 아프다는 말은 사실 게으름을 피우려는 핑계였지만,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 약간 뻐근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진석이 마사지를 하자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 강솔은 고개를 숙여 진석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나를 혼낼까 봐.”진석은 눈을 들어 강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폭력적이야? 네가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왜 혼내겠어?”그러자 강솔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폭력적이지 않아. 다만 항상 무표정이어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당연히 추측하게 되지.”진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이 너에게 잘해주는지를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지 말고, 하는 행동을 봐야 해.”강솔은 주예형을 떠올렸다. 예형은 강솔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지만, 정작 느끼는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예형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고, 예형이 말한 미래를 느낄 수 없었기에 강솔은 항상 불안했다. 그 생각에 강솔은 슬프게 말했다. “나중에 네 여자친구는 정말 행복하겠다.”“그럼 너는?” 진석은 고개를 숙인 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평범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행복을 원하지 않아?”강솔은 가슴이 한 번 뛰었다. 진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깊이 생각할 용기도 없었다. 강솔은 빨리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안 아파.”진석은 강솔의 다리를 놓으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집에 가자.”강솔은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도 앉아. 햇빛 가리면 안 돼. 나 햇볕 좀 쬐어야 해.”진석은 강솔의 약간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넌 정말 햇볕을 많이 쬐어야겠어. 얼굴이 귀신처럼 하얗잖아!”강솔은 화가 나서 진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실연 중인 거 안 보여?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거야! 좀 더 너그럽게 대해줘!”진석은 강솔을 응시하며 말했다.
강솔의 핸드폰에 주예형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예형은 강성의 섣달그믐날 거리 사진을 찍어 보냈다.[갑자기 느낀 건데, 네가 이 도시에 없으니까 온 도시가 텅 빈 것 같아.][미안해, 강솔. 너를 잃고 나서야 너의 소중함을 깨달았어. 이제야 내가 너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있어? 꼭 행복해야 해,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나는 이 우리만의 도시에서 너를 기다릴게. 네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거야!]강솔은 핸드폰을 쥔 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오전 10시, 진석은 강솔이 성묘를 마치고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고 강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와서 만두를 빚자. 내가 동전과 설탕을 준비했어. 직접 넣어서 먹어야 의미가 있잖아!”하지만 강솔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석은 강솔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고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윤미래가 와서 허수희와 만두소를 어떻게 만들지 의논하고 있었다.“진석아!” 윤미래는 웃으며 진석에게 인사하자 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모, 강솔은 돌아왔나요?”“성묘는 일찍 끝났어!” 윤미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짐을 챙기더니 또 나가버렸어!”이에 진석은 순간 멍해졌다. “어디 갔어요?”“강성으로 남자친구를 찾으러 갔어!” 윤미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 남자친구가 몇 마디 달콤한 말을 했겠지. 명절도 안 보내고 바로 강성으로 돌아갔어.”진석은 머리 위에서 얼음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이 얼음 속에 갇힌 듯, 온몸이 얼어붙고 뼛속까지 시렸다. 진석은 극심한 고통으로 온몸이 마비되었다. 진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없어 핑계 하나 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진석의 발걸음은 마치 불길 속을 걷는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진석은 방에 들어가서 강솔의 메시지를 확인했다.[방금 안전 검사 중이라 메시지를 못 봤어.][진석아,
강성.섣달그믐날 점심, 거리는 온통 등불과 장식으로 가득 찼다. 도시의 모든 구석구석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분위기로 북적였다.주예형은 섣달그믐날에 비빔밥을 먹는 전통을 따라, 점심에 비빔밥을 만들었다. 마음이 복잡한 예형은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여전히 강솔의 답장은 없었다.강솔이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것에 마음이 아프고 실망스러워 결국 비빔밥도 먹고 싶지 않았다. 예형은 혼자서 술 한 병을 꺼내 가득 따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걸까?’‘심서진이 강성으로 와서 돌봐야 했던 거였는데, 그걸 강솔이 이해해 주지 못한 걸까?’강솔은 전에는 이해심이 많았다. 단순하고 착한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강솔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이제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예형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형은 한 잔 또 한 잔을 마셨고, 금세 술병의 반이 비어졌다.똑똑똑!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예형은 누가 찾아왔는지 의아해하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서진이 보온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사하셨어요? 제가 몇 가지 요리를 해왔어요. 드셔 보세요.”뜻밖의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예형은 놀라며 말했다. “너 집에 안 갔어?”“KTX 표를 못 구했어요. 연말에는 표 구하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서진은 보온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며, 부드럽게 예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서 설을 쇨 수밖에 없었어요. 또 선배도 남아 있어서 같이 설 쇠러 왔어요.”서진은 말하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식탁에는 이미 손도 안 댄 비빔밥과 반쯤 비어있는 술병이 있자 웃으며 말했다. “이걸 점심으로 드실 생각이었나요?”“별로 배고프지 않아서 대충 먹으려고 했어.”“오늘은 섣달그믐날인데, 대충 먹으면 안 되죠.” 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보온병에서 음식을 꺼내 식탁에 놓았다. “우리 고향 음식이에요. 아직 따뜻해요. 집에 돌아온 기분으로 먹자
두 사람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같은 고향 사람끼리 명절을 밖에서 보내는 것은 평소보다 더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금세 한 병의 술을 다 마셔버렸다. 곧이어 예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술을 더 가져올게, 잠시만 기다려.”“좋아요. 오늘은 취하지 않고는 못 돌아가겠어요!” 심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형이 옆방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서진도 따라가 문틀에 기대어 말했다. “선배, 정말 멋지네요. 옆방에 술장을 만들어 두다니, 일할 때마다 한 잔씩 하려고 그런 거죠?”예형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대충 만든 거야. 너한테 웃음거리나 됐네.”“아니에요, 정말 고급스럽게 꾸며놨어요.” 서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 예형의 술장과 책장을 둘러보며 소파에 앉았다. “여기 앉으니까 정말 편하네요. 여기서 술 마시면서 이야기 나눠요.”예형은 서진의 옆에 앉아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 주량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아니에요, 오늘은 선배랑 함께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 결국 오늘은 우리 둘만 같이 명절을 보내잖아요.” 서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예형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지?”“선배를 왜 동정해요?” 서진은 물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 강솔 언니와 아직도 화해하지 않았나요? 설마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이미 강솔에게 설명했는데도 믿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예형은 무력한 표정을 짓자 서진의 눈빛이 흔들리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선배가 나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언니가 아직도 선배를 용서하지 않는다니, 정말 지나친 것 같아요.”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 이 기회를 틈타 헤어지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예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강솔이 나에 대한 감정은 내가 믿어.”“사람 마음은 변하기 마련
예형은 계속 술을 마시며,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제 강솔과의 관계에 대해 실망했어. 계속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어.”이에 서진이 갑자기 말했다. “방이 너무 덥네요!”서진은 말하면서 겉옷을 벗었다. 안에는 검은색 레이스 속옷이었고, 넥라인이 커서 가슴 앞부분이 드러났다. 예형은 눈앞이 흐려졌고, 술기운에 취했다. 서진은 예형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선배, 인제 그만 슬퍼해요. 어쩌면 강솔 언니는 지금 진석 씨와 함께 명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라요. 선배만 혼자 슬퍼하고 있을 필요 없어요.”예형은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둘 다 경성 사람이니까, 이미 함께 있을지도 모르지.”“선배!” 서진은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 선배가 안쓰러워요. 선배처럼 멋진 사람은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해요!”“어, 어떤 선택?” 예형은 눈앞에 있는 서진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했다. 서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선배를 동경했어요. 선배가 강성에 온 걸 알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직장을 그만두고 선배를 찾아왔고요.”“선배는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가요?”예형은 숨이 막히며, 서진을 멍하니 바라봤다.서진은 예형에게 다가가 거의 몸에 기대며 애절하게 고백했다. “나는 강솔 언니보다 더 잘할 수 있어요. 선배를 챙기고, 선배의 사업을 돕고 싶어요!”서진은 남자의 손을 잡아 가슴에 대며 말했다. “선배, 우리 둘이 가장 잘 어울려요!”“강솔 언니는 선배를 배신했고 이미 다른 남자와 함께 있어요!”“그리고 선배를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 여자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해요!”예형은 술기운에 취해 숨이 가빠졌고, 서진의 향기가 코를 통해 스며들었다. 그래서 예형의 머릿속은 완전히 비어버렸다.“선배, 오늘 우리 함께 있어요!” 서진은 팔을 벌려 예형을 껴안고 가슴에 꼭 붙었다. 예형은 뒤로 밀려나며 머리를 책장에 부딪치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