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심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드디어 시언이 왜 전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데려왔는지를 깨달았다. 잠시 더 앉아 있다가, 아심은 시언과 도선욱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고 일어서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시언 씨, 두 분이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잠시 밖에 나가서 걸을게요.” 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마.” “알겠어요.”아심은 도선욱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저택을 나섰다. 저택의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아심은 정원에서 산책하지 않고 차를 몰아 마을로 향했다.그 마을은 산과 물을 끼고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주변 지역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설 첫날인 오늘,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있었다. 마을에서는 신년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거리는 매우 활기찼다.하지만 아심은 사람이 붐비는 곳을 피해,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청색 돌과 기와로 이루어진 작은 골목길에는 한 서점이 있었고, 예쁜 외투를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있었다. 이에 아심은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영업 중인가요?” 여자는 뒤돌아 아심을 바라보았다. 스물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단아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영업 중이에요, 들어오세요!” 아심은 여자를 따라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은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숨겨진 보물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들어서자마자 정교하게 조각된 병풍이 눈에 들어왔고, 병풍 앞에는 긴 책상이 놓여 있었다. 또한 그 위에는 장식들과 다양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좌우로 책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각종 서적이 분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장 앞에는 붉은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각 탁자 위에는 설을 맞이하여 아기자기한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 “편하게 앉으셔서 편하게 보세요!” 여자는 외투를 벗었고, 안에는 심플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마치 전래동화에서 볼법했고 현실로 튀어나온
도도희가 말했다. “이 마을에서는 설맞이 문화축제가 열리는데, 내가 초대받아 며칠 동안 머물 예정이야.” “문화축제라니, 어떤 행사들이 있나요? 나중에 저도 한번 구경해볼게요.” 아심이 흥미롭게 물었다. “그래, 재미있는 것들이 꽤 있을 거야.” 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 “문화제가 끝나면 나도 강성에 잠시 들를 예정이야. 시간이 맞으면 함께 갈 수 있겠네.” “그러면 정말 좋겠네요!”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고, 도도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마친 후, 그녀는 아심에게 말했다. “문화제는 내일 시작이라, 오늘은 행사 준비를 위해 가봐야 해. 내일 올 거면 연락해.” “네, 바쁘신데 먼저 가세요. 내일 연락드릴게요.” 아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도도희가 떠난 후, 아심은 계속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서도장원.시언은 도선욱과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삼촌, 잠시 쉬세요. 제 여자친구가 처음 이곳에 와서, 정원이 넓어 길을 잃을까 봐 찾으러 가보겠습니다.” 도선욱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우리 이야기 나누느라 아심 양을 소홀히 했군!” “괜찮습니다. 집이니 알아서 잘 지낼 겁니다.” 시언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밖으로 나갔다. 도선욱은 시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도서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고, 서경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언을 따라갔다.“시언 오빠!” 정원에서 서경이 시언을 부르자, 시언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니?” 서경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시언 오빠, 아심 씨와 결혼할 거예요?” “결혼식 때 청첩장 보낼게.” 시언의 대답에 서경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시언 오빠, 왜 저를 안 기다려줘요?” 석양 아래, 시언의 눈빛은 깊고, 표정 없는 얼굴은 위엄 있고 냉정해 보였다. “서경
“응, 원래는 시언을 한번 보려고 왔는데, 이제 봤고, 할 말도 다 했잖아. 너도 그런 말을 했으니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구나.” “나는 시언에게 인사할 거니까, 너는 준비해. 지금 바로 떠나자.”서경은 방금 거절당한 터라 시언을 다시 볼 얼굴이 없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짐을 정리하러 갔다....해가 거의 질 무렵, 아심은 새로 산 두 권의 책을 들고 서점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시언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정원에 없던데, 차를 몰고 나갔어?] 아심은 걸으면서 웃으며 말했다. “네, 마을에 좀 구경하러 나왔어요.” [아직 마을에 있어?] “곧 돌아갈 거예요.” 그러자 시언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을은 재미있어?] 아심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꽤 활기차더라고요!” [그럼, 잠깐 기다려. 내가 널 찾으러 갈게.] 아심은 잠시 멈칫하며 물었다. “나를 찾으러 온다고요? 저녁에 손님과 함께 식사하는 거 아니었어요?” [도선욱 삼촌은 이미 떠나셨어.]시언의 말에 아심은 더욱 놀랐다. 도씨 집안 사람들이 시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설날에 맞춰 왔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서경이 시언을 좋아하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쉽게 떠나버린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웠다. 이때 시언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완승했어.] 아심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보답할 거예요?” [이따가 저녁 사줄게.] 아심은 휴대전화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며, 봄바람이 부는 듯한 상쾌한 기분으로 미소를 지었다. “단지 저녁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이에 남자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그 말에 아심의 가슴은 순간적으로 부드러워졌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게 말했다. “앞에 커피숍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서 기다릴게요.” [좋아!]...마을
도경수는 서둘러 전화를 다시 받았다. [도희야, 언제 돌아올 거니?] “며칠 후에요.” [좋아, 우리 집에서 기다릴게!] “네, 그럼 끊을게요!” 도도희는 전화를 끊고, 아까 들었던 재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약간 찡그렸다. 그녀는 이전에 전화로 먼저 유전자 검사를 받게 하자고 했지만, 도경수는 이번에는 집에 돌아와 직접 검사하기를 고집했다.도도희는 도경수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이 움직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 문화제의 초대를 받아들여, 돌아와 보게 된 것이었다.도도희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받자 비서는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님, 전시회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돌아오실 수 있나요?] 도도희는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전시관에 전시된 한 명화가 가짜라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도도희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오늘 밤 바로 돌아갈게요. 먼저 상황을 잘 수습해 줘요.” [알겠습니다.]도도희는 전화를 끊고, 자기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 표를 예약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문화제 책임자에게도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일정에 변동이 생겨 돌아가야 한다고 알렸다.문화제 책임자는 도도희의 급한 목소리를 듣고는 말없이 그녀의 출국 준비를 도왔다. 출발하기 전에, 아심에게 급한 일이 생겨 내일 문화제에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시언은 곧 차를 몰고 도착했고, 두 사람은 커피숍을 나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심이 도도희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아심은 단팥죽을 먹고 있었다.갑자기 떠나게 되어 약간 아쉬운 마음에 아심은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어요, 안전하게 가세요. 돌아오면 다시 약속 잡아요.”아심의 말에 시언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친구야?” 아심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오랜 친구예요. 만난 적은
장시원과 조백림 일행은 오후에 차례로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 우청아와 요요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강재석은 그들의 방문을 미리 알고 요요를 위해 특별히 설 선물을 준비했다. 성연희는 말할 것도 없이, 강씨 저택에 오는 것이 마치 자기 집에 오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처음으로 이곳에 왔고, 강씨 저택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하지만 실제로 와서 본 후에도 여전히 강씨 가문의 백 년 부귀영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 거실에 앉아 강재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전해 들었던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하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인자하고 친절한 모습이라 감탄했다. 강재석은 요요를 데리고 가서 그의 물고기들을 보여주었다. 요요는 강재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동물원에 어떤 동물이 있는지 귀엽게 설명했다. 또한 강재석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보자고 했다. 강재석은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그럼 너의 동물원에 물고기도 있니?” 요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없어요.” 강재석은 즉시 사람을 불러 연못에서 붉은 아로와나 두 마리를 잡아 요요에게 선물했다. 강성으로 돌아간 후, 장씨 집안은 이 두 마리 아로와나를 위해 정원에 연못을 새로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때 요요는 작은 어항에 담긴 두 마리 붉은 아로와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서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연희는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소희를 찾았다. “아심은 어디 갔어? 여기 놔뒀는데, 왜 안 보여?” 소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심을 잃어버렸겠어?” “어디 갔는데?” “오빠랑 같이 어른을 뵈러 갔어. 내일이면 볼 수 있을 거야.” “같이 어른을 뵈러 갔다고? 뭔가 있는 거 아냐?” 연희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 있지, 네 주선자 선물도 곧 받을 수 있을 거야!” “완벽해!” 연희는 손가락을 튕기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취감이
“오해를 살 일은 피하는 게 좋잖아.” 이에 백림은 농담처럼 말했다. “같은 집에 머무는데, 사람들이 우리 사이가 깨끗하다고 믿을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깨끗한 사람은 스스로 깨끗하니까!” 유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백림 씨? 잠시 나가줄래?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백림은 몸을 바로 세우고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으면 30분 정도 쉴 수 있을 거야. 구택 형이 저녁에 식사하자고 했거든. 아래층에서 기다릴게.” “알겠어. 고마워!”유정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제시간에 내려갈게.” 백림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백림의 별장과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 시원과 청아가 머무는 장소였다. 요요는 새로운 곳에 와서 신이 나서 계속 계단을 오르내리며 뛰어다녔다. 관리자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주방에 특별히 아이용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시원은 요요에게 야채 달걀말이를 먹이면서, 짐을 정리하는 청아를 바라보았다. “여기 사람들 도와줄 거야. 요요의 짐은 내가 저녁에 챙길게. 너 좀 쉬어. 내가 요요 데리고 나가서 좀 놀게 할게.” 요요는 분명히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라서 누군가가 계속 봐줘야 했다. 시원이 있으면 요요를 하인에게 맡기지 않고 항상 직접 돌봤다. “여기 경치도 좋고 공기도 정말 좋아!” 청아는 발코니에 서서 멀리 풍경을 보며 말했다. 그러다가 뒤돌아 시원에게 웃으며 말했다. “운해거리의 청원을 조금 닮았어.” 청원을 언급하자 시원은 청원의 모델에 따라 지은 레고 별장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청원이 좋아?” 지금까지 시원은 청아에게 그 별장의 존재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그건 특별한 깜짝선물이 될 것이다. “좋아하지. 나는 그때 청원의 명성이 대단해서 그 근처의 디저트 가게에서 일했으니까.”“들어가지는 못해도, 멀리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청아가 말할
이에 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됐어, 조금 높아 보이니까.”“내가 있는데 뭘 걱정해!”시원은 요요에게 혼자 놀게 하고, 청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올라가니 작은 옥상이 있었는데, 지면에서 약 7미터에서 8미터 높이였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요요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청아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엄마, 조심해!” 요요는 두 손을 입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청아가 왼쪽을 보니, 옆집 마당에 있는 미연이 자기를 보고 놀란 듯했다. 청아는 살짝 당황하여 몸을 돌려 미끄럼틀로 들어갔고, 시원이 그녀의 뒤에 앉아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준비됐어?”“당신, 혹시 당신이 타고 싶어서 나를 핑계 삼는 거 아니야?” 청아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시원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톡 쳤다.“이렇게 유치한 것, 너와 함께하지 않으면 내가 관심 있을 것 같아?”“하!” 청아는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나를 부추겼어?”청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원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빠르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청아는 본능적으로 시원의 팔을 꽉 잡았다.빠르게 미끄러지는 느낌은 꽤 짜릿했지만, 청아는 어릴 적의 즐거움을 느낄 새도 없이 두 사람은 갑자기 한 구부러진 부분에서 멈춰버렸다. 이에 청아는 어리둥절하게 말했다.“막혔나?”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미끄럼틀은 반투명 상태로 희미한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하지만,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두 사람이 어디에 걸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시원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몸을 숙여 청아의 턱을 잡고 깊이 키스했다.청아는 숨이 가빠졌지만, 좁은 공간에서 피할 수 없어 그저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청아가 멈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자, 오래 있으면 요요가 우리를 못 찾아서 걱정할 거야.”시원은 목소리에 웃음을 담으며 물었다.“재미있어?”“유치해!” 청아
소희는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웃었다.“그때 우리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잖아, 몇 가지는 말할 수 없었지. 당신이 나를 탓할 수는 없어!”구택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말했더라면?”소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내가 말했더라면, 당신은 그때부터 나를 경계했을 거야.”구택은 조용히 소희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그때 내가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소희는 그때 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당신이 나 때문에 도운박 씨랑 싸웠지?”그날 구택이 돌아왔을 때 술 자국이 묻어 있었고, 다음 날 운박은 병을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분명 몸싸움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나중에 소희는 마은설의 말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았다.“그래.” 구택은 깊은 눈빛으로 어두운 저녁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걔가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했어. 그때 나는 죽여버리고 싶었고!”아마도 그때부터 구택은 다른 사람이 소희를 조금이라도 상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두 사람은 처음에 약속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관계를 끝낼 수 있다고. 그러나 운박이 단지 언급했을 뿐인데도, 견딜 수 없었다.“머크 사건, 내가 너를 이용했다고 의심한 적 있어?”소희는 고요한 눈빛으로 말했다.“없어. 은설이 경고했지만, 나는 당신을 믿었어.”“왜?” 구택은 소희를 응시하며 묻자 그녀는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당신이 그때 나를 사랑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전에 나는 이미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그 말에 구택은 가슴이 따뜻해지며, 소희를 꼭 안았다.“고마워, 소희야!”소희는 구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소희가 먼저 그의 곁으로 와 준 것이!멀리 잔디밭에서는 하인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미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소희는 일어나며 말했다.“우리도 가자. 어쨌든 당신도 주인인데, 늦으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