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임슬기는 배정우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소리쳤다.“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슬기 언니, 저 김현정이에요.”임슬기는 멈칫하더니 눈물을 닦고 감정을 억누른 채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김현정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붙잡은 채 실성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임슬기는 무력한 자신이 싫었고 원망스러웠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얼마나 울었을까, 울다가 지친 그녀는 김현정을 놓아주더니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약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온 임슬기는 걱정스
임슬기가 말을 마치자,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진승윤의 침묵에 불안해진 임슬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승윤 씨, 지난번 병원에서 우리가 생사를 함께한 동지라고 했잖아요.”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나에게 친구는 무엇보다 소중해요. 승윤 씨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복수 같은 건 포기할 거예요. 알겠어요?”연다인을 상대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임슬기 자신이었다. 만약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한다면, 그건 진승윤이 아닌 자신의 생명이어야 했다.지금껏 곁을 지켜준 건 진승윤과 김현정뿐이었으니
몇 번째로 오는지도 모를 익숙한 그곳에 발을 들이자, 임슬기는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가해자 처지가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 찾아온 것이라 마음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철문 앞에 서자, 단 하루 만에 연다인은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비싼 옷은 어제와 같았지만, 머리는 흐트러지고 화장은 번져 경찰의 추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연다인, 겨우 이거로 부족하지. 엄마의 죽음, 집사님이 받은 고통 그리고 동생의 인생까지. 지금 네가 받는 이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이를 악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서서, 차갑고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오정태의 장례식이니만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배정우는 손에 든 꽃을 묘비 앞에 놓고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끝나면 얘기 좀 해.”그의 말에 임슬기의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설마 연다인을 변호하러 온 건가?’“시간 없어.”거절당한 배정우는 마치 무심코 던진 말인 양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돌
“배정우 씨, 여기 있었네요. 그럼, 아내를 좀 잘 다스려요. 2년 전 같은 스캔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물론 차희라도 배정우가 두렵기는 했지만, 딸을 위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러세요? 2년 전 제 아내가 누명을 썼던 건 모르셨나 보네요?”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승윤이는 내 친구인데, 제 아내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단순히 체면을 위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건지 의아해졌다.순간 임
‘은혜를 갚는다고?’비록 임슬기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김현정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마침, 김현정과 눈이 마주친 임슬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진승윤, 그래서 보내야만 하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명인 시에 머무르면 배정우든, 연다인이든, 김씨 가문이든 김현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김현정은 임슬기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결국 임슬기 대신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만약
“배정우 씨.”갑자기 김서우가 배정우에게 다가와 임슬기의 말을 가로막았다.“정말 다인이를 버리는 거예요? 만나러 갔었는데 애가 완전히 야위어 있었다고요.”배정우는 김서우를 무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임슬기를 추궁했다.“뭐가 없다고?”김서우의 등장에 정신이 번쩍 든 임슬기는 배정우의 질문과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방금 임슬기는 배정우에게 자신도 신장 하나가 없으며, 그것도 연다인과 같은 위치라는 사실을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폐암도 믿지 않는 그가 이를 믿을 리 없었다.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비웃었다.“뇌
배정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떠나려는 찰나 김서우는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배정우 씨, 지금 연다인한테 가는 거예요?”“손 놓으시죠?”배정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서우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뒤따라가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다인이는 배정우 씨한테 진심이었어요.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면 안 되죠.”배정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김서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시죠.”말을 마친 배정우는 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