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아주 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부모님과 오정태, 그리고 임종현도 나타났다. 그들은 그녀의 주위에 몰려들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배정우는 그녀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귀여워.”꿈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입가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더니 그제야 자신의 두 볼이 흠뻑 젖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분명 행복한 순간들이잖아. 근데 왜 울고 있는 거지?'이때 흰색 치마를 입은 연다인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김현정은 얼른 휴지를 뽑아 임슬기의 손바닥을 닦아주고는 약을 꺼내 임슬기에게 건넸다.“언니, 얼른 약 먹어요.”약을 먹고 난 후 임슬기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더는 본가에서 지냈던 시간을 떠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현정도 오래 머무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녀가 죽을 먹는 모습을 확인하곤 얼른 물건들을 챙겨 나가려 했다. 김현정이 떠난 지 2분도 되지 않아 배정우가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느껴지는 온기에 미간을 구긴 채 흉흉한 눈빛으로 임슬기를 노려보았다.“방금 누가 왔었지?”“아무도 안 왔었어.”“임슬기
마이바흐 뒷좌석에 앉은 배정우는 창밖으로 번뜩이는 번개에 순간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권 비서, 17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권민은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배정우를 힐끗 보았다.“대표님, 정말로 기억 안 나시는 겁니까?”“중요한 일인가?”“네. 17년 전에 사모님이 비가 내리던 날에 납치당했었습니다. 납치범들이 사모님을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 가둬버렸다고 했습니다.”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가슴이 아팠다. 부단히 임슬기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신경 쓰이고 걱정되었다. 이때 창밖으로 비가
진승윤은 울고 있는 김현정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던지라 놀라고 말았고 서둘러 물었다.“거기 어디예요?”김현정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너무도 오진 곳이었던지라 특정 지어 말할 것이 없었다.“저... 저도 모르겠어요. 일단 위치 공유해드릴게요.”“그래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진승윤은 바로 실력 좋은 자물쇠 기사님을 불러 함께 김현정이 알려준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던지라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그들은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승윤은 속도를 늦추지 않
“내 전화를 받으라고 해!”진승윤은 1초간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네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진 변호사님, 정우예요?”진승윤은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에 소리가 새어 들어가지 않게 손으로 막았다.“아니에요. 업무에 관한 거예요.”임슬기는 입술을 틀어 물며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변호사님, 저도 피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제게 넘겨주세요. 제가 정우와 얘기해볼게요.”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대치했다. 결국 진승윤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임슬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고개를
어젯밤 반도로 돌아온 배정우는 거실에 쓰러진 연다인을 발견했다. 피도 흐르고 있었던지라 그는 하는 수 없이 연다인을 병원으로 데려다줄 수밖에 없었다. 연다인의 상태가 나아지고 나서야 그는 밤에 병원에서 나와 임슬기를 가둔 오두막으로 갔다. 원래는 임슬기를 구해주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그가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너덜너덜 뜯겨 있었고 바닥엔 바퀴 자국이 있었으며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바로 임슬기에게 연락했지만 그에게 들려온 것은 자신을 증오한다는 말뿐이었다.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주먹으로 창문을 내리쳤다. 순식
배정우는 마지못해 하얀 종이에 빼곡히 적힌 글씨들을 보았다. 분명 전부 다 아는 글이었지만 이어져 있으니 이상하게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다소 의심하는 눈길로 진승윤을 보았다.“무슨 뜻이야? 보고서를 위조한 거냐?”“배정우, 넌 멍청해진 것도 모자라 이젠 글도 못 알아보는 거냐?”진승윤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지난번에 연다인이 본인 스스로 임신했는데 슬기 씨 때문에 유산했다고 했지? 하지만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봐. 연다인은 3년 전에 이미 불임 진단을 받았어.”“그럴 리가 없어. 다인이는 분명...”“분명 뭐. 분
임씨 가문 본가.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도 임슬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배정우가 어쩌면 자신을 찾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의 곁엔 연다인이 있었고 그녀에게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배정우가 자신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정원을 산책하고 나니 머릿속에는 행복했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이 떠올랐다.‘만약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때 누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임슬기?”고개를 돌린 그녀는 한참 멍하니 보다가 입을 열었다.“송재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