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굳어버렸다.배정우의 차가운 시선을 감지한 임슬기는 순간 멈칫하더니 황급히 손을 놓았다.‘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겨우 이런 작은 상처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힌 남자를 걱정한다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고 비굴해진 거지?’그렇게 생각한 순간 배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슬기가 먼저 냉정하게 말했다.“됐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배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조금 전까진 그를 욕하더니,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어떻게 이렇게
‘교통사고?’임슬기는 곧바로 배정우의 이마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설마 그게 교통사고로 생긴 상처였어? 그런데 왜 말 못 해?’곧이어 권민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사실 대표님은 사모님을 사랑합니다. 다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에요. 그날 사모님께서 교통사고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신 후 대표님께서 직접 원성시에 가서 단서를 찾고 계십니다. 낮에는 회사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오정태 씨 사건을 조사하러 다니시느라 너무 무리하셨죠. 그 피로가 쌓여서 오늘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걱정하
권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대표님, 지금 자신과 싸우고 계신 겁니다.”아마도 제삼자의 입장이라 더 명확하게 보였을 것이다. 권민이 보기엔 배정우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임슬기였다.연다인은 단지 이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사건을 부추겼지만 배정우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고마움’뿐이었다. 사랑은커녕 좋아하는 감정조차 없었다.배정우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차가 출발하자 배정우는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그저 연기가
임슬기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네?”“김서우는 내 약혼녀가 아니라고요.”진승윤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야윈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왜 이걸 굳이 나에게 설명하는 거지?’“아, 네.”임슬기는 어색하게 굳은 채 짧게 대답했다.‘어제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사람이 오늘은 이렇게 부드럽다니... 도대체 현정이가 무슨 말을 한 거야?’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승윤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을 내놓았다.“현정 씨가 나한테 알려준 건, 슬기 씨가 왜 나와 관계를 끊으려 했는지
예전에도 연다인이 정한 장소에서 만났지만 결국엔 항상 문제가 생겼다. 이번만큼은 어떤 변수도 허락할 수 없었다.임슬기의 목표는 오직 하나, 오정태의 시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더 이상 떠도는 일이 없도록 이제라도 오정태를 평온하게 모셔야 했다.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연다인은 금세 날카롭게 반응했다.“임슬기, 주도권은 내 손에 있어. 잊지 마.”임슬기가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착각하는 것 같은데, 주도권은 내 손에 있어. 네가 배정우의 아내가 되고 싶다면 내가 이혼 서류에 서명해야 하지 않겠어? 집사님은 내게 압박을 가하기
“연다인,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내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약속한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안 지켰잖아.”연다인은 이혼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임슬기를 매섭게 노려봤다.“게다가 그동안 넌 계속 날 열받게 했어.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다고.”그 말을 듣자 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 쪽을 흘끗 쳐다봤다.“뭐 하려는 거야?”연다인은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내더니 렌즈를 임슬기를 향해 들이댔다.“지금 당장 여기서 네 죄를 인정해.”“뭐?”“이 영상만 찍으면 네가 그렇게 찾는 그 늙은이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안 그러면
임슬기는 진통제를 먹은 후 호텔에서 30분 정도 더 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휴대폰을 꺼내보니 김현정의 전화가 열 통도 넘게 걸려 와 있었다.아직 오정태의 시신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라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미어졌지만 김현정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임슬기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슬기 언니, 어디예요? 왜 전화 안 받았어요?”“집에 냄새가 너무 심해서 좀 나와서 산책했어. 금방 들어갈 거야.”다행히 김현정은 의심하지 않았다.“네, 그럴 만도 해요. 어젯밤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사람
배정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손등엔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마치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이게 무슨 뜻이지? 후회한다고? 무슨 자격으로 후회하는데?’“임슬기, 주제 파악 좀 해!”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주제 파악하라고? 어쩜 쓰레기 같은 인간끼리 하는 말까지 똑같지.’그런데 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처음부터 끝까지 임슬기는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나를 모욕하려고 온 거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낫겠어.”말을 마치자마자 임슬기는 진짜로 문을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언니가 나 대신 전해줘요. 그냥...”깊게 숨을 들이쉰 김현정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돌아서서 임슬기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그 사람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눈썹을 찌푸린 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김현정과 육문주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들 사이엔 원망도, 오해도 없었다. 오직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었다.어떻게 그녀가 그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그들은 자신과 배정우처럼 넘
“현정 씨,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 네?”육문주가 다가오며 애타게 말했다. 하지만 김현정은 옆에 있던 과도 하나를 집어 들더니, 손목에 바짝 갖다 댄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꺼져! 더 다가오면 진짜 그어버릴 거야.”“현정아!”임슬기가 놀라서 곧장 달려들어 과도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육문주 쪽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문주 씨, 나가요. 현정이가 진정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육문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임슬기는 과도를 방 한구
임슬기는 여전히 김현정이 걱정돼 매일 병원에 머물며 곁을 지켰다.하루하루 달래고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자 삼사일쯤 지나서는 김현정의 상태도 많이 나아졌다. 웃음도 점점 많아졌고 말수도 늘었다.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던 찰나 연다인이 불쑥 병실에 나타났다.병실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보며 연다인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임슬기, 정우가 전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호사 붙여줬거든? 네가 들고 온 그 내용증명? 그냥 휴지 조각일 뿐이야.”그 목소리를 들은 임슬기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
임슬기는 김현정의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바보야, 울고 싶을 땐 내 뒤로 숨어.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어. 알겠지?”“네, 알아요.”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낮게 흐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재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눈치 보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가려 일어섰지만, 하필 그 순간 임슬기의 눈에 띄고 말았다.임슬기는 손등으로 얼굴의 눈물을 대충 훔치며 강재호를 바라봤다.“아, 미안해요. 잠깐 잊고 있었어요.”“슬기 씨, 그런 말씀 마세요.”강재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