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By:  윤옥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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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에도우즈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인터폰을 누르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문 앞에 정지된 화면처럼 서서 안쪽의 기척을 기다리는 듯했다. 진은 문고리를 잡았다가 잠시 멈췄다. 금속의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진은 문을 열었다. "왜 안 들어와요." "부르지 않으셨잖아요." "부르고 있잖아요. 지금. 문을 열었다는 건 들어오라는 뜻 아닌가요." "그건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냥 열어준 거지." 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데프의 젖은 셔츠 소매 너머 손목을 잡았다. "이게 부르는 거예요.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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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화이트 채플 23번지. 오전 7시 12분.

런던의 새벽은 언제나 불쾌한 습기를 머금고 시작된다. 낡은 벽돌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비릿한 철분 냄새를 실어왔다. 폴리스 라인 너머, 좁은 골목 끝에 놓인 시신은 기괴할 정도로 정돈된 모습이었다.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 수석 프로파일러, 진 크로스는 습관적으로 라텍스 장갑을 고쳐 끼며 시신 앞에 무릎을 굽혔다.

“박사님,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뒤에 서 있던 형사가 헛구역질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피해자의 왼쪽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점 너머 뼈의 단면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파인 상처. 그 절개각은 정확히 47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본인조차 인지하기 힘든 찰나의 진동이었으나, 자신의 심박이 기형적으로 솟구치는 것으로 알아차렸다. - 진은 그 각도를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문의 깊숙한 수납장 안쪽 낡은 양피지 문서에서 보았던 각도. 1888년, 화이트채플의 어둠 속에서 기록된 ‘그’의 유산. 잭 더 리퍼의 후손이라는 낙인은 진의 혈관 속에 저주처럼 흐르고 있었다. 230년 전의 악몽이 현대의 런던 한복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보안팀이 1급 보고 현장에 왜 들어와 있죠.”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등 뒤로 낯선 기척이 다가와 멈춘 탓이었다. 구두굽이 젖은 아스팔트를 짓누르는 소리가 규칙적이고 단단했다.

“경비 구역 설정 때문입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신을 등지고 선 그의 앞에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끝까지 읽어 내렸다. 데프 에도우즈. 직함보다 그 너머의 눈빛이 오래 남았다.

그는 시신이 아니라 진의 손을 보았다. 처음부터, 그리고 계속해서. 장갑 너머로 숨기려 했던 그 미세한 떨림을 쫓는 시선이었다. 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한 어조로 관찰 결과를 내뱉었다.

“현장 보존 구역이 좁네요. 보안팀 수준이 의심될 정도로.”

“크로스 박사님이 왜 손을 떨고 계셨는지도,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데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나고 그의 체온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진은 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현장을 벗어났다. 시선이 등 뒤에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기분이 아니라 사실임을, 진은 알고 있었다.

***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 오후 2시 40분.

연구실의 블라인드는 굳게 닫혀 있었다. 진은 개인 서버에 접속해 암호화된 두 개의 파일을 나란히 띄웠다. 왼쪽은 오늘 아침 현장에서 찍은 피해자의 손목 사진, 오른쪽은 가문의 문서에서 스캔한 1888년의 기록물이었다.

분석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채웠다. 화면 위로 붉은색 선들이 겹쳐지며 수치가 계산되었다.

[일치율 67%]

단순한 모방 범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해부학적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절개였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잭 더 리퍼의 패턴이 다시 나타났다고.

그러나 진의 손가락은 보고서 작성 버튼이 아닌, 창 닫기 버튼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보고할 수 없었다. 이 각도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자신이 누구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증명하는 꼴이었으니까.

진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금속성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미상.

[ 손이 떨렸죠? ]

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현장에서 그 떨림을 본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 한 명이 누구인지, 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묻지 않기로 했다. 거짓말을 두 번 들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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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화이트 채플 23번지. 오전 7시 12분. 런던의 새벽은 언제나 불쾌한 습기를 머금고 시작된다. 낡은 벽돌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비릿한 철분 냄새를 실어왔다. 폴리스 라인 너머, 좁은 골목 끝에 놓인 시신은 기괴할 정도로 정돈된 모습이었다.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 수석 프로파일러, 진 크로스는 습관적으로 라텍스 장갑을 고쳐 끼며 시신 앞에 무릎을 굽혔다. “박사님,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뒤에 서 있던 형사가 헛구역질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 피해자의 왼쪽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살점 너머 뼈의 단면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파인 상처. 그 절개각은 정확히 47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본인조차 인지하기 힘든 찰나의 진동이었으나, 자신의 심박이 기형적으로 솟구치는 것으로 알아차렸다. - 진은 그 각도를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문의 깊숙한 수납장 안쪽 낡은 양피지 문서에서 보았던 각도. 1888년, 화이트채플의 어둠 속에서 기록된 ‘그’의 유산. 잭 더 리퍼의 후손이라는 낙인은 진의 혈관 속에 저주처럼 흐르고 있었다. 230년 전의 악몽이 현대의 런던 한복판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보안팀이 1급 보고 현장에 왜 들어와 있죠.”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등 뒤로 낯선 기척이 다가와 멈춘 탓이었다. 구두굽이 젖은 아스팔트를 짓누르는 소리가 규칙적이고 단단했다. “경비 구역 설정 때문입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신을 등지고 선 그의 앞에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끝까지 읽어 내렸다. 데프 에도우즈. 직함보다 그 너머의 눈빛이 오래 남았다. 그는 시신이 아니라 진의 손을 보았다. 처음부터, 그리고 계속해서. 장갑 너머로 숨기려 했던 그 미세한 떨림을 쫓는 시선이었다. 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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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아침은 기계적인 소음으로 시작된다. 고성능 커피 머신이 웅웅거리며 원두를 갈아대는 소리,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긁는 구두 굽 소리,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최신 판례를 읊조리는 분석관들의 대화가 복도마다 층층이 쌓여 있었다. 진은 자료 뭉치를 옆구리에 끼운 채 브리핑실로 향했다. 어제 현장에서 보았던 사채의 잔상이 망막 안쪽에 눌어붙어 가시지 않은 탓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복도 끝, 브리핑실의 육중한 문 옆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데프 에도우즈. 그는 지나가는 다른 분석관들에게는 단 한 줌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마치 그 자리에 박제된 정물처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진이 가까워질수록 데프의 시선은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가, 진의 손끝에 고정되었다. 어제의 그 서늘한 감각이 다시금 피부를 타고 번졌다. 진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떨림을 그에게 다시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안 떠시네요.” 데프가 먼저 정적을 깼다. 인사가 아닌 관찰 결과였다. 무채색의 목소리가 복도의 소음 사이를 칼날처럼 비집고 들어왔다. 진은 그의 옆을 지나치려다 멈춰 서서 옆얼굴을 보았다. 데프의 눈동자는 감정이 휘발퇸 것처럼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집요함이 서려 있었다. “어제는 조금 추웠어요.” “봄이 다가오고 있는데 추우셨다고요.”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가치가 없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분석관으로서의 직무유기였고, 인간 진 크로스로서의 수치였다. 데프 역시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진이 브리핑실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시선이 등 뒤에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기분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임을, 진은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브리핑실 내부. 대형 스크린에는 두 번째 희생자의 사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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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 지하 자료실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지상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 그곳에는 수십 년 전의 미제 사건 기록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종이 냄새와, 서버 냉각 팬이 돌아가는 기계적인 저음만이 감돌았다. 낮은 층고와 촘촘하게 박힌 철제 수납장들은 빛을 교묘하게 차단해, 복도 끝자락은 언제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진은 낡은 수납장 사이에 멈춰 서서 가느다란 틈 너머를 응시했다. 시야의 끝, 자료실 입구의 흐릿한 조명 아래 데프 에도우즈가 서 있었다. 진은 그를 관찰했다. 이것은 명백히 직업적 명목이었다. 범죄심리 분석가에게 관찰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생존 본능이자, 상대를 해체하여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진은 데프의 자세, 구두의 각도, 심지어는 외투 깃이 꺾인 모양새까지도 데이터화하여 뇌리에 새겼다. 데프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도, 무언가를 찾는 기색도 없이 그저 그곳에 박힌 정물처럼 서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 특유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발견되지 않는,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었다. 틈새에서 벗어나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데프는 진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고개를 돌리는 대신, 정면을 응시하던 시선을 느릿하게 옮겨 진의 눈동자에 고정했다. 진이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도 그는 단 한 줌의 거리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안 피하시네요.” 진의 목소리는 지하 자료실의 건조한 공기를 타고 낮게 깔렸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시료를 확인하는 관찰 결과의 낭독에 가까웠다. “보고 싶으면 보세요.” 데프가 답했다. 짧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어떤 감정의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진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빛을 분석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타인의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시선 앞에서는 생리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눈동자를 미세하게 굴리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호흡의 주기를 바꾸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데프는 마치 진이 자신을 마음대로 해부하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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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새벽은 푸르스름한 서버 냉각기의 회전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하 2층, 자료실 구석에 위치한 7번 단말기는 연구소 내에서 가장 구식 모델이자, 역설적으로 가장 은밀한 기록들이 오가는 통로였다. 메인 서버의 감시망에서는 비껴나 있으나, 모든 로그 기록은 휘발되지 않고 기록되는 곳. 오전 2시 14분, 카드키 인식음이 짧게 울렸다. 단말기 7번 앞에 앉은 남자의 실루엣은 진 크로스의 그것과는 다른 결이었다. 단단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모니터의 푸른 광원 아래 멈춰 섰다. 데프 에도우즈는 보안팀 최고 권한을 사용하여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암호화된 비밀 폴더를 열었다. [Confidential_Draft_A03: Suspect Profile] 문서를 여는 데프의 손가락은 망설임이 없었다. 화면이 전환되자마자 나타난 것은 ‘1순위 용의자’라는 굵은 활자, 그리고 그 옆에 나열된 자신의 이름과 이력이었다. 성명: Deph Edowes연령: 28세직함: 사립 보안회사 대표 / 연구소 외부 보안 총괄 데프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수석 프로파일러 진 크로스가 자신을 관찰하며 적어 내려간 기록들이 활자가 되어 그의 망막에 차갑게 박혔다. ‘대상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결여되어 보이나, 사회적 규범을 완벽하게 연기함. 시신을 마주할 때의 생리적 반응 전무. 해부학적 지식의 유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장의 절개각 47도를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자, 가장 위험한 변수임.’ 데프는 그 문장들을 타인의 평전을 읽듯, 덤덤하게 훑어 내렸다. 그는 파일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으며, 기록을 파기하거나 조작하지도 않았다. 화면을 캡쳐하거나 복사하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저 읽었다. 진 크로스라는 분석가가 자신의 심연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문서를 닫고 시스템에서 로그아웃했다. 단말기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만년필 하나가 시선 끝에 걸렸다. 그는 그것을 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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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옥상은 지상의 소음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곳이었다. 밤 9시 22분. 템스강 너머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철제 난간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진은 옥상으로 향하는 무거운 청문을 밀었다. 끼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갈랐지만,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데프 에도우즈였다. 서른 살 생애 동안 진 크로스가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따라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업적 명목이라고 하기엔, 이미 5분 전에 그 명목이 얄팍해졌다는 것을 진 자신이 알고 있었다. 데프는 런던의 야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발밑의 어둠을 응시하는 듯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당신을 보고서에 1순위 용의자로 올렸어요.” 진의 목소리는 밤바람에 섞여 낮게 깔렸다. 감정을 배제한, 서류상의 사실을 제시하는 어조였다. “알아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데프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항의 안 해요.” 물음표가 빠진 듯한 진의 질문은 관찰에 가까웠다. 평소라면 그저 관찰로 끝냈을 진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데프 에도우즈라는 인물의 껍질 안으로 질문을 밀어 넣고 싶었다. 데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보았다. 옥상의 푸른 유도등 빛이 그의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데프가 처음으로 진의 손이 아닌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 무엇을 읽어내고 있는지 진은 즉시 분류할 수 없었다. 데프가 입술을 뗐다. “그래서요?” 단 두 음절이었다. 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분석도, 어떤 가설도 이 두 음절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데프 역시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부터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시작되었다. 밤 9시 22분에 시작된 대치는 밤 9시 40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진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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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사진 분석실은 외부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암시과 같았다. 대형 모니터 네 대가 뿜어내는 푸르스르한 광원만이 벽면의 타일 위로 차갑게 반사되고 있었다. 진은 어제 현장에서 채집된 47장의 고해상도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피해자의 찢긴 살점과 선혈이 확대되어 나타났으나, 진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검지 끝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19번, 20번, 21번. 사진 23번에서 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폴리스라인 너머, 구경꾼들로 가득 찬 골목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일상적인 기괴한 공포가 뒤섞인 군중의 얼굴들 사이로,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보고 있지 않았다. 챙이 넓은 조자 아래 가려진 그 시선의 끝은, 사진을 찍는 이의 어깨 너머, 정확히 그 시간과 그 장소에 서 있었던 진의 위치를 향해 있었다. 진은 그 사진을 5초 동안 보았다. 더 길게 보지 않았고, 확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오후 3시 42분. 세 번째 살인 현장은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 지하 창고였다. 지하의 습한 공기에 섞인 피 비린내는 지상의 그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진은 현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을 보았다. 피해자는 다니엘 헤이즈 (Daniel Hayes). 3년 전, 데프의 아버지가 연루되었던 사건에서 핵심적인 증언을 은폐했던 인물이었다. 진은 시신 앞에 무릎을 굽혔다. 왼쪽 손목, 47도. 진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이 각도를 봤을 때 느꼈던 그 원초적인 진동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진은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어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시야의 끝에 검은색 구두 끝동이 걸렸다. 데프 에도우즈는 이미 현장에 와 있었다. 그는 현장 보존 구역의 경계선에 서서 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시신의 상태가 아닌, 바닥을 짚고 있는 진의 손에 머물렀다. 맨 처음, 그의 시선이 진의 떨림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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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런던의 새벽 1시 12분은 모든 소음이 차갑게 식어 가라앉는 시간이다. 화이트채플의 낡은 아파트 단지는 안개에 젖어 비현실적인 고요에 잠겨 있었다. 진은 침실의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흰 봉투가 시트 위에 던져져 있었다. [ 피는 거짓말을 안 해. ] 정갈한 필체로 쓰인 그 여덟 글자가 시선이 닿을 때마다 신경을 예리하게 긁어내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다니엘 헤이즈의 찢긴 손목과, 130년 전 가문의 기록 속에 남겨진 47도의 절개각이 망막 위로 교차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든 환영의 끝에는 언제나 데프 에도우즈의 무표정한 얼굴이 남아 있었다.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아주 살짝 젖히자, 가로등 아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보였다.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낮부터 그곳을 지키고 있었을, 혹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존재,. 진은 그 차가 도로 위에 뿌리 내린 정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손바닥 안의 휴대폰이 짧은 진동과 함께 빛을 뿜었다. 발신인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으나 진은 주저 없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안 자고 뭐 해요.”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데프의 목소리는 밤공기보다 낮고 건조했다. 진은 창밖의 차를 응시하며 답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안 자는 거.” “불 켜져 있었어요.” 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거실 창문이 아닌, 아주 미세하게 틈이 벌어진 침실 커튼 사이의 빛줄기까지 그가 확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관찰이라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고, 보호라기엔 지나치게 집요했다. 진은 이 비정상적인 거리감을 프로파일링하려다 관두었다. 대신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올라와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제안이 아닌, 자신의 공간을 허용하겠다는 통보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박사님이 부르신 게 아니잖아요. 허락이랑 부르는 건 다르니까.” 데프의 목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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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런던 경시청(Met) 소속 감식반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장은 평소보다 훨씬 고요했다. 네 번째 희생자. 사우스파크 브릿지 인근의 폐창고에서 발견된 시신은 이제 ‘참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진은 노란색 폴리스라인 너머에서 시신의 손목을 응시했다. 47도. 범인은 진화하고 있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주저함이 없었고, 이번 피해자의 손목 단면은 해부학 교본보다 명확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절개각은 갈수록 선명하고 정교해졌다. 진은 현장 감식 보고서 양식을 띄운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15분 내로 작석되었을 ‘범행 패턴 분석’란이 백지로 남아 있었다. 진의 손가락이 확정 버튼 위에서 맴돌다 멈췄다. 그는 보고서를 전송하지 않았다. 수석 프로파일러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원칙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진은 태블릿 화면을 끄고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밤 11시 45분. 진의 아파트는 지독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진은 거실 바닥에 앉아, 안방 수납장에서 꺼낸 가문의 문서함을 모조리 쏟아냈다. 1888년 신문 스크랩, 빛바랜 양피지에 적힌 해부학적 스케치,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들이 거실 카펫 위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다. 진은 그 종이 더미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잭 더 리퍼의 후손이다.” 텅 빈 거실에 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평생을 부정하고 숨겨왔던 문장이었다. 내뱉은 선언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것은 차가운 금속성 냄새가 나는 저주에 가까웠다. 진은 문서들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가 오늘 본 시신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와 같은 성분이라는 사실이 지독한 구역질을 동반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데프 에도우즈였다. [ 받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은 안전하시다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 진은 잠시 화면을 응시하다가 메시지 입력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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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자정의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는 거대한 콘크리트 사체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건물 전체를 감싼 보안등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거리며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야근을 마친 진이 무거운 회전문을 밀고 광장으로 나섰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런던 특유의 낮은 안개가 고여 있었다. 진은 정문 앞 계단에 멈춰 서서 습관적으로 장갑을 고쳐 꼈다. 건너편, 낡은 가스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입구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실루엣이 있었다. 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선을 대로변으로 고정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의 전조등이 안개 입자에 부딪혀 흐릿하게 번졌다. 진이 탄 택시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골목 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 다음 날 오전, 연구소 복도는 평소와 같은 활기로 분주했다. 진은 자료 뭉치를 옆구리에 끼운 채, 브리핑실로 향하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데프와 마주쳤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차림으로, 평소와 다름없는 무채색의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박사님.” 목소리에는 어젯밤의 한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진은 그의 눈동자를 잠시 살폈다. 밤을 지새운 자 특유의 피로감조차 보이지 않는 지독하게 정돈된 얼굴이었다. 진은 그의 옆을 지나치며 아주 미세하게 풍겨오는, 서늘한 빗물 냄새를 맡았다. 새벽 3시경부터 런던에는 짧은 소나기가 내렸다. 그 비가 데프의 어깨에 내려앉아 원단의 결 사이에 스며들고, 다시 체온에 의해 증발하며 남긴 잔향이었다. 그 냄새의 농도를 통해 진은 추론할 수 있었다. 어젯밤, 남자가 그 골목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네, 에도우즈씨.” 진은 그 사실을 끝내 모른 척 했다. 모른 척하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위태롭게 그어진 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점심시간의 연구소 식당은 식기 부딪치는 소리와 분석관들의 낮은 담소로 채워져 있었다. 진이 구석진 자리에 앉자마자 동료인 엠마 휘트니가 식판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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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런던 시티의 외곽, 유리와 강철로 점직된 고층 빌딩 숲 사이에 데프 에도우즈의 보안 회사가 위치해 있었다. 건ㅁ눌 외벽은 주변의 충경을 차갑게 반사하고 있었고, 입구에서부터 삼엄한 보안 검색이 이어졌다. 진은 수사 협조라는 명목의 공문을 가슴 주머니에 넣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실 이 방문은 충동에 가까웠다. 연구소 안에서의 관잘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데프 에도우즈라는 인물의 공백을, 그의 사적인 공간에서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진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하는 동안, 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눈매가 날카로웠다.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연구소의 그것보다 훨씬 건조하고 정제되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보안 요원들의 움직임은 절도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침입자를 걸러내는 기계처럼 정확했다. 데프 에도우즈의 성정이 이 거대한 빌딩 전체를 규격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상층의 대표 사무실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넓은 공간에는 불필요한 장식품 하나 없었고, 오직 무채색의 가구들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진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데프는 커다란 통창을 등지고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런던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으나, 그는 그 풍경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종이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박사님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네요.” 데프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진은 대답 대신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은 데프의 넓은 책상 위에서 멈췄다. 전화기, 태플릿, 정갈하게 놓인 펜 한 자루. 그게 전부였다.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의 대표라면 으레 있을 법한 가족사진이나 흔한 퓽경 액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책상은 마치 오늘 아침에 갓 배달된 가구처럼 매끄럽고 비어 있었다. 그 결벽증적인 공백이 오히려 비명처럼 들렸다. “여기, 사진 한 장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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