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장시원은 콜드스프링 건축회사를 인수했고, 이를 우청아와의 약혼 선물로 줬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넘어가자....퇴근 후, 우강남은 집으로 돌아왔다. 부엌에서는 허홍연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고,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소연은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을 터였다.강남은 허홍연에게 인사를 건넨 후, 조용히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휴대폰을 꺼내 우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청아야, 요즘 잘 지내?”청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오빠, 무슨 일이야?]강남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방금 보너스를 받았어. 천만 원 정도인데, 네 계좌로 보낼게.”“일단 거절하지 말고 들어봐. 아버지 요양원 비용이 매달 꽤 많이 들잖아. 너도 매번 장시원 사장님한테 손 벌릴 수는 없잖아.”“아버지는 우리 둘 다 책임져야 하는 분이야. 나도 내 몫을 해야지.”그러나 청아는 단호했다.[정말 괜찮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어. 오빠는 엄마 잘 챙기면 돼!]그때, 방문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지자, 강남은 문 쪽을 흘깃 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중에 카톡으로 이야기하자.”그렇게 전화를 끊고,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방을 나왔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소연이 안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식탁 위의 반찬을 한 입 맛보더니,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짜요.”허홍연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내일은 소금을 좀 덜 넣을게.”하지만 소연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몇 번을 말했는데도 여전히 이러시네요.”싸늘해진 분위기에 강남은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다.“엄마가 원래 그렇게 요리하셨으니까. 한 번에 바꾸기는 어렵지. 혼자서 준비하시느라 힘들 텐데.”그때, 허홍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강남아, 너 이번에 월급 언제 나오니? 소연이가 산후조리원 가고 싶어 하니까 미리 준비해야 할 거야. 요즘 산후조리원이 꽤 비싸다더라.”소
우강남은 곧바로 말했다.“알겠어요. 모르는 척할게요.”심지어 청아가 약혼하고 결혼하는 날에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오빠로서 무능했고, 동생에게 해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얼굴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강남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섰고, 그때 우임승과 함께 굳어버렸다.소파에 앉아 있던 허홍연이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여보, 건강은 좀 괜찮아?”우임승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그게...”허홍연은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렸다. 사실 그녀는 어제 강남이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라도 정말 청아에게 돈을 주려고 할까 봐 오늘 아침, 강남이 집을 나서자마자 몰래 택시를 타고 따라왔다.그런데 따라오고 보니, 강남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요양원이었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요양원 안으로 들어올수록 점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허홍현은 남편과 청아가 빚더미에 허덕이며 힘겹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우임승이 머무는 곳은 예상과는 달리, 꽤 고급스러운 요양원이었다.강남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엄마, 나 몰래 따라온 거예요?”허홍연은 다소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그게 아니라 그냥 너 따라와서 네 아빠도 좀 보려고 했지.”강남은 순간적으로 어제 전화를 걸 때 문밖에서 느꼈던 인기척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허홍연이 자신을 따라온 이유도, 이곳에 온 이유도 명확했다. 그랬기에 강남은 안타까움과 실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이렇게까지 우청아를 대하는 게 너무 속상했다. 하지만 정작 허홍연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괴로웠다분노하고 싶어도, 따지고 싶어도,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홍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르고
우임승은 화가 치밀어 거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얼굴이 벌겋게 된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당신이 하는 말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야?”“그때 나는 응급실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었고, 당신은 병원비 물을까 봐 서둘러 나와의 관계를 끊고, 날 짐짝처럼 청아한테 떠넘겼잖아.”“그런데 이제 와서 오히려 우리를 탓해?”허홍연은 화가 나서 맞받아쳤다.“내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면, 당신들이 한 짓은 사람이 할 짓이야? 힘든 시절은 내가 다 버텼어.”“그런데 이제 좋은 날이 오니까 날 속이고 몰래 편하게 살고 있었다고?”우임승은 차갑게 말했다.“우리가 왜 너한테 숨겼는지, 당신 스스로 잘 알잖아.”허홍연의 표정이 순간 슬픔으로 물들었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우임승, 당신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어? 젊었을 때 도박으로 진 빚, 그거 다 내가 갚았어. 당신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며 숨는 동안, 나는 애 둘을 혼자 키웠어.”“그런데 이제 와서 딸 덕에 편하게 사니까 나를 내치겠다고?”우임승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당신한테 빚진 거 알아. 하지만 청아는 당신한테 빚진 게 없다. 지금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건 다 청아 덕이야.”“그래서 나는 청아의 것으로 당신에게 보상해 줄 수 없어! 만약 당신이 보상을 원한다면, 그래, 좋아! 나를 데려가.”“집으로 돌아가서, 찍소리도 안 하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게.”허홍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불구가 돼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야?”우임승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왜 못 해? 요리도 할 수 있고, 집안일도 할 수 있어. 거리에서 구걸해서라도 빚을 갚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청아한테는 손대지 마!”허홍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녀는 결국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어릴 때부터 청아만 특별히 예뻐했지!”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강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엄마, 인제 그만 가요.”허홍연은
허홍연은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강남은 다시 입을 열었다.“병원에서 이미 정했잖아요. 엄마는 제가 모실 거고, 아버지는 청아가 책임지는 걸로.”“그때 부양책인 협약서도 서명했으니, 이제 청아 일은 관여하지 마세요. 청아가 어떤 삶을 살든, 이제 우리와는 아무 관련 없는 거예요.”허홍연은 냉소를 터뜨렸다.“무슨 협약서를 쓰든 말든, 청아는 내 딸이야.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어!”강남은 갑자기 차를 갓길에 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면 엄마는 아직도 저를 아들로 생각하시나요?”허홍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남아, 너, 너 지금 엄마를 협박하는 거야? 엄마가 이렇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건데?”강남은 단호하게 말했다.“엄마는 저를 위하는 게 아니라, 저를 망치고 있는 거예요!”“만약 우리 가족이 힘든 시기를 함께 견뎌내고, 청아를 이용하지도 않았고, 엄마가 편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화목한 가족이었겠죠.”“그런데 엄마가 청아를 내쳤고, 그 결과 우리 남매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어요. 심지어 제 앞날도 한순간에 무너질 뻔했고요.”“그런데도 이게 다 저를 위한 거라고요?”강남의 얼굴은 분노로 붉어졌고, 눈가에는 피가 맺힌 듯 붉은 기운이 서렸다.그 모습에 허홍연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채 속이 뒤집혔다. 허홍연은 오로지 아들만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왜? 왜 모두가 나를 원망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강남이마저도?’우강남은 한숨을 쉬며 차분하게 말했다.“엄마가 청아를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청아의 삶을 방해하지는 마세요. 청아가 지금 행복한 건 우리 덕분이 아니에요.”“우리는 청아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최소한 청아의 삶을 망가뜨리지는 말아야죠.”허홍연은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남은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차
[아니야!]우임승은 단호하게 말했는데, 조금 서두르는 듯한 어조였다.[그냥 네가 너무 힘들까 봐서 그래.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친구들도 있고, 돌봐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네가 오면 괜히 나랑 노인네들 바둑 두는 시간만 방해할 거야.]청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러니까 당분간은 오지 마. 요즘 우리 팀이 요양원에서 열리는 바둑 대회에 나가거든. 매일 연습해야 해.]우임승은 다시 한번 강조하자, 청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열심히 연습하세요. 아버지가 상타시면 우리가 같이 가서 축하해 드릴게요.”우임승의 목소리가 한층 가벼워졌다.[그래, 그래. 너도 바쁠 텐데, 어서 일 봐.]그렇게 통화를 마쳤지만, 청아는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평소라면, 요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며 마냥 좋아할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연락해 오지 말라고 하다니.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청아는 고민 끝에 요양원 담당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버지, 괜찮으신가요?”[네, 아무 문제 없으세요. 평소랑 똑같으세요.”확실하게 확인하자 청아는 그제야 안심하고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자료를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주말이 되자, 청아는 장시원의 부모님이 계신 저택으로 향했다. 마당에서는 장명석이 요요를 데리고 정원을 거닐며 놀아주고 있었고, 그 사이 김화연이 청아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약혼 날짜는 정해졌어. 네가 회사 일로 바쁠 테니까, 준비는 시원이가 맡기로 했어. 하지만 초대 손님 명단은 너랑 상의해야 해서.”김화연은 청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너희 집 쪽에서 초대하고 싶은 친척이나 친구들, 리스트를 정리해서 나한테 주면 돼.”“너희가 초대한 손님들은 귀한 손님이니까, 시원이 아버지가 직접 초대장을 쓸 거야.”그 말에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초대할
우청아는 초대 명단에 고명기 부부와 하성연, 고태형의 이름을 추가했다. 고태형이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를 약혼식에 초대하는 것이, 더는 미련을 갖지 않도록 정리하는 방법일 것이다.그리고 잠시 고민한 끝에, 대학 시절 친구였던 서현진의 이름도 적었다. 현진과 청아는 같은 학과, 같은 반이었고, 한때 무척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우임승이 청아 몰래 현진에게 돈을 빌린 후, 현진을 포함한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멀어져 갔으나 현진만은 끝까지 남아 주었다.청아는 혹시 아버지가 현진에게 다시 손을 벌릴까 두려워, 알바가 너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선택이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이번 약혼식에는 꼭 현진을 초대하고 싶었다.그것이 청아가 할 수 있는 조금이나마 늦은 사과이자, 다시 시작하는 계기였다.청아는 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동기 모임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달라고 요청했다.곧 단체방에 초대된 그녀는, 현진의 연락처를 찾아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몇 초 후, 현진이 즉시 요청을 수락했고, 놀란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청아야?]청아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현진아, 잘 지냈어?]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음성 통화가 걸려 왔고, 현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너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단톡방에도 안 들어오고, 동창회도 안 나오고!다들 널 찾았어!]청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작년에 강성으로 돌아왔어. 이제서야 연락하게 됐네.”청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사실, 나 약혼하게 됐어. 그래서 너 초대하려고 연락했어. 시간 괜찮으면 와 줄 수 있어?”그리고 약혼 날짜를 알려주자, 현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너 약혼한다고? 와, 대박! 난 아직 남자친구도 없는데, 그때 연애 안 한다고 말하던 네가 제일 먼저 가네?]현진의 말에 청아는 웃으며 말했다.“너도 서둘러야지.”현진은 장난스럽게 물었다.[다른 동기들은 누구 초대했어? 그냥 다 같이 미
“아니.”이제니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오래전부터 연락이 끊겼어.”그러자 고윤정은 비웃으며 말했다.“나라고 해도 나도 안 갔을 거야.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없다가, 갑자기 약혼한다며 연락하는 거? 결국 축의금 받으려는 거 아니야?”그 말에 제니는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속 좁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윤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난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야.”그러다 문득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어차피 같은 동기인데, 우리도 한 번 가서 축하해 주는 게 어때?”한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청아랑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했어. 굳이 찾아가서 돈까지 써야 할 이유는 없지.”윤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축의금은 무슨 축의금이야? 우린 그냥 가서 얼굴만 비추는 거야. 청아가 명문대 출신이라면서? 도대체 어떤 재벌을 잡았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그제야 분위기가 달라졌고, 윤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들 눈치챘다.그녀는 진심으로 축하하려는 게 아니라, 청아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 보러 가겠다는 심산이었다.누군가는 애써 걱정하는 척하며 말했다.“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안 좋지 않을까?”그러자 제니가 단호하게 말했다.“난 그렇게 유치한 짓 안 할 거야. 그러니 너희도 그러지 마.”윤정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약혼식이지 결혼식도 아니잖아. 우리가 축의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가주기만 해도 고마워해야지.”다른 몇몇이 맞장구치며 말했다.“그러네! 그러고 보니 약혼식 어디서 한다더라?”제니는 한숨을 쉬었다. 이들은 축하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청아를 깎아내리고,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가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들의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제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너희들끼리 얘기해. 난 갈 데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그렇게, 제니는 더 이상 말도 섞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비록 몇 년 동안 청아와의 연락이 끊겼지만, 예전에는 친구였고, 설령 이후 친구가 못 되더라도 청
롤스로이스가 멀어지자, 서현진의 동료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와, 대박! 이렇게 화려한 차에, 직접 운전기사까지 동원해서 초대장을 배달하는 거예요? 현진 씨 친구, 진짜 재벌가에 시집가는 거 아니에요?”현진도 어리둥절한 채, 초대장을 열어보자 청아의 초대장이 확실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고, 현진은 흥분한 목소리로 제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제니! 네 축의금, 내가 대신 전달 안 할 거야. 그러니 너 무조건 같이 가야 해!”...약혼식까지 10일 남았고, 청아는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웨딩드레스 피팅과 메이크업 테스트 정도만 마무리하면 됐다. 장시원은 그저 회사 업무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회사는 이미 고명기를 중심으로, 시원이 보낸 유능한 관리자들이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어느덧, 몇 년 동안 운영된 회사보다도 청아의 회사는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이제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진 그녀는, 운전 연습을 겸해 출퇴근을 직접 하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시원이 조수석에 앉아 감독하듯 지켜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긴장감이 두 배가 되었다.청아가 강력하게 항의한 끝에, 결국 시원이 조수석에 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혼자 운전하면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속도를 내든, 천천히 가든, 항상 주변 차량들이 자신과 같은 페이스로 움직이고 있었다.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지만, 몇 번 반복되자 청아는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람, 정말 티 안 나게 감시하는 재주가 있네.’그러면서도 묘한 따뜻함이 밀려왔다.화요일 오후, 청아는 고객과 함께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돌아오는 길에 요양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아버지를 몇 주째 못 뵀네.’청아는 차를 돌려 요양원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하지는 않았는데, 그저 얼굴만 보고, 잠깐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하지만, 요양원에 도착하자마자 청아는 걸음을 멈췄다.소파 위 허홍연이 앉아 과일을 깎고 있었고, 정소연이 임신 검진 결과지를 들고 우임승에게 공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