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심은 강시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뭔가 잊은 것 같아요.”시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뭘?”“목욕이요. 저를 씻겨준다더니 까먹으셨잖아요.”아심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씻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시언은 방금 샤워를 마친 상태였다. 짙은 파란색 가운을 걸친 그는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물기가 도는 차가운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아심을 조용히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시언 앞에서 아심의 눈동자는 더욱 흐릿해지고, 붉게 물든 눈꼬리는 그녀를 한층 더 요염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게 했다.아심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언의 허리를 가볍게 안은 후, 머리를 그의 가슴에 묻으며 요염하게 몸을 비볐다.시언은 결국 아심을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욕실로 데려갔다.아심은 그의 목을 가볍게 감싸 안고, 바로 시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시언은 목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짧게 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말했다.“내일 사람들 만날 일이 있어.”이에 아심은 고개를 들어 시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심의 검은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듯했고, 붉게 물든 눈가가 은근히 불만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아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얼마나 억울하고 불만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이에 시언은 작게 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아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어차피 내일 하루종일 목덜미가 붉다고 해도, 그 누구도 감히 시언에게 물어보진 않을 것이었다.욕실 안, 뜨거운 물줄기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며 두 사람의 실루엣을 휘감았다. 시언은 아심을 벽에 밀착시키며 키스했다. 시언의 몸에서 내뿜는 열기는 마치 불꽃처럼 그녀를 점점 뜨겁게 만들었다.검은 드레스는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고, 그녀의 흰 피부가 드러났다. 아심은 손을 뻗어 시언이 입은 가운의 허리띠를 풀려 했으나, 시언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시
소희는 갑작스레 다른 질문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며 물었다.“몇 시야?”표정만큼은 진지했지만, 의도가 다분히 명확했다. 이에 임구택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여덟 시.”소희는 그의 어깨를 밀며 서둘렀다.“일어나야 해. 아침에 부모님께 인사드려야 하잖아.”구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기억하고 있는 거 보니 대단한데?”소희가 재차 물었다.“지금 늦진 않았겠지?”“아직 괜찮아. 방금 부모님께 전화드렸어. 아홉 시에 가기로 했고, 인사 올리고 나서 다 같이 아침 먹으려고.”구택은 시계를 확인하며 덧붙였다.“그러니 네가 30분은 더 잘 수 있어.”소희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진짜? 더 자도 돼?”구택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이불을 들춰내며 말했다.“같이 자자.”그 말을 듣자마자 소희는 벌떡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와인색 실크 잠옷 차림으로 욕실로 뛰어 들어가며 말했다.“같이 자긴!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뒤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방울 소리와 구택의 낮고 깊은 웃음소리가 아침 햇살 속에서 흩어졌다.차에 올라탄 후,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오늘 일정은 간단해. 오전엔 부모님 댁에서 인사 올리고, 손님들을 배웅할 거야.”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오후엔 우리 가족이 강씨 별장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남아서 내일 아침에 네 본가로 돌아가자.”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알겠어. 다 당신 계획대로 할게.”...강아심은 눈을 뜨자 햇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머리가 약간 멍하고 어지러웠지만, 곁에 있는 팔이 아심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팔의 주인을 확인했다.곁에 누운 남자는 탄탄한 가슴을 아심의 등 뒤로 밀착시켜 끌어안고 있었고, 그의 손은 뻔뻔하게 그녀의 심장 가까이에 올려져 있었다.아심은 잠시 숨을 죽이며 상황을 정리했다.‘강제로였나, 아니면 자발적이었나?’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발적이었다.‘그렇다면 수동적이었나, 아니면 적극적이었나?’이 방 분
[그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 누가 있었던 건 기억 안 나?]강아심은 잠시 멈췄다. 답장을 보냈다.[누구요?]강시언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기억하기 싫은 거야?]한동안 조용하더니, 강아심은 마지못해 답장을 보냈다.[인정할게요.]시언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찾으러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담배를 찾기도 전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시선이 멈췄다.아심이 보낸 메시지는 다름 아닌 200만 원 송금 내역이었다. 그리고 전송된 금액의 메모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양이 장난감 비용.]...정말 이렇게 비싼 고양이 장난감이라니! 아심은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대략 10여 분 후, 또다시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그녀는 이번엔 시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메시지를 보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메시지 내용은 뜻밖이었다.[아침 꼭 챙겨 먹어.]메시지를 보낼 당시 시언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심은 살짝 웃으며 길가에 식사할 만한 장소를 찾아 차를 세웠다.한창 창가에 앉아 따뜻한 국물을 마시던 그녀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움을 느꼈다.적당한 거리, 적당한 관계.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필요한 만큼만 서로에게 남겨두는 여백.아심은 이런 식의 관계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시언이 떠나든 돌아오든 묻지 않고, 자신이 어디를 가든 어떤 선택을 하든 설명하지 않는 자유로움.만약 어느 날 그녀가 지치고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시언의 삶에서 사라질 것이다.물론 어젯밤은 그저 우연이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아심도 알고 있었다. 육체적 친밀함은 때로는 위험한 중독이 될 수 있으니까.강씨 별장아침 식사가 끝난 후, 소희는 강재석을 만나러 갔다. 시언은 이미 차를 준비해 강재석을 집으로 모시러 왔다.구택 역시 차를 준비해 도경수와 양재아를 공항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을 포함해 장시원 일행도 모두 오전 중으로 떠났다. 성연희를 배웅할 때, 그녀는 소희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결혼식은 최소 3일은 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 같아. 하루로는 전혀 부족해!”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뒤에 청아의 결혼식, 유정의 결혼식이 있으니까 그때 마음껏 즐기면 돼.”연희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언제 별장으로 돌아가? 아니면 바로 신혼여행 떠나는 거야?”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돌아가게 되면 미리 연락할게.”“알았어! 연락 기다릴게. 몰래 떠나면 안 돼! 매일 나한테 영상 통화도 하고 사진도 보내야 해!”연희는 다시 한번 소희를 꼭 끌어안고 차에 올라탔다. 소희가 마지막으로 배웅한 사람은 소시연 가족이었다.하순희는 소희를 바라보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 우리 집안 아이들 결혼식 중에서 첫 번째로 참석하게 될 결혼식이 네 결혼식이라니.”“어제 결혼식 보면서 나도 몇 번이나 울었잖니.”하순희가 말하면서 다시 눈물을 글썽이자, 옆에 있던 소정수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참 신기한 사람이야. 평소엔 그렇게 속 편한 사람처럼 보이더니, 소희 결혼식에 그렇게 감정이 풍부할 줄이야!”소시연이 아빠 팔짱을 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아빠가 모르는 거죠. 우리 엄마는 원래 감상적인 사람이에요!”하순희는 웃음을 터트리며 눈가를 닦았다.“소희랑 얘기 좀 하려고 했는데, 너희들 때문에 집중이 안 되네!”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이야기하세요. 저 듣고 있어요.”하순희는 소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내 마음이 참 복잡했어.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는데, 결국 네가 행복한 게 제일 기쁘더라. 정말로 네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행복했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요. 저도 두분에게 정말 감사해요.”하순희는 가방에서 열쇠 한 개를 꺼내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아줘. 이건 내가 너한테 집을 준다는 뜻이
임유진은 사기가 한껏 올라 외쳤다.“힘낼게, 화이팅!”유진은 말할수록 더 신이 났다.“소희, 너는 우리 집의 복덩이야! 네가 나타나자마자 우리 삼촌의 결혼 문제가 해결되고, 나한테 이렇게 좋은 남자친구까지 데려다줬잖아. 정말 네가 너무 좋아!”소희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무력하게 웃었다.“내가 보기엔 네가 서인을 좋아하는 게 거의 광적인 수준인데?”“사장님이 나를 좋아한다면, 광기에 사로잡힌다 해도 난 상관없어!”유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유민, 빨리 가자. 소희에게 그렇게 매달리지 마!”우정숙이 뒤돌아보며 말했다.“가요!”유진은 대답하며 작게 중얼거렸다.“좀 붙어 있으면 어때? 어차피 우리가 가고 나면 소희는 삼촌 것이 되는데!”유진은 혼잣말하며 우정숙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결국 마지막에는 소희와 임구택 둘만 남게 되었다. 넓은 장원 안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껴안고, 상대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 심장은 모두 서로를 위해 뛰고 있었다.오후 내내 두 사람은 마치 처음으로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걸어 다닐 때마다 서로에게 의지했고, 낮잠을 함께 자고, 눈을 뜬 후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안고 키스를 나눴다. 발코니 소파에 앉아 함께 해질녘을 감상하기도 했다.저녁이 가까워지자 구택은 직접 요리를 했고, 소희는 옆에서 예쁜 접시와 그릇을 준비했다. 둘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촛불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소희의 놀란 눈길 속에서 설희와 데이비드가 함께 달려왔다.그날 밤, 소희는 거의 밤새도록 종소리를 들었다. 맑고 아름다운 소리, 때로는 급박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울리며 그녀를 감싸주었다.그 소리는 소희로 하여금 잠들게 했고, 꿈속에서도 유유히 울리는 즐거운 종소리가 가득했다. 예전에 그녀를 짓누르던 어두운 그림자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다음 날소희는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구택은 직접 차를 몰아 소희를 강씨 집안으로
강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 오석이 이미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집사님!”소희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갔다.“저 돌아왔어요!”“그래, 잘 왔구나!”오석은 웃음을 가득 머금고 소희를 바라보며, 반가움과 기쁨으로 눈이 빛났다. 곧이어 임구택이 다가와 오석에게 인사를 건네고, 소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강재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소희가 왔는지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마당에 나온 그는 소희의 모습을 보고 먼저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식사 시간, 가족들은 다시 양재아와 도도희의 친자 확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강시언이 말했다.“오늘 아침 도도희 이모에게 전화가 왔어요. 내일이면 강성으로 돌아온다고 하네요.”소희는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도도희가 재아를 만나고 나서, 친자 확인에 훨씬 신경을 쓰는 듯 보였다.마치 서둘러 재아와 관계를 끊으려는 듯했다. 이런 점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꽤 깊은 것 같았다.“그렇구나.” 강재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도 내일 함께 가보자꾸나. 도씨 집안의 큰일인데, 우리가 빠질 수는 없지.”시언도 결과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그럼 내일은 저와 소희, 구택이도 함께 강성으로 가죠.”“좋아.”강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그렇게 일단 내일의 일정은 정해졌다.식사가 끝난 후, 예전처럼 구택과 시언은 이야기를 나누고, 소희는 강재석과 함께 연못가에 앉아 낚시하며 장기를 두었다.햇볕을 쬐자 소희는 졸음이 밀려왔고, 의자에 몸을 웅크린 채 반쯤 감은 눈으로 강재석과 장기를 두었다. 그랬기에 결과는 당연히 참혹한 패배였다.“할아버지!”소희는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나른하게 말했다.“오늘 밤에 저 여기서 자도 돼요?”“당연히 자고 가도 되지! 지켜야 할 전통은 남기고, 버려야 할 전통은 없어져야 하는 거야.”강재석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밤엔 황선국 셰프가 내가 잡은 생선을 요리해 줄 거야!”“그럼 저도 같이 낚시할래요!”소
임구택은 소희를 한 번 흘겨보더니 강재석에게 말했다.“저런 모습인데, 저도 서두를 수가 없네요.”구택의 말투는 어쩔 수 없다는 듯했지만, 가득 담긴 애정이 느껴졌기에. 강재석은 기분 좋게 크게 웃었다.그날 밤소희와 구택이 있는 정원은 여전히 축제용 등불이 걸려 있었고, 하양이는 새하얀 깃털이 오색 빛으로 변해 있었다.소희는 호두를 들고 하양이를 먹이며 말하자, 하양이는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축하해, 소희! 소희, 아들 많이 낳아!”그 말에 소희는 깜짝 놀라 구택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가 이걸 가르쳤지?”이에 구택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 등불 아래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는 더욱 아름답고 선명해 보였다.“굳이 가르칠 필요 없지. 자꾸 듣다 보면 자연히 배우는 거야.”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하양이에게 계속 먹이를 주며 담담히 말했다.“덕담이니, 기꺼이 받지.”소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새가 한 말을 진짜로 믿는 거예요?”구택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길고 깊은 눈빛을 던졌다.“이미 생겼을지도 모르지.”소희는 몸을 돌리며 진지하고 살짝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데?”“괜찮아.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하더라.”구택은 긴 손가락으로 소희의 눈썹을 쓸어내리며 소희의 분홍빛 입술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이잇!”하양이는 두 날개로 눈을 가렸다. 구택은 소희의 이마에 이마를 대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 녀석이 못 보게 하자.”소희의 검은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고, 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구택은 그녀를 안아 방으로 향했다....다음 날 아침, 강성정아현은 아침에 볼일을 보러 나갔는데, 마침 택시 잡기 힘든 시간대였다. 강아심은 아현에게 자신의 차를 사용하라고 했다. 이에 주차장에 도착한 아현은 멍해졌다.아심의 차 타이어 네 개가 모두 바람이 빠져 있었다. 아현은 확인한 뒤, 누군가 일부러 바람을
그러나 지승현은 냉랭하게 말했다.“아부하고 싶으면 직접 하세요. 나를 끌어들이지 말고요! 그리고 당장 사람을 불러 강아심의 차를 고치게 하세요.”“안 그러면 아심에게 신고하라고 할 거예요. 남의 재산을 훼손하는 건 엄연한 범죄예요. 지수철 감옥에 가게 하고 싶으면 그냥 놔두세요.”전화를 끝낸 승현은 바로 끊었다.권수영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집어던질 뻔했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고 생각한 끝에 결국 사람을 불러 아심의 차를 고치게 했다.승현도 직접 아심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동안 조심하고 운전할 때 주변 상황을 잘 살피라고 당부했다. 이에 아심은 알겠다며 자신이 신경 쓰겠다고 답했다....소희와 강시언 일행이 도씨 집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그러나 도도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도경수는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직접 전화를 걸지는 못하고 강재석을 재촉했다.“도도희에게 다시 전화해서 어디쯤인지 물어봐!”그러나 강재석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침에 학생 몇 명 일을 봐주고, 이제 막 비행기를 탔다고 했잖아. 방금도 전화기가 꺼져 있던데, 오늘 안으로는 반드시 도착할 거야. 뭘 그리 급해 해?”그 말에 도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도착만 하면 됐어.”그러고는 다시 도우미를 불러 물었다.“방은 다 정리됐나?”도우미를 급히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평소에도 사흘에 한 번씩 정리하는데, 오늘 아침에는 대청소까지 끝냈어요.”도경수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듯했다. 곧 양재아는 차를 들고 도경수에게 내밀며 웃었다.“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엄마가 돌아오시면 떠나고 싶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방에 장미꽃도 조금 꺾어놨어요.”도경수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너희 모녀가 함께 지낼 시간이 많아질 거다. 감정도 서서히 쌓일 테니, 네 장점도 점점 알게 될 거야.”재아는 얌전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을 다 먹고 난 후, 재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