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원이 계속 말했다."비록 소희가 화원에 앉아 있는 모습만 멀리서만 보았을 뿐 똑똑히 보지는 못했다지만, 지난번 일로 소희에 대한 인상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잘못 보지는 않았을 거래."임구택은 큐대를 상 위에 던지고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운기 그룹과 정순 산하의 모든 회사에 통지해, 심씨 그룹과의 프로젝트를 전부 철수하라고. 그들이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임씨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고 알리고."그러고는 또 연달아 여러통의 전화를 걸었다.장시원이 옆에서 듣더니 비웃었다."너 지금 뭐하는 거야? 마침내 분풀이를 할 상대를 찾았다 이거야?"임구택의 긴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매서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 기복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놀다 남은 거라 해도 그놈은 앗아갈 자격은 없어."......이틀 후,교외의 한 개인장원,심명은 주방에서 새로 끓인 약밥 한 그릇을 들고 소희 방으로 갔다.소희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청력이 더욱 예민해졌기에 심명이 문 쪽에 접근하자마자 소리를 듣고 즉시 누워 이불을 덮고 잠든 척을 했다.심명은 그릇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웃었다."자는 척하지 말고 빨리 뜨거울 때 먹어."소희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심명은 침대옆에 앉아 몸을 숙인 채 온유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착한 소희 씨, 빨리 먹어. 다 신체 회복에 좋은 것들이야."소희는 여전히 깨어나려 하지 않았다."계속 자는 척하면 나 너 간지러움 태울 거야."심명이 손을 뻗어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그러자 소희가 즉시 눈을 뜨고 어쩔수 없다는 듯이 심명을 ‘바라보았다’."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차라리 벌을 줘, 더는 이런 것들로 나를 괴롭히지 말고.”심명이 어디에서 영양사들을 찾아왔는지, 끓인 약밥은 냄새도 고약하고 맛도 없어 한 번 먹을 때마다 인생이 암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먼지가 한층 뒤덮인 듯한 그녀의 눈을 보며 심명은 마음이 아파났다. 하지만 아무 일도
소희는 아주 심하게 다쳤다. 잘려나간 다리의 두 힘줄은 수술 후 성공적으로 연결되었지만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그래서 지금은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었다.오전 10시, 해빛이 제일 뜨거울 때 그들이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심명이 떠보 듯 물었다."소희야, 빛을 느낄 수 있어?"소희는 큰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심명이 즉시 말했다."괜찮아, 조급해하면 안 돼. 의사께서 그러셨거든, 너의 회복 속도가 아주 빠른 거라고."소희가 옅게 웃었다."나를 위로할 필요 없어. 이미 앞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거든."심명은 갑자기 목구멍이 메왔다.깨어난 후 자신이 실명했다는 걸 알게 된 소희는 잠시 멍해있었을 뿐 울지도 떠들지도 않았다.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앞으로 내가 너의 눈이 될 거야."소희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연희도 내 눈이 되겠다고 그러고, 서인도 내 눈이 되겠다고 그러던데. 지금은 너마저도 똑같은 말을 하네. 내게 만약 진짜 그렇게 많은 눈이 생기면 괴물이 되는 거잖아?"심명은 그녀를 밀며 돌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히히덕거렸다."괴물이 돼도 나는 네가 좋아."소희는 단지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물었다."그럼 네 여자친구는?""여자친구 아니야!"심명이 바로 말했다."그럼 섹파?"소희가 눈썹을 올리며 다시 물었다.심명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정했다."그래, 여자친구 맞아, 하지만 이미 헤어졌어!""왜?"소희가 물었다."내가 제일 사랑하는 소희한테 화를 냈으니까."심명은 몸을 굽혀 비위를 맞추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소희가 바로 그의 얼굴을 밀어젖히고 말했다."나쁜 남자 냄새 나, 나한테서 떨어져."심명은 갑자기 좌절감이 들었다. 소희는 분명 볼 수 없지만 매번 그가 그녀를 기습하려고 할 때면 그녀는 항상 미리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참 기다려도 장명원이 말을 하지 않자 소희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간미연은요? 함께 오지 않았나요?"장명원이 내색하지 않고 숨을 들이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왔어요. 의사 만나러 갔거든요, 조금 있다가 올 겁니다.""올 때마다 의사한테 물어볼 필요 없는데. 나 바로 여기 있는데 그냥 나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소희가 농담하 듯 말했다.장명원은 말을 하지 않았다.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지, 아니면 전에 아무것도 몰랐다고 변명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소녀의 상처와 빛을 잃은 두 눈 앞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창백하고 무기력하기 했을 거니까.반나절의 침묵 후, 소희는 휠체어를 돌려 장명원을 향했다."장명원 씨, 난 장명원 씨를 한 번도 탓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전에 장명원 씨가 구은서 때문에 나를 적대시했던 건 장명원 씨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였으니까 그랬겠죠. 우리가 친구라는 걸 모르기도 했고. 그러니 난 장명원 씨를 탓하지 않아요. 그리고 불곰에 대해서는, 나 오히려 장명원 씨한테 고마워하고 싶어요. 장명원 씨도 내가 불곰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했는지 잘 알잖......"소희의 말허리가 갑자기 끊겼다. 남자의 억눌린 목메는 소리가 들려와서.그녀는 장명원의 마음속에 한 아이가 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직하고 의리적이며 시비가 분명하고,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할 줄 아는 그런 아이.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정 때문에 남김없이 구은서를 감싸다가도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즉시 구은서와 선을 긋고,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는 그런 사람.그래서 그의 자책과 괴로움을 그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한참 후, 장명원이 냉정해지고 나서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저 반드시 서희 씨의 눈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소희가 듣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는 현실을 받아들인 후의 태연함이 역력했다."내가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혀 하느님이 나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걸 겁니다. 남은 생은 어둠 속에서 살아야하는 벌.""
심명이 냉소하며 물었다."설마 그 임구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까?""두려워하지 않는 거랑 적대시하는 건 별개의 일이야!"심명의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나 심지어 임구택과 연락도 안 돼. 장시원이 나한테 연락이 와서 너에게 전하더라군, 당장 소희에게서 떨어져라고.”심명이 하찮다는 듯 웃었다."임구택은 정말 자신이 모든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요. 그에게 전해 주세요. 소희는 이젠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 소희가 앞으로 누구와 있던 그가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다고요."말을 마치고 심명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의 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눈빛이 금세 어두워진 심명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임구택, 벌써 조급해 난건가?하지만 더 조급해 날 일이 아직 남았는걸?그는 몸을 돌려 소희 찾으러 갔다. 그러다 해당화 나무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간미연, 그리고 장명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희를 보았다. 소희의 희고 온화한 얼굴에는 느긋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차마 방해하고 싶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그렇게 잠시 서 있다 그는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소희에게 친구와 담소를 나눌 시간을 줄겸 그도 마침 처리할 일이 생겼으니.*늦게 심명은 장원으로 돌아와 소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소희는 하인의 시중이 필요없이 매번 젓가락으로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정확하게 집을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얼굴에서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 못챌 정도로.심명이 탕수물고기를 그녀 앞으로 밀며 웃었다."소희 착하지? 밥 먹고 약 먹자?"소희는 심명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말 똑바로 해.""어떡하지?"심명이 실눈을 뜨고 웃었다."네가 화난 모습조차도 이젠 너무 귀여워."소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담담하게 말했다."심명, 내일 나를 돌려보내줘. 나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왜?"심명이 듣더니 즉시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하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임구택은 성씨 가문, 노씨 가문, 심지어 진석까지 모두 뒤에서 심씨 그룹을 지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임구택은 하찮다는 듯 제재강도를 거듭 높여 심씨 그룹을 겨냥했다.임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강성의 주재였으니 뒤에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심씨 그룹 안팎에서는 여전히 각종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심명의 아버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심명은 죽어도 소희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심지어 부자 관계를 끊겠다는 얘기까지 오가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늦은 밤.임구택이 집에 돌아왔을 땐 시간이 이미 많이 늦었다.그러다 마침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소파에 놓여진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수신번호를 확인한 그의 눈에는 음울한 빛이 스쳤다. 그는 베란다로 걸어가면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 소희."임구택의 말투에서 소외감이 느껴졌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정말 영광이네,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소희가 담담하게 말했다."임구택, 우리 사이의 일은 심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더는 심씨 가문을 겨냥하지 말아줘.”순간, 임구택의 마음속에서 노기가 솟구쳤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심명이 너더러 나에게 사정하라고 한 거야, 아니면 네가 심명이 불쌍해서 이러는 거야? 소희, 넌 정말 대단해.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나와 사귈 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건드린 거야?"소희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한참이 지나서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심씨 가문을 놔줄 거야?""놔줘?"임구택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말투에는 서리가 껴있었다."심명을 떠나. 그리고 될수록 내 앞에도 나타나지 마. 네가 눈에 보이지 않고, 너의 소식이 들리지 않으면 나도 화 낼 일이 없겠지?"휴대폰 맞은편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미세한 숨소리만 들렸다. 휴대폰을 꼭 쥐고 있는 임구택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감히 심명을 위해 사
……이틀 후.오늘은 임구택의 생일이라고 구은서가 이른 아침부터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저녁에 보자고 약속했다.장시원은 진작 케이슬에 전세방을 예약했고,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케이슬에서 임구택의 생일을 축하했다.구운정의 복귀와 성연희의 폭로로 구은서의 가문과 사업은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회사에서는 더욱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겠다는 이유로 그녀의 모든 일정을 잠시 중단했다.그렇게 며칠 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구은서는 일을 삭감하고 정력과 시간을 모두 임구택을 되찾는 일에 퍼부겠다고 결정했다.그래서 임구택의 생일 당날, 그녀는 많은 신경을 써서 선물을 고르고 생일상을 차리고 저녁에 입을 옷을 골랐다.사업을 잃으면 어때, 임씨 대표님의 부인만 된다면 여전히 모든 여인들이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인생의 승자로 되는 건데.*같은 시각, 강성공항.개인 비행기장에서, 진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기분 전환하는 셈 치고, 쓸모없는 생각하지 마요. 졸업에 관한 일은 내가 처리해 줄게요. 그리고 사부님과 할아버지한테 당분간 비밀로 할 테고."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선배."진석은 그녀를 흘겨보고 가볍게 웃었다."이미 익숙해졌는걸요."소희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선배, 내가 선배에게 진 빚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나중에 갚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어요."바보!"진석은 반쯤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살을 어루만졌다."몸 잘 기르고, 일이 있으면 나에게 전화해요.""네!"바람이 건조한 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소희의 귀밑머리를 불어 날렸다. 빛을 잃은 눈은 고요했다."갈게요.""잘 다녀오세요!"진석은 천천히 일어나 직원이 그녀를 밀고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소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들어 팔만 휘두르며 진석과, 그리고 이 도시와 작별했다.그녀는 차오르는 시큰거림을 삼키고 어둠 속에서 평정심을 되찾았다.헬리
"왜서긴."성연희가 냉소하며 "전에 내가 드레스를 입어보러 가자고 했거든? 그런데 시간이 없대.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그의 회사에 갔지. 마침 회사에서 방금 계약한 연예인이 그의 다리에 앉아 있는 거야. 두 사람은 웃고 떠드느라 내가 거기에 서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라고 대답했다.그러면서 자조하듯 웃었다."소희야, 네 말이 맞아. 두 사람의 감정을 혼자서 유지하는 건 정말 너무 피곤해!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고, 결혼식도 취소했어."소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언제적 일이야?""네가 밀수에 가기 전. 하지만 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너에게 말하지 않았어."말하고 있는 성연희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두웠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 네가 걱정이 되어서 진작에 나가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떠나겠다니, 정말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거지. 우리의 이번 여행은 ‘즐거운 행성’여정이야. 우리 세계 여행 가자. 얼어 죽을 남자들은 다 꺼지라고! 남자들은 다 인간 쓰레기야.""저기요, 저기요!"심명이 불쾌해서 말했다."나 아직 여기에 있다고. 난 여태껏 소희에겐 일편단심이었어. 한번도 변해본 적이 없다고.""네가 감히 소희에게 못되게 굴었다간, 도중에 너를 밖으로 걷어차버릴 거야!"성연희가 냉소하며 말했다.심명이 듣더니 숨을 내쉬며 키득거렸다."왠지 지금 네가 남자한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나와 소희를 데리고 같이 죽으려고 할 작정인 거 같은데?""나와 소희야말로 진심이야. 넌 쓸데없는 사람이라고. 사라지는것도 맞는 일이야."성연희가 다시 말했다."난 몰라. 아무튼 난 소희 따라 갈거야!"심명이 뻔뻔스러우면서도 또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소희에게 끼어들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그럼 네가 우리 소희에게 잘해줬던 걸 봐서 한 번만 태워줄게."성연희가 웃으며 조종석으로 돌아가 똑바로 앉았다."똑바로 앉아, 이륙할
임구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손에 들린 남색 벨벳 상자를 보며 물었다."언제 너에게 준 거야?"임유민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십여 일이 되었을걸요. 먼 곳에 한 번 갔다 와야 한다면서,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대신 전해 달하라고 했어요."임구택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그는 바로 손을 뻗어 상자를 건네받았다.상자는 가벼운데,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대체 무슨 뜻이지?그녀의 성격으로는 헤어진 사람에게 선물을 줄 리가 없는데.열흘 전이라고? 어디로 간 거지?마음이 어수선해진 임구택은 더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선물상자를 들고 위층으로 걸어갔다.침실로 돌아온 그는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그렇게 손에 든 상자를 한참 보다가 위의 리본을 천천히 풀었다.상자를 여는 과정에서 그는 의외로 약간 긴장되었다.그에게 무엇을 준비했을까?임유민의 손을 빌려 그에게 선물을 주는건, 화해하려는 걸까?그의 끊임없는 추측하에 상자가 열렸다. 상자속에는 영어로 된 증서가 있었다. 결혼증이었다.더욱 어리둥절해졌다.증서를 열어보니 안에는 그와 소희의 이름, 그리고 4년 전으로 적혀 있는 결혼 날짜가 있었다.임구택은 순간 멍해졌다.내가 언제 소희와 결혼한 적이 있었던가?난 딱 한 번, 그것도 소씨 가문의 딸과 혼인을 맺었었는데?소정인의 딸, 소희.임구택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휴대폰을 꺼내 소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고 소정인의 공손한 말투가 들려왔다."임 대표님?”임구택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평정심을 되찾은 후 덤덤하게 물었다."당신 딸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소정인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제 딸? 소동이요?"임구택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물었다."그럼 나와 결혼한 건 누구입니까?"소정인은 그제야 알아듣고 바로 대답했다."임 대표님과 결혼한 건 저의 다른 딸, 소희입니다.”임구택의 눈동자가 갑자기 움츠러들더니, 휴대폰이 바로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