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문을 통해 간간이 들려왔다. 방안에는 불빛이 스치며 고요했다. 소희는 남자의 숨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찰나에 그녀는 온몸에 피가 솟구치고 심장은 더욱 빠르게 두근거렸다.그녀가 등지고 있었던 벽은 차갑지만 그녀의 가슴은 오히려 뜨거웠다. 냉열이 번갈아 전해오는 느낌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숨쉬기조차 어려웠다.남자는 마침내 키스를 멈추었지만 벽을 받치고 있던 손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고 허스키하며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결정적인 순간에 둘째 삼촌이라고 잘도 부르던 군요."소희는 낮게 숨을 쉬며 남자가 이 일을 끄집어낼 줄 알았다.그녀는 그가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몰랐기에 목소리를 낮추며 천천히 말했다."할아버지는 내게 말했죠.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지름길이 있으면 바로 선택해야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요."남자는 낮게 웃으며 미적지근하게 물었다."왜 심명을 찾지 않았어요?"소희는 손가락으로 그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그가 일부러 날 이렇게 만들려고 한거 눈치 못 챘어요? 나한테 복수하고 있는 거예요.""알면서 왜 따라왔어요? ""신세를 져서요."구택은 소녀의 그림같이 예쁜 눈을 내려다보며 물었다."이혁 그 일 때문에요?"소희는 경악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그녀는 묻자마자 깨달았다. 그날 밤 그녀는 블루드 부근에서 그에게 전화를 했으니 그는 틀림없이 후에 조사했을 것이다.구택은 그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이혁 그 사람들은 안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경찰도 소희 씨를 찾을 수 없을 거고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소희는 인차 깨달았다. 그는 이미 그녀를 위해 수습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눈빛에는 따뜻한 기운이 스쳤다.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남자는 또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계속 말했다."심명하고 가까이 지내지 마요. 나는 다른 사람과 섹스 파트너를 공유하는 습관 없어요."소희는
소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않은 채 심명이 마음대로 생각게 놔뒀다.심명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산만하게 말했다."내 사람이 되는 건 어때요? 그가 소희 씨에게 얼마를 주든 난 두 배를 더 주죠. 그리고 나는 소희 씨를 더욱 아껴줄 거예요. 적어도 임구택보다는!"소희는 눈빛이 차가웠다."당신 정말 한가하군요?"심명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아니요, 나 바쁜 사람이에요. 평소에 업무 스트레스도 매우 커서 항상 재밌는 일 찾아서 하고 싶거든요. 예를 들면 임구택의 여자를 가로채는 거요."그는 또 웃기 시작했다. 사악한 웃음이었다."지난달에 그는 내가 찜해둔 땅을 빼앗아 갔으니 만약 내가 소희 씨를 빼앗아 간다면 우리는 비긴 거겠죠?"소희는 귀찮아하며 말했다."당신들의 일에 왜 내가 끼어들어야 하는 거죠? 이제 우리 두 사람은 퉁친 셈이에요."심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회가 끝나야 퉁치죠, 지금은 아직이에요."말이 끝나자 그는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소희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연회장으로 끌고 갔다.소희는 뿌리치려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심명은 그녀가 쿵후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손을 힘껏 잡고 방긋 웃었다."곧 알게 될 거예요."복도와 연회장은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이미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구택은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심명이 이렇게 소희를 데리고 나타나자 연회장은 서서히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심명은 소희를 연회장 한가운데로 데리고 가서 줄곧 소희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때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웃으며 말했다."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내 여자친구, 소희입니다."그는 잠시 멈추며 안색이 어두워진 구택을 바라보았다."임 대표님의 먼 친척 조카이기도 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소희는 바로 고개를 들어 구택을 보았다. 그는 얼음
심명은 총애하는 눈빛으로 소희를 한 번 보았다."감정이 좋으면 진도가 빠르게 되는 거죠. 안 그래요?"소희는 그를 우주 밖으로 걷어차고 싶었다.구택은 두 사람이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렇다면 나는 소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잘 이야기해 봐야겠군요."그는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집에 가서 말하자!"소희는 이 기회를 틈타 앞으로 나아가며 심명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온순하고 얌전한 말투로 말했다."알았어요, 둘째 삼촌."구택은 그녀를 한 번 보더니 몸을 돌려 하 대표와 작별을 고했다.하 대표는 얼른 말했다."얼른 가보세요, 임 대표님. 아이들의 혼사가 중요하죠."구택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 밑은 더욱 어두워졌고 더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소희는 인차 따라갔다.구택은 혼자 차를 몰고 왔다. 소희는 뒷좌석으로 향하며 올라타려는 순간 구택은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앞에 타요."소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앞에 올라탔다.그녀가 막 안전벨트를 매자 차는 인차 달리며 멋진 드리프트를 하고 별장의 대문을 나와 아스팔트 길로 올라갔다.차의 속도가 안정되자 소희는 입을 열었다."그는 고의로 그런 거예요.""알아요." 남자는 앞을 보며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고의라는 거."소희는 남자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질투나 감정과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와 심명은 원래 사업상의 상대인데다 지금 심명은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남자라면 누구나 화를 냈을 것이다. 이것은 남자의 소유욕이 일으킨 결과였다.소희는 이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택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더는 설명을 하지 않고 창밖의 풍경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오늘 토요일이라 길에 차가 매우 많았다. 별장에서 시내까지 한 시간이 걸렸는데 차가 어정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저녁이었고 날이
그는 말을 마치자 바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다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거칠지 않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응답을 애원하며 그녀의 감정을 배려했다.그는 매번 그녀의 입술의 깊숙한 곳을 탐색하며 마치 신사가 연회에서 한 여자를 초청하는 것만 같았다.소희는 원래 태연자약했지만 그의 부드러운 시도에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자기도 모르게 그의 키스에 응답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응답하자 그는 즉시 달라붙으며 우아한 왈츠가 아니라 뜨겁고 섹시한 재즈를 추는 것 같았다.날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방 전체는 짙은 노을로 물들였다. 소희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린 구택은 그녀를 안고 작은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소희를 침대에 눕히자 구택은 오히려 서두르지 않았다.그녀는 디저트를 좋아했기에 구택은 일부러 주식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다양한 디저트를 주었다. 하지만 소희는 디저트로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갈망하며 배가 더욱 고팠다.구택은 자신의 고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그녀가 그에게 애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소희가 입을 열고 구걸하자 그는 즉시 응답했다. 그도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소녀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구택은 그녀를 억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급해하지 마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소희의 눈빛은 희미해지며 바로 잔잔하게 흩어졌다.......소희가 깨어났을 때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침대에는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간을 한 번 보았는데 밤 12시 30분이었다.그녀는 겨우 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갈증이 심해지자 소희는 옷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에 가서 물을 마시려 했다.거실에 들어서자 소희는 멈칫하며 베란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난간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별빛처럼 반짝이며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 같았다.어두운 밤, 거실의 불을 켜지 않았으니 거실도 칠흑같이 어두웠다. 남자의 그림자는 우뚝 서있었으며 왠지 모르는 외로움을 보였다.소희는 다가가 그의 곁에 서서 눈
"그래요!" 구택은 웃었다."소희 씨가 그렇게 말하면요."소희는 살짝 난감해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한 뒤 소희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배 안 고파요?"두 사람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았다.구택이 물었다."뭐 먹을 거 있어요?"소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내가 면 끓일게요. 이게 좀 빠르거든요."구택은 얇은 입술로 살짝 웃었다."좋아요!""그럼 잠깐만 기다려요!"소희는 말하며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구택은 또 담배 하나를 꺼내며 난간에 기대어 천천히 피웠다. 방금 소녀가 담배에 사레가 들린 모습을 생각하니 그는 웃고 싶었다. 뒤돌아보니 주방의 불이 켜져 있었다. 소녀가 바삐 요리하는 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어둠 속에 서서 불빛과 밥 냄새가 나는 부엌을 보면서 마음속에 이상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20분 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고 앞에는 각각 라면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간단한 라면에 계란 프라이였다."얼른 먹어요!" 소희는 젓가락을 들고 먼저 라면을 먹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구택은 방금 탄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한동안 감히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그는 먹기 시작했다.라면을 한 입 먹은 남자는 멈칫했다. 그의 표정은 약간 복잡했다. 그는 티슈 한 장을 꺼내 입에 있는 것을 뱉었다. 계란 껍데기이었다.그는 원래 무엇을 말하려고 했지만 맞은편 소희가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고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계속 라면을 먹었다.소희는 인차 자신의 라면 한 그릇을 다 먹고 앉아서 구택을 기다렸다.구택이 마지막으로 국물을 마신 뒤 젓가락을 내려놓자 소희가 물었다."맛 어때요?""괜찮네요." 남자는 티슈로 천천히 입을 닦고 점차 웃으며 말했다. "라면을 이렇게 맛없게 만드는 것도 대단한데요."소희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맛없어요?"구택은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평소에 이런 것만 먹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랐죠."소희는 어이가
소희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무서워하는 거예요?"구택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그럴 리가요.""그럼 적합한 거죠. 공포영화도 수면에 도움이 되는걸요. 나는 볼 때마다 잠이 잘 오는데."소희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간식을 먹으며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보았다.10분 후, 구택은 벌떡 일어섰다."갑자기 졸리네요. 먼저 자러 갈 테니 소희 씨 혼자 마저 봐요."소희는 영화에 집중하다 그의 말에 정신이 들며 웃었다."내 말 맞죠? 공포영화는 확실히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요."구택은 어두움 속에 서서 알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신의 침실로 걸어갔다.소희는 혼자서 3시 다 되어갈 때까지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이를 닦은 후 침대에 누워 바로 잠이 들며 날 밝을 때까지 잤다.그녀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구택은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5성급 호텔에서 배달해온 음식이었다.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구택은 뒤돌아 보았다. 소희는 하얀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귓가에 흩어져있었다. 갓난 아기처럼 통통한 얼굴은 보기에 부드럽고 악의가 없어 보였다. 완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 같았다.소희는 인사를 하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구택 씨가 이미 외출한 줄 알았어요."구택은 계속 아침을 차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주말이라 일이 별로 없어요. 이따 소희 씨 데리고 같이 집으로 돌아갈게요."소희는 맞은편에 앉아 만두를 들고 한 입 깨물며 무심결에 물었다."어젯밤 잘 잤어요?"구택은 고개를 들어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럭저럭이요."소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구택 씨 잠이 안 올 때마다 나랑 같이 공포영화 봐요."구택은 죽 한 모금 먹으며 갑자기 삼키기 어려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보았다. 그녀의 진심 어린 웃음을 보며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밥을 먹고 구택은 차를 몰고 소희와 함께
오후 수업이 끝나자 어정으로 돌아온 소희는 진석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물었다."작업실에 설백현이란 사람 있어요?"디자인 작업실은 최초에 그녀와 진석이 함께 설립했지만 후에 그녀는 학교 때문에 모든 일을 진석에게 맡겼다. 그리고 소희는 평소에도 거의 가보지 않았기에 작업실에 온 신인에 대해서 확실히 잘 몰랐다.진석은 인사 부장을 불러 와서 물어본 후에야 소희의 말에 대답했다."이 사람 없어요."소희는 인차 알아차렸다. "그래요, 알았어요."진석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 가봐요? 언제 시간 있으면 같이 사부님을 보러 가요."소희는 젓가락으로 솥의 면을 저으며 말했다."주말에 알바가 있어서요. 곧 여름방학이니까 그때 같이 가요.""그래요."전화를 끊자 소희는 찬호에게 전화를 걸며 확실하게 말했다."북극에는 설백현이라고 하는 사람 없어."찬호는 화가 났다."엄마와 누나가 속을 줄 알았어요.""응, 엄마한테 말해 줘. 제때에 빠져나와야 더 큰 손실을 막을 수 있어."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한편, 찬호는 소희와 통화를 마치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순희는 마침 거실에서 나오며 고개를 들어 그에게 소리쳤다."찬호야, 밥 먹어."찬호는 그녀에게 설백현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누나가 마침 집으로 돌아왔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순희가 물었다.시연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학교에 별일 없어서 먼저 돌아왔어요.""그럼 잘 됐네, 같이 밥 먹자."정민은 회식이 있어 집에 없었기에 그들 세 사람만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밥 먹을 때 시연은 고개를 들어 순희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밥을 거의 다 먹을 때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엄마, 나 2000만 원만 더 줘요."순희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왜 또 돈을 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달래?"시연은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응, 설백현이 그들 부팀장이 거의 마음을 정했다며 나보고 귀중한 선물 좀 더 사서 주면
순희는 시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이따 2000만 입금해 줄게."찬호는 조급해했다."엄마랑 누나 바보예요? 그 설백현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한테 돈을 주는 거냐고요!""누가 사기꾼이야?"시연은 또 찬호의 얼굴을 꼬집었다."내가 보기에 네 그 소희 누나야말로 사기꾼이야!""소희 누나는 사기꾼이 아니지만 누나는 틀림없이 바보야!"찬호가 소리쳤다."찬호야, 누나한테 그러면 못 써!" 순희는 엄숙하게 찬호를 꾸짖었다.그녀들이 모두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찬호는 눈물이 핑 돌았다."그에게 속은 거라고요, 엄마랑 누나는 언젠간 후회할 거예요!"말을 마치고 그는 의자에서 내려와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순희는 고개를 저었다."찬호는 어쩜 철이 그렇게 없니!"시연은 차갑게 웃었다."다 그 소희한테서 배운 것인걸요. 엄마, 청호한테 소희랑 놀지 말라고 해요."순희는 화가 났다."누가 놀게 했다고. 그날 본가에서 그들 두 사람이 잠깐 게임을 했는데 그 소희가 바로 우리 찬호한테 매달렸지 뭐야."시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말투로 말했다."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소희는 소 씨 집안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으니까 우리 집 순진한 찬호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요."순희는 표정이 굳어졌다."이따 찬호한테 따끔하게 말해줘야지. 앞으로 소희를 상대하지 말라고!"찬호는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희가 전화를 받자 그는 조급해서 울기 직전이었다."소희 누나, 우리 엄마와 누나 모두 소희 누나의 말 안 믿어요. 어떡하죠?"소희는 금방 밥 먹고 냉장고 앞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찾고 있었다. 찬호의 말을 들은 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네 아빠 찾으면 되지."찬호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우리 아빠는 평소에 바쁘셔서 이런 일은 모두 우리 엄마의 말을 들어야 돼요. 내가 아빠한테 말해도 소용없어요."그는 목소리를 낮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