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유환은 능글맞게 웃으며 오히려 여유롭게 굴었다. 장하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자리에 앉아 곧바로 노트를 꺼내 들었다.
“다음 타석에선 기어코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겠어.”
이를 악물며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장하늘을 보며, 선배들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장하늘이 의외로 뒤끝이 있다며 시원한 음료와 타월을 챙겨주며 달래주기에 바빴다.
“우리 안방마님이 제대로 뿔나셨네.”
“그래,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긴 해. 저 배터리, 생각보다 훨씬 노련하거든.”“역시 본선 무대는 공기부터 다르네.”그때, 유환이 보는 이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인 미소를 흘리더니 자신의 배트를 집어 들었다.
“장하늘,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어차피 이 경기의 승자는 우리니까.”
Rr-, Rr-, Rr-.유준철은 지금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유도완이 너무 유환을 긁어대서 어디로 튈지 몰라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소파에 유준철과 마주 앉은 유도완은 계속 유환에게 통화를 시도하는 중이었다.김 비서 말로는 사라졌다고 하던데.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라 비행기도 뜨기 힘들뿐더러, 어디로 이동하기도 만만치 않으니 결국 집으로 돌아가겠지 내심 기대는 한 그였다.어쨌든 올해는 유환에게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한 해였다. 전생을 기억하는 유도완의 말에 의하면, 유환이 죽는 시점이 점점 빨라져 올해를 무사히 넘겨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유환과 통화가 연결되자, 유도완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유환아! 너 지금 어디야! 왜 이 아비 전화를 안 받아?”평범한 대답이 들릴 거라 기대는 안 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첫마디는 대뜸 또 듣기 싫은 이름부터 귓가에 닿았다.-혹시 아버지, 장하늘에게 뭐 연락한 것 있습니까?낮게 깔린 유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거실 전체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어?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냐.”-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유환의 외침이 고막을 찢을 듯 터져 나왔다. 유도완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준철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헛기침을 뱉으며 언성을 높였다.“뭐! 아비가 아들 친구에게 연락 좀 할 수도 있지!”-두 분 지금 제 인생을 두고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휴대전화 스피커 밖으로 유환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튀어나오자 유준철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유준철은 숨을 들이켜며 원망 가득한 눈으로 유도완을 쏘아보았다
장하늘이 자리를 비운 지 한참이 지나자, 유환은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오늘따라 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녀석의 표정, 자꾸만 제 눈치를 살피며 헤매던 그 위태로운 시선이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경기 내용도 완벽했고 결승 상대도 충분히 승산 있는 팀이라 분위기는 최고조였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정체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장하늘 이 녀석, 어디 갔지? 또 귀엽게 양치하러 갔나.”유환은 장난스럽게 뇌까렸으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이미 서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가글을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화장실 그 어디에도 장하늘의 흔적은 없었다. 유환은 초조하게 굳어진 걸음으로 카운터 사장에게 다가갔다.“제 친구가 화장실 간 것 같은데 안 보여서요. 잘 웃고 인물 좋아서 아이돌 같다고 소문난 녀석인데, 혹시 못 보셨나요?”장하늘을 설명하는 제 목소리에 쓸데없이 열이 올랐지만, 그보다 심장이 터질 듯 불길하게 날뛰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사장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유환의 심장을 단숨에 얼려버렸다.“어머, 그 예쁘장한 선수? 오늘 계산 다 하고 간 그 기특한 학생 찾나 보네요.”유환의 목구멍으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계산? 아직 파티가 한창인데 벌써 계산을 했다고?“계산을 이미 했다고요?”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술을 더 시키는 부원들도 있었고, 저 멀리선 볶음밥을 추가 주문하는 소리도 활기차게 들려오고 있었다.“그 학생이 음식값에 웃돈까지 넉넉히 얹어두고 좀 전에 택시 불러서 떠났어요.”순간 유환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택시를 불러 떠나다니. 자신을 두고, 이 한밤중에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상상
장하늘은 주변 사람들의 들뜬 웃음소리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건드리면 금세 산산조각 날 유리 파편처럼 위태로웠다.손가락 끝으로 불이 꺼진 휴대전화 화면을 의미 없이 톡톡 두드리는 동작이 극에 달한 초조함을 대변했다.사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이후, 장하늘의 마음은 믿음과 불신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유환과 나누는 달콤한 순간들은 혀끝에 감기는 꿀처럼 황홀한 행복이었으나, 동시에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잔혹한 선택지가 끊임없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현생의 궤도를 뒤틀어서라도 그를 살리고 싶다는 열망이 머릿속에서 서슬 퍼런 칼날처럼 번뜩였다.그리고 마침내, 그 처절한 망설임에 쐐기를 박는 문자가 도착했다.[장하늘 학생,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네만 나에게 유환이는 소중한 아들이자 우리 집안의 대를 이을 귀한 존재야. 처음엔 헤어지면 아프겠지.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될 일 아니겠나.][나이 든 사람의 황당한 소리라 치부해도 좋네. 하지만 내가 앞날을 내다본다는 용한 이를 만나 알아보니, 자네와 우리 유환이는 지독한 악연이라더군. 함께 있으면 둘 다 단명할 팔자라고 해. 야구도 절대 시키지 말라고 했어.][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미안하네. 돈이든 명예든, 미국에서의 야구 진로든 원하는 건 무엇이든 지원하겠네. 부디 유환이 곁을 떠나 주게. 올해가 가장 위험하다고 들었어. 유환이가 그저 마음 잡고 경영 수업을 받게 도와줘.]유도완이 보낸 문자를 내려다보는 장하늘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점쟁이의 예언이든, 전생을 꿰뚫어 보는 이의 경고든 상관없었다. 그 말들이 장하늘의 가슴을 이토록 잔인하게 난도질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무치는 진실이기 때문이었다.안 그래도 벼랑 끝에서 갈등하던 차였다. 장하늘 스스로도 이
샤워를 마친 부원들의 발길은 약속이라도 한 듯 녹두거리 춘천닭갈비집으로 향했다.장하늘은 유환의 차에 몸을 싣고, 어쩌면 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짧은 드라이브를 눈에 담았다.양재의 정체 구간을 지나 예술의 전당 앞 신호 대기에 걸렸을 때, 장하늘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은 유환의 옆얼굴을 시리도록 투영하게 바라보았다.“유환아, 어깨 괜찮은 거 맞지?”결국 아이싱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끝내버린 녀석이 걱정되어 장하늘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유환이 전광석화처럼 고개를 돌리더니, 장하늘의 입술을 가차 없이 집어삼켰다.“자꾸 그렇게 야한 눈으로 쳐다볼 거야?”뜬금없는 말에 장하늘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유환의 어깨를 밀쳐냈다.“걱정하는 눈이 어디가 야하다는 거야?”유환은 대답 대신 기분 좋게 낮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돌연 차를 좌회전시켜 예술의 전당 주차장 깊숙한 곳으로 꺾어 들어갔다.“어? 야, 어디 가!”차는 점점 더 어두운 산기슭 아래, 인적조차 드문 은밀한 공간에 멈춰 섰다.묘한 긴장감이 장하늘의 아랫도리를 묵직하게 조여왔다.“이건 다 네 탓이야. 방금 씻고 나와선 상큼한 향기 풀풀 풍기면서 그런 눈으로 유혹하니까.”그의 논리에는 기적 같은 모순이 서려 있었지만, 장하늘은 반박할 힘을 잃었다.유환의 다급한 손끝이 제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이성은 눈 녹듯 허물어졌다. 오늘이 마지막 스킨십일지도 모른다는 잔혹한 절박함이 장하늘의 남은 이성마저 마비시켜 버렸다.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금 질척하게 엉겼다. 야성적인 매력으로 따지자면 본래 유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민트향이
유환과 오붓하게 데이트도 하고 소중한 추억도 쌓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잔인했다.하필이면 춘천이라니. 전생의 유환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 또한 영혼이 조각나듯 기억을 잃어버렸던 그 저주받은 핏빛 무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장하늘은 타들어 가는 마른침을 삼키며 본심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유환의 탄탄한 등을 가볍게 툭 쳤다.“유환아, 5월은 가정의 달이잖아. 우선은······ 어른들께 충실해야지.”나직하게 떨리는 목소리 뒤로 '그러니 제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가자고 하지 마'라는 애원이 숨어 있었다.그러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유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정색하며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또다시 집안의 압박이 나타나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거냐는 밀어내기로 들렸는지, 그의 깊은 눈빛이 서운함과 차가움으로 얼룩졌다.“도S 안방마님이 아주 나를 제대로 한 방 먹이네. 미안해서 더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장하늘은 누가 도S냐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지만, 밀려드는 통증에 가슴이 저려와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서둘러 걸어 나갔다.유환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자 관중석에서는 떠나갈 듯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5회에도 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는 건, 이 경기를 완봉승으로 단숨에 끝장내겠다는 에이스의 강력한 의지였다.야구팬들은 새로운 슈퍼스타의 탄생을 목격하며 열광했다.장하늘은 귀를 먹먹하게 채우는 이 눈부신 광경을 제 생의 마지막 풍경인 듯 눈에 담았다.“유환아, 이렇게 마운드에 서 있으니 정말 좋지?”그의 나지막한
장하늘은 유환을 바라보자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피곤해서 좀 늦었어.”대충 대꾸를 하고 고개를 돌리자, 유환이 다시금 다가왔다.“어디 아픈 건 아니고?”주변의 서정우와 유경호가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유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환은 역시 이런 녀석이었다. 그는 글러브를 바닥에 툭 떨어뜨리더니 장하늘의 이마에 냅다 손을 올렸다.“컨디션 안 좋았던 거야? 미안.”애써 딱딱하게 굴려던 장하늘의 가시 돋친 방어막이 유환의 다정함 앞에서 허무하게 허물어졌다.스스로를 책망하며 뻣뻣하게 굴다가도 결국 본심을 드러내고 마는 유환을 보며, 정작 먼저 무너진 것은 장하늘이었다.“너야말로 안 올 줄 알았는데.”그 말에 유환의 귓불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쑥스러운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먼 그라운드로 돌렸다. 저 멀리 오늘의 상대인 L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모습이 보였다.“중요한 경기가 있는데 내가 왜 안 와.”“바쁘다길래.”“진짜 미안하다. 도저히 면목이 없어서.”유환이 찰나의 순간 주춤했다. 장하늘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무도 평온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히려 사흘간 ‘별일’이 아주 많았음을 증하고 있었다.장하늘은 묵직한 미트를 끼며 시선을 잔디 위로 던졌다. 외야의 초록빛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선명했다.“오늘 경기 잘하자.”“당연하지, 장하늘. 오늘은 너 절대 혼자 안 둬.”장하늘은 쓰게 웃었다. 미트로 유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것
대한종합병원 응급실.유환의 신속한 조치 덕분에 장하늘은 곧바로 서정우와 유경호를 마주할 수 있었다.서정우는 갑작스러운 복통과 호흡 곤란을 동반한 기이한 쇼크 상태에 빠져 긴급 검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 중환자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유환은 서정우가 깨어나면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병원 측에 지시해 VIP 병실을 미리 확보해 두었다. U그룹 소유의 병원답게, 유환의 등장은 서정우의 처치 우선순위를 단숨에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위력을 발휘했다.
하긴, 이제 장하늘은 유환의 불안증에 더 이상 불을 지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굴고, 녀석에게 흉포한 불안함만 안겨 준 데다가 오늘처럼 제 앞에서 픽 쓰러지기까지 해 버렸으니 유환의 속이 얼마나 까맣게 피폐해졌을까 싶었다.유환이 가장 극도로 싫어하는 유약한 소리였다. 마치 마지막을 고하는 처연한 유언처럼 제 미래를 걱정하며 선을 긋는 장하늘의 오랜 습관에 유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둡고 사납게 가라앉았다.녀석은 장하늘의 쓸쓸한 입술을 부
유환이 선전포고를 하듯 그리 말하자, 장하늘은 속내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뭘 저리도 당당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지. 유환의 포식자 같은 눈빛만 봐도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도 남을 분위기였다.“뭐? 방까지 바꿨다고?”장하늘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지만, 유환은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현신이 준 간식 봉투를 장하늘의 손에 꽉 쥐여주었다.“많이 먹어두고 기운 좀 비축해 놔. 오늘 밤에 제대로 힘을 쓰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서정우의 감각은 조기범과는 또 다른 결의 영민함을 풍겼다.유경호는 홈플레이트에 앉아 더그아웃에 있는 장하늘과 유환을 슬쩍 곁눈질했다. 저들은 이제 야구 천재를 넘어선 '괴물'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해 보였다.비록 아마추어 동아리 팀이라 해도, 엘리트 선수들로 구성된 명문 팀들을 상대로 이런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금 전까지 마운드를 지켰던 유환은 상대 팀에게 17점을 뽑아내는 동안 단 한 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피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