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파티장에 도착하자,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격식을 갖춘 남녀가 황금빛으로 장식된 파티장을 배경 삼아 더욱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고, 모두 신사적이거나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야기꽃이 활짝 피고,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진구는 유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이번 파티는 미국에서 돌아온 화교가 주최한 자리야.”“국내 경제 상황이 괜찮다 보니까,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사업을 하려고 명사들과 인맥을 쌓으려는 자리지.”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물었다.“우리 삼촌도 오셨을까?”“당연히 초청은 했을 거야. 근데 오실진 모르겠네.” 진구가 말하자, 유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확신하는데, 절대 안 오셔요. 요즘은 24시간 내내 소희한테 붙어 있거든요. 근데 이런 지루한 파티에 오실 틈이 있을까요?”유진은 임구택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낯익은 인물을 발견했다. 한 남자가 몇몇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깊게 파인 V넥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여자는 우아하고 요염한 미소를 띠며, 말을 꺼내기 전마다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갈고리 같아, 한 번 걸리면 뼈까지 녹을 것 같았다.그때, 구은정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고 오만한 눈동자는 거리낌 없이 유진을 응시했다.“삼촌 저기 계시네. 가서 인사드리고 올게.” 진구는 유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진은 갑작스럽게 돌아보려다, 억지로 시선을 누르며 따라갔다.진구가 말한 외삼촌은 시원이었다. 시원은 유진을 보자, 부드럽고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아.”“삼촌, 안녕하세요.”유진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시원은 흰 셔츠에 진회색 베스트를 입고 있었고, 미소 띤 입꼬리는 늘 잔잔한 여운을 남겨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구도 반가운 얼굴로 말하자, 시원은 부드럽게 웃었다.“오랜 친구가 온다길래 잠깐 들른 거야. 금방
“백림 씨!”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다가와 조백림의 팔짱을 끼며 유진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거예요?”유진은 한눈에 알아봤다. 이 여자가 오늘 백림이 데려온 파트너라는 걸. 그게 유정이 아니라는 사실에 잠깐 놀랐지만, 유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여자는 백림에게 더 바짝 붙으며 투정을 부렸다.“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이 팔려선, 아예 날 잊어버리는 거 아니에요?”백림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며 그녀를 흘끗 봤고, 엷은 미소만 띤 채 말했다.“소개할게. 여긴 임유진.”“임유진?”여자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느슨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전 유류나라고 해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아까 스시 먹다 손에 간장이 묻었어요.”류나는 뻘쭘하게 손을 거뒀다. 체면이 깎였다고 느낀 듯, 말투에 가시가 섞였다.“이런 파티에서 나오는 스시가 맛있긴 한가요? 그냥 보기 좋으라고 놓은 줄 알았는데, 진짜 먹는 사람도 있네요?”유진은 가볍게 웃었다.“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참 좋겠네요. 그럼 맛있는 건 다 제 몫이 될 테니까요.”그러고는 조백림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시원 삼촌한테 이번 주말에 요요랑 청아 언니 데리고 집에 놀러 오라고 했어요. 삼촌도 유정 언니랑 같이 오세요.”백림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유정이한테도 전해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호텔 주방에 따로 주문 넣을게.”“감사해요, 삼촌.”백림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류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유진과 멀어지자, 류나는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며 비꼬듯 말했다.“가끔 어린 여자애들이 순진한 척하면서 남자만 보면 삼촌 하고 부르던데, 참 저질스러운 소설 보는 것 같네요.”백림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봤다.“방금 그 여자, 누군지 알아?”“누군데요?” 류나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임유진.
이런 자리에서 유진은 은정과 말싸움을 하거나 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저 얌전히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은정은 유진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계단은 넓었지만 유난히 조용했고, 뒤를 돌아보면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 파티장의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유진은 한 계단 아래에서 은정의 뒤를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여자 파트너는요? 이렇게 두고 와도 돼요?”은정은 걸음을 멈추고 유진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질투라든가, 그런 감정을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 두 사람 사이엔 계속 냉랭한 기류가 흘렀고, 유진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은정은 설명했다.“그 사람, 내 비서야.”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처음엔 회사에서 임시로 준비한 파트너인 줄 알았는데, 비서라면 매일 함께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그게 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에, 은정은 가슴에 바늘이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위층은 휴게 공간과 탈의실로 구성돼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방 하나를 골라 마주 앉았다.은정은 유진에게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조금 전에 스시 먹었어요.” 유진이 대답했고, 은정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나중에 집에 가서 야식 만들어줄게.”“괜찮아요. 이미 배불러요.”유진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스시 먹고 배불러?”은정은 가볍게 웃었다.“평소엔 밥 한 공기 뚝딱 비우고도 애옹이 간식까지 같이 먹었잖아.”그의 말에 유진은 예전에 은정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애옹이를 데리고 장난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그러자 가슴 한쪽이 시리게 허전해졌다. 은정은
이곳은 호텔의 개인 휴게실로, 안쪽과 바깥쪽이 연결되어 있었고, 문도 없이 가운데에는 장식용으로 놓인 뚫린 책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서성 사장님!”한 여자가 서성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안기며,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서성은 문을 닫으며, 여자를 끌고 안쪽으로 향했다. 불붙은 장작처럼 타오르는 모습이었다.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깥을 살폈지만,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의 품에 안겨 도취한 얼굴로 고개를 젖힌 여자만 보였다. 은정의 파트너였고, 은정은 그 여자를 비서라고 했었다. 유진은 깜짝 놀라 은정을 돌아봤다. 그에게 ‘당신 여자가 다른 남자한테 뺏긴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찰나, 은정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자기야, 보고 싶었지?”서성의 목소리는 흐릿하게 취기가 섞여 있었고, 젊은 남자라고 보기엔 목소리가 걸걸했다.“안 돼요!”김서나는 몸을 비틀며 말렸다.“잠시 후에 구은정 사장님이 저를 찾으면 어떡해요?”“찾으면 어쩔 건데?”서성의 취한 목소리는 오만했고, 발음도 또렷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그 자식이 내 눈앞에 나타나서 우리가 이러는 걸 본다 해도, 그놈은 찍소리도 못해! 나 없으면 구씨그룹은 당장 망하게 생겼다고!”그러자 서나는 아첨하듯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회사에선 절대적인 분이신 건 맞죠. 하지만 사장님이 저보고 구은정 사장님 옆에서 계속 눈치 보라고 하셨잖아요?”“그런데 저희 사이 들키면, 저를 더 경계하게 될 거예요.”“걱정하지 마. 이곳은 절대 찾지 못해.”서성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이상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시 여자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동시에 서나의 드레스를 벗기기 시작했고, 안쪽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유진은 뒷걸음질 치며 복잡한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았다.‘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그 비서는 서성이 은정의 옆에 붙여놓
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그러니까, 이번에도 거절은 안 돼.”구은정은 그렇게 말했다.“뭐, 읍!”유진의 입술이 막히는 순간, 온몸이 반사적으로 굳어버렸다. 익숙한 은정의 향기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단숨에 덮쳐버렸다.은정은 능숙하게 유진의 입술을 벌리며 키스를 이어갔다. 한 손은 옷장 문을 짚고, 다른 손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은 채, 뜨거운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달콤한 유진의 앞에서 그동안 억눌러온 자제력과 이성이 완전히 무너졌다. 유진은 그의 키스를 강제로 받아내며 두 손으로 은정의 어깨를 밀었다.처음엔 억지스러운 상황에 분노했지만, 머릿속에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은정의 입장이 더 곤란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은정은 거칠면서도 따뜻했다. 그토록 진한 감정은, 저항하고 싶던 임유진의 마음까지도 서서히 녹여버렸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1분일까, 아니면 2분? 은정이 키스를 멈추고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유진, 오늘 정말 예쁘다.”유진의 머릿속이 웅하는 소리와 함께 울렸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심장 소리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진짜 예뻐.”은정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지만, 그 말만큼은 또렷했다. 그는 유진이 파티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예쁜 드레스를 입고 여진구 옆에 선 유진을 보는 순간, 질투에 이성을 놓칠 뻔했다. 그래서 바로 유진을 끌어당겨 옆에 두려 했던 것이다.유진은 화가 나고, 부끄럽고, 또 당황스러웠다. 좁은 공간, 존재감이 지나치게 강한 이 남자, 그리고 방 안에서 들려오는 다른 커플의 은밀한 소리까지. 유진의 머리는 순식간에 하얘졌다.은정은 유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임유진, 이제 기억났어?”은정은 유진이 예전에 자신에게 했던 모든 행동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싶었다. 그녀가 기
김서나는 얇은 이불로 몸을 급히 가리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구은정 사장님? 어떻게 방 안에 있었던 거죠? 그 품에 있는 여자는 누구예요?”서성의 얼굴은 잿빛처럼 굳어 있었다.“못 봤어? 걔도 여자 즐기러 온 거야.”은정 품에 안긴 유진은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가 얼마나 오래 옷장 안에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봤을지 알 수 없기에, 서성은 점점 초조해졌다.서성은 다른 건 괜찮았다. 김서나라는 비밀 라인이야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은정이 이 일을 자기 아내에게라도 흘리면, 그땐 일이 커진다.신경이 뒤엉킨 서성은 서나를 향해 냉랭하게 내뱉었다.“옷 입고 꺼져.”“사장님!”서나는 다급히 붙잡으며 말했다.“우리 사이가 들켰는데, 구은정 사장님이 저를 가만둘까요?”서성은 턱살을 축 늘어뜨린 채 말없이 옷을 주워 입었고,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해성으로 보내줄게. 오늘 밤 바로 출발해.”서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면서도 눈빛에 계산이 스쳤다.‘내가 이 사람을 위해 뭐든 했는데, 직장도 잃고, 이 정도면 보상은 받아야지.’서나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서성 사장님, 저 사장님을 위해서 다 버렸잖아요. 이젠 보상 좀 해줘야죠.”이에 서성은 비웃듯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해성에 있는 집 한 채 명의 넘겨줄 테니 만족해.”그제야 서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사장님.”한편, 은정은 다른 객실을 잡아 유진을 품에 안은 채 들어왔다.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으려던 찰나, 유진이 은정의 셔츠를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깨에 닿은 물기, 그 젖은 감촉에 잠시 멈칫하더니 얼굴이 굳었다.“유진아!”유진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가운을 걷어보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은정의 얼굴이 보였다. 눈물까지 맺힌 그 모습을 본 순간, 은정의 가슴도 덜컥 내려앉았다.유진은 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랐지만, 그렇다고 약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은정은 유진을 바라보다 담담히 말했다.“이제 좀 진지한 얘기를 하자.”“진지한 얘기?”유진은 아직도 어떻게 하면 구은정을 도와 서성을 견제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기에,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은정의 짙은 눈동자는 깊었다.“친구로 지낼 건지, 아니면 내가 널 계속 쫓아다닐 건지. 결정했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화가 난 듯 말했다.“그게 지금 진지한 얘기예요?”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유진의 가슴 한쪽이 찌릿하며 저렸다. 분노도 사라지고,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잘 모르겠어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이미 고백도 받고, 키스도 했는데, 어떻게 친구로 돌아가라는 걸까?’“결정 못 했으면, 그럼 나는 계속 널 쫓아다닐게.”은정의 목소리는 장난기 섞인 당당함으로 가득 찼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소파 등받이에 손을 짚고, 유진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그리고 유진은 순간 놀라 뒤로 물러났고, 등이 소파에 닿을 만큼 밀려나며 외쳤다.“친구 할게요!”은정의 얇은 입술은 유진의 입술 코앞에서 멈췄다. 단 몇 센티미터만 더 가면 닿을 거리였다.뜨거운 숨결이 유진의 얼굴에 닿자, 그녀는 숨을 참은 채 눈을 내리깔고 은정의 어깨를 밀었다.은정은 결국 몸을 물러섰다. 이 이상 밀어붙일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오늘 이 정도면 충분했다.은정은 유진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좋아. 친구 하자. 하지만 조건 있어. 예전처럼 나 피하지 않기!”유진은 속눈썹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고, 은정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우리 이제 집에 가자.”유진은 급히 말했다.“아직 난 못 가요.”말이 끝나기도 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는 여진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통화를 받았다.“선배!”진구는 다급한 목소리였다.[유진아, 어디야? 파티장 안에 네가 안 보여서.]유진은 자기를 바라보는 은정의 눈빛이 너무나 뜨겁다는 걸 느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그날 밤 이후로, 계속 잠을 못 잤어.”“나, 좀 수척해 보이지 않아?”유진이 잠깐 멈칫했다.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걸 아는 거지?’유진은 순간 당황스러웠고, 동시에 남자의 말이 괜히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은정은 반쯤 눈을 뜬 채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은,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유진은 은정을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지었다.“친구가 되니까 마음이 놓였다고요? 그럼 우린 원래 친구였잖아요. 왜 그렇게 돌아서 가려고 했는데요?”어두운 조명 아래, 은정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더욱 짙고 어두워져 먹물처럼 깊었고, 저음의 목소리는 자석처럼 끌리는 울림이 있었다.“왜 그런 것 같아?”유진은 은정의 눈 속에서 깊은 바다 같은 소용돌이를 느꼈다. 괜히 빠져들 것만 같아서, 아예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투덜거렸다.“그럴 만하니까 그렇죠.”은정은 다시 눈을 감으며,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다.“네 말이 맞아. 내가 그럴 만하지.”원래 하늘이 은정에게는 치트키를 줬다. 왕으로 곧장 올라설 수 있었던 삶을, 굳이 밑바닥 계급부터 정글에서 시작하겠다고 했던 그였다.27층으로 돌아왔을 때, 유진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이제는 좀 놔줘도 되지 않아요?”그러나 은정은 손을 놓지 않았다.“애옹이 보고 싶지 않아?”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저녁 제대로 못 먹었잖아. 내가 야식 만들어줄게. 넌 애옹이랑 잠깐 놀고 있어.”은정은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리고 유진이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자, 그는 그녀가 동의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유진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집 안으로 들어선 유진은 문득 말했다.“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야 해요.”그 말에 그제야 구은정이 손을 놓았다.“얼른 다녀와.”“네.”유진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대답하고는 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은정은 문을 닫지도 않고 열어둔 채, 달려오는 애옹이를 받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