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아심은 퇴원했다. 승현은 아심을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미리 청소부를 불러 방을 깨끗이 정리해 두었다. 그는 가져온 꽃을 화병에 꽂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일단 샤워 좀 하고 와. 좀 더 가볍게 하고 나가서 저녁 먹자. 퇴원을 축하하는 의미로.”아심은 가볍게 웃었다.“퇴원도 축하할 일이야?”“퇴원뿐만 아니라 우리 관계도 이제 시작이잖아. 두 배로 기쁜 날이지!” 승현은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자,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잠시 기다려줘.”“알겠어.” 승현은 훈훈한 미소로 대답했다.아심이 주방으로 향하자, 승현은 거실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가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로 나갔다. 거기서 아심의 책상이 보였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놓여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책을 들어 몇 장 넘겨보았다.두 사람이 이제 연인 관계가 되었으니, 승현은 아심의 삶, 취향, 생각을 더 깊이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아심의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몇 장 더 읽자, 아심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준비됐어, 이제 나가자.”승현은 책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아심은 연한 파란색 면 셔츠를 입고 있었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 반쯤 마른 머리를 묶었다. 무심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매력적이었다.승현이 아심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자, 아심은 자신의 옷차림에 무언가 문제가 있나 싶어 물었다.“왜 그래? 뭔가 이상해?”“내 여자친구가 너무 예뻐서 잠깐 멍했어.” 승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심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의 변화된 관계에 어색함을 느꼈다.“가자, 저녁 먹으러.”아심이 먼저 나서자, 승현이 뒤따랐다. 차에 타고, 승현이 물었다.“뭐 먹고 싶어?”아심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며칠 동안 병원에서 너무 밋밋한 음식만 먹었더니 지금은 뭐든 맛있어 보여.”“며칠은 여전히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해. 조금 더 순한 걸로 먹자.” 승현은 아심에게 주의 사항을 상기시키자, 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
음식은 굉장했고 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승현은 사실 매우 말이 많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잘 살피는 사람이라서 어색하거나 침묵이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가 줄곧 화기애애했다.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승현은 차를 가지러 갔고, 강아심은 레스토랑 밖에서 기다렸다.“아심!”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심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뒤를 돌아봤으나, 살짝 굳은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성연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옆에는 소희도 있었다.소희는 여전히 섬세하고 차가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투명하고 고요했다. 차분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소희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아심아.”“소희!” 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결혼한다면서, 축하해!”“고마워.” 소희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그때 꼭 와줬으면 해.”“꼭 갈게.” 아심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심아!”승현이 차에서 내려 친근하고 부드럽게 아시믕ㄹ 불렀다. 다가오면서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고, 소희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친구들이야?”그러자 아심이 고개를 끄덕였다.“소희, 성연희.”“연희 씨, 전에 본 적 있었죠.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승현은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희는 승현이 아심에게 외투를 걸쳐주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깨달았다. 이전에 연희가 소희에게 말한 적이 있었고, 소희는 아심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지금 직접 보니, 여전히 가슴이 조였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마치 얼음과 눈으로 가득 찬 듯했다.특히 명절에 함께 집에서 복조리를 달며, 설날 음식과 불꽃놀이를 즐기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에 가시가 걸린 듯 답답했다.연희 역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승현의 따뜻한
소희는 스스로 마음이 강하다고 자부했었다. 과거에 구택을 찾는다는 신념에 의지해 다시 삶의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심은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웃어줄 수 있었을까?아심은 자신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심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왜 오빠를 포기했는지, 왜 지승현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말이다.오빠는 소희의 삶 그 자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희망 없는 기다림은 그녀의 생명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예를 들어, 지난번 오빠가 떠났을 때 소희는 거의 생존 의지를 잃을 뻔했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만 겪어야 할 일이지, 두 번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희는 지금 아심이 내린 결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네 말을 들으니, 나도 이해가 돼.” 연희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난 여전히 아심을 친구로 대할 거야. 앞으로 다시 만나더라도, 승현 씨에게는 불편하게 대하지 않을게.”“그래.”그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희가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연희가 비웃으며 말했다.“집에 30분 뒤에 도착한다고 전했으면서, 왜 또 전화해?”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자기야.”[아직 집에 안 왔어?] 구택이 불만스럽게 물었다.[연희 씨는 또 어디로 데려간 거야?]“아니야,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소희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길이 조금 막혀서, 곧 도착할 거야.”구택은 그제야 어조를 풀며 말했다.[먼저 씻고 있을 테니, 빨리 와.]소희는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 연희가 비웃었다.“내가 널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우리 먼저 안 건 나였는데, 지금은 둘이 약속을 잡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네?”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희야, 너무 신경 쓰지 마.”연희가 툴툴거렸다.“그럼 대답해 봐. 넌 나를 더 사랑해? 아니면 임구택을 더 사랑해?”소희는 잠시 멈추었다가 차창 밖의 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달이 참 둥
아심은 죽은 걸까? 그렇지만 만약 아심이 죽었다면, 왜 아직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것이 아심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 세계에 남아, 점점 굳어가는 아심의 육체를 지키고 떠나지 않으려 하며, 그를 계속 추적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아심은 꿈속에서 깨어나 몸서리를 쳤다. 머릿속에 맴도는 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심은 눈을 뜨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스스로를 웅크려 몸의 온도를 느껴보았다.왜일까,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도 점점 더 절망하게 되는 건....다음 날 아침, 아심은 무척 바쁘게 보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승현이 찾아왔다.그는 많은 꽃을 들고 왔고, 회사의 거의 모든 여직원에게 꽃과 디저트, 사탕 등을 나눠주었다. 여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모두 준비한 셈이었다. 회사 안은 환호성과 놀라움이 끊이지 않았다.승현은 가장 특별한 꽃다발을 들고 아심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매너 있게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사귄 지 일주일째,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의 행복을 기원해.”아심은 의자에 기대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계속 이러면, 우리 회사에 오지 못하게 할 거야.”그러자 승현은 억울한 듯 웃으며 물었다.“왜? 내가 올 때마다 회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아심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우선 밥 먹으러 가자.”두 사람은 회사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사 직원들도 몇 명 와서 승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에 아심은 웃으며 말했다.“이러다간 네가 우리 회사를 인수하겠어.”승현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난 네 회사를 원하지 않아. 다만 모든 사람의 호감을 네 한 사람의 호감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야.”아심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물었다.“만약 네가 모든 걸 쏟아붓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겠어?”“당연히 그럴 리 없지!” 승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우린 이미 사귀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아심은 다시
4월 초, 임씨 집안에서 강씨 집안에 혼수품을 보내기 위해 운성으로 향했다. 강재석은 사람들을 시켜 서원의 객실을 정리하고, 임씨 집안의 혼수품을 보관하도록 준비했다.임시호와 노정순은 직접 강씨 집안으로 향했고, 임지언과 우정숙도 시간을 미리 조정해 함께 왔다. 임구택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혼식에 관한 모든 일을 그가 직접 챙기고 있었다.임씨 집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운성의 언론은 총출동했고, 심지어 언론사에서도 사람들이 강씨 집안에 모였다. 강재석은 이번에는 조용히 있지 않고, 보안 업무만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떠들썩한 하루였고, 운성 전체가 임씨 집안과 강씨 집안의 결혼식을 이야기했다. 앞마당은 매우 북적거렸고, 소희는 뒷마당에서 반려동물인 하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구택이 다가와 솔방울을 주워 껍질을 벗겨 소희에게 건네며 물었다.“힘들어?”“아니.”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시 쉬러 왔어. 아까 어머님한테 말했어.”“말하지 않아도 네 마음을 잘 알아.” 구택은 뒤에서 소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요즘은 조금 시끄러울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소희는 구택의 부드러운 말투에 마음이 느긋해졌다.“대부분 당신이 다 막아주잖아, 알아. 괜찮아, 나도 그렇게 성급한 편은 아니야.”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만약 조금 전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소희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소희가 뒤돌아 물었다.“오빠는 돌아올 수 있을까?”“작은 문제가 좀 있어.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는데, 어떻게 형님이 결혼식에 없을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마, 꼭 돌아올 거야.”소희는 맑은 눈빛을 살짝 감았다.“사실 지금은 오히려 오빠가 돌아오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예전에는 기대했지만, 지금은 아심과 승현이 사귀고 있기에, 강시언이 돌아와서 실망하거나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시언은 아심을 좋아한다는 것
진언은 직접 흥천으로 가서 H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일로 모든 갈등이 완전히 일단락되었고, 백협은 향후 50년간 국제 용병계에서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진언이 흥천에서 돌아왔을 때는 백협에 아침이 막 밝아올 무렵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자신을 맞이하러 온 시경에게 물었다.“준비됐나?”시경은 답했다.“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한숨도 못 주무셨는데, 잠시라도 쉬었다가 가시는 게 어떱니까?”진언은 외투를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시야가 오후에 올 거야. 그가 왜 오는지 모를 줄 알아?”시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언님이 이렇게 서두르는 건 시야가 일을 벌일까 봐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C국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진언은 총을 챙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 시경을 바라보자, 시경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진언은 다시 옷을 입으며 태연히 말했다.“네 말이 맞아. 사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시경은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난 간다. 시야가 오면 당장 쫓아내.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진언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하지만 별일 없으면 괜히 날 부르지 마.”시경도 그를 따라나서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설령 그들이 일부러 일을 만들더라도, 진언이 가 있는 곳에서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방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며칠 전 진언이 돌아왔을 때 보였던 그 폭발하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어쨌든 30대 중반의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진언은 뭔가 느낌이 온 듯 갑자기 멈춰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시경을 쳐다보았다. 이에 시경은 즉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행운을 빕니다.”진언은 살짝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운성헬리콥터가 개인
시언은 강재석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결혼도 못 하고, 아이도 못 낳겠어요.”“소희도 결혼할 텐데, 오빠라는 사람이 그렇게 뒤처져도 되겠어?” 강재석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지금까지 널 재촉하지 않았더니, 정말로 내가 좋은 성격인 줄 아나 보군.”시언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바로 소희가 결혼하기 때문에, 저는 더 서두를 필요가 없죠.”“소희를 핑계 삼지 마라. 돌아온 이상, 이제는 나를 좀 편하게 해 줘야지.” 강재석이 말했다. 시언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어조는 진지했다.“할아버지, 지난 세월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강재석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생이라는 말을 하냐? 너와 소희만 잘 지내준다면, 앞으로 10년이라도 더 기꺼이 고생할 수 있어.”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식사는 거의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시언을 보며 말했다.“뭘 또 따라오냐? 할 일 있으면 얼른 가서 해라!”시언은 대답했다.“방금 돌아왔으니, 어디 안 갑니다. 오후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게요.”“내가 늙은이가 무슨 같이 있을 가치가 있다고, 빨리 가서 할 일을 해라. 설날에 갑자기 사라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서 정리할 것도 안 하고 있잖아.”강재석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내가 너랑 같이 있는 것보다, 날 화나게 하지 않는 게 더 나아.”시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녀올게요.”“빨리 가, 소희 결혼식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강재석은 덧붙였다.“그리고 도경수네 집에는 머물지 마라. 불편할 테니.”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집은 이미 준비해 두었어요.”“잘했어!” 강재석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서, 가능하다면 소희 결혼 전에 그 사람도 함께 데리고 와라. 그 아가씨를 한번 보고 싶구나.”“그럴게요.” 시언이 말했다...
강시언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서 거센 바람이 일었다가, 순식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변했다. 마치 믿기 힘든 광경을 보는 듯했다.이에 시언은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오랜만이네요.”강아심의 차가운 손은 지승현의 따뜻한 손바닥 덕분에 약간의 온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시언을 바라보며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언제 돌아온 거예요? 소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온 거예요?”저녁노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고, 시언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그의 깊은 눈 속에서 빛은 하나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승현이 입을 열었다.“미리 예약해 둔 식당이 있어요. 아심과 함께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미스터 강도 함께 하시겠어요?”“아니, 괜찮아요.”시언의 차가운 눈빛은 더욱 싸늘하고 거리를 두었다.“이곳을 지나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려고 했어요. 다른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을게요.”시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뒤돌아 떠났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 위로 어둑한 금빛이 떨어졌다. 석양은 시언의 높고 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고, 어쩐지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시언은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인파 속을 지나 멀어져 갔다.멀리서 보면, 시언의 기세는 여전히 매섭고, 어둑한 저녁 속의 그림자조차 차가웠다. 조금 전 느꼈던 그 쓸쓸함이 단순한 착각처럼 느껴졌다. 아심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크게 뜬 채 저무는 해가 지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심의 얼굴은 마치 하늘가의 노을이 사라진 뒤의 회색빛 하늘처럼 안 좋았고, 몸은 긴장해서 굳어 있었다. 아심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승현은 조용히 아심의 곁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만나고 싶다면, 내가 물러나도 상관없어. 너만 행복하면 돼.”그러나 아심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승현의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