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임슬기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진승윤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당황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진 변호사님의 약혼녀라고요?”“맞아요. 승윤 씨가 얘기 안 했어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는 진 변호사님의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않았거든요.”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진승윤의 관계는 오직 배정우로 인해 얽힌 것이었고 함께하는 일이라 해봐야 사건을 조사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김서우의 눈빛에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경쟁자를 바라볼 때의 본능적인 경계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깁스를 한 손을 든 채 진승윤이 걸어 들어왔다.“방금 보낸 문자, 무슨 뜻이에요?”아무리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도 임슬기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진승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그녀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김서우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말 그대로예요.”“말 그대로?”진승윤이 눈살을 찌푸렸다.“나랑 슬기 씨 생사를 함께한 친구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한테 이러는 거예요?”임슬기는 순간 멍해지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친구...’사실 그녀에게 이렇게 생사
‘난리? 내가 언제 난리를 쳤는데?’그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뿐인데 그것도 난리라고 할 수 있을까?“난 지금 환자이자 임산부야. 제발 좀 쉬게 해줘.”그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임슬기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 생각했지만 곧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쉬게 해달라고? 아니겠지. 남자 만나러 가는 걸 내가 방해한 거겠지!”“배정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헛소리? 네가 병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너...”배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는 화가 나서 전화를
임슬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키스 당했고 필사적으로 배정우의 가슴을 밀쳐냈다.분명 가장 친밀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마음에는 설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역겨울 뿐이었다.연다인을 건드린 이 남자가 더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약했고 폭주한 배정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의 행동이 점점 도를 지나치자 임슬기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근처에 있던 재떨이를 움켜쥐고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너 미쳤어?”통증에 신음하며 그녀를 놓은 배정우가 머리를 감싼 채 휘청거렸다.침대 옆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굳어버렸다.배정우의 차가운 시선을 감지한 임슬기는 순간 멈칫하더니 황급히 손을 놓았다.‘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겨우 이런 작은 상처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힌 남자를 걱정한다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고 비굴해진 거지?’그렇게 생각한 순간 배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슬기가 먼저 냉정하게 말했다.“됐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배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조금 전까진 그를 욕하더니,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어떻게 이렇게
‘교통사고?’임슬기는 곧바로 배정우의 이마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설마 그게 교통사고로 생긴 상처였어? 그런데 왜 말 못 해?’곧이어 권민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사실 대표님은 사모님을 사랑합니다. 다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에요. 그날 사모님께서 교통사고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신 후 대표님께서 직접 원성시에 가서 단서를 찾고 계십니다. 낮에는 회사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오정태 씨 사건을 조사하러 다니시느라 너무 무리하셨죠. 그 피로가 쌓여서 오늘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걱정하
권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대표님, 지금 자신과 싸우고 계신 겁니다.”아마도 제삼자의 입장이라 더 명확하게 보였을 것이다. 권민이 보기엔 배정우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임슬기였다.연다인은 단지 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사건을 부추겼지만 배정우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고마움’뿐이었다. 사랑은커녕 좋아하는 감정조차 없었다.배정우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차가 출발하자 배정우는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그저 연기가
임슬기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네?”“김서우는 내 약혼녀가 아니라고요.”진승윤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야윈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왜 이걸 굳이 나에게 설명하는 거지?’“아, 네.”임슬기는 어색하게 굳은 채 짧게 대답했다.‘어제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사람이 오늘은 이렇게 부드럽다니... 도대체 현정이가 무슨 말을 한 거야?’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승윤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을 내놓았다.“현정 씨가 나한테 알려준 건, 슬기 씨가 왜 나와 관계를 끊으려 했는지
“두 분이신가요?”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임슬기 옆에 앉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우리랑 같이 한잔할래요?”그 말이 끝나자 다른 남자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임슬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정이 먼저 나섰다.“좋죠. 근데 저 술 좀 센데 괜찮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 두 분 술은 제가 쏘겠습니다. 마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세요.”김현정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좋아요, 위스키로 열 잔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열 잔의 위스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게임 하나 하죠. 진
임슬기는 근처 공원에서 김현정을 찾았다.차가운 밤바람 속 한 가냘픈 그림자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예전에 날씨가 좋을 때면 자주 함께 산책하던 곳이었다.가끔은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곤 했었다. 어느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임슬기는 두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김현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인근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김현정을 불렀다.“현정아.”김현정은 임슬기를 보자마자 일어나 그녀의
육문주는 문을 열어젖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현정 씨, 그 아이 우리 아이에요.”김현정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그날 밤 육문주는 분명 다른 여자와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일 수 있단 말인가?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임슬기 역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육문주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임슬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근데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강재호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그의 삶은 이미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진작에 잊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임슬기에게는 늘 고마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도 그녀였는데, 이제는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다니, 이건 그에게 너무 큰 행운이었다.하지만...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는 어렵게 말했다.“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돈 낭비할 필요 없어요. 내 인생은 어차피...”“재호야, 네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