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즉시 답장이 날아왔다.“제가 당신의 과거를 알아요.”한 사람의 모습이 온다연의 뇌리를 스쳤다. 나은별!그녀는 직감적으로 문자를 보낸 사람이 나은별이고, 좋은 일이 아닐 것임을 알았다.유강후가 나은별과의 관계를 대충 설명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단지 약간의 오해일 수 있겠는가?어제 주차장에서 그녀는 비록 차 안에 있었지만 나은별의 광기 어린 행동과 불만스러운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같은 여자로서, 온다연은 나은별이 유강후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욕망과 집착이었다.나은별!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유강후가 꺼지라고 하지 않았을 뿐 극도로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나은별은 끈질기게 매달렸다.게다가 동시에 두 사람에게 질척대고 있었다.이런 여자를 제대로 혼내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굴 게 뻔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온다연은 답장을 보냈다.“나은별 씨 맞죠?”잠시 후 답장이 왔다.“맞아요. 저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래요? 유강후가 과거를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온다연이 답장하기도 전에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명월루에서 차 한잔하는 게 어때요? 꼭 오시리라 믿어요.”온다연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야지, 왜 안 가!’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는 임혜린에게 문자를 보내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한참 지나 그녀는 어제 도착한 맞춤 제작 블랙 드레스를 선택했다.블랙 드레스는 그녀의 허리 라인과 비율을 완벽히 드러내 평소보다 성숙하고 섹시해 보였다.그녀는 또 보석함을 열고 화려하지 않지만 값비싼 다이아몬드 세트를 골랐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강씨 집안 어르신이 선물한 반지를 끼고, 강현미가 직접 골라준 한정판 가방을 들었다. 전 세계에 3개뿐인데, 나머지 두 개는 어느 나라 왕비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그녀는 계단을 내려오며 집사에게 지시했다.“강후 씨의 롤스로이스 팬텀을 앞에 세우고, 호위용으로 롤스로이스 두 대
온다연은 그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가자!”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은별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질투와 혐오의 눈빛을 애써 감추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온다연 씨, 오셨군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명월루는 예약이 어려워 보통 일주일 전에 연락해야 하는데, 다행히 제가 사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칸막이가 있는 자리로 안내받았어요.”명월루는 북아메리카 지역의 고급 멤버십 클럽으로, 연회비만 수억에 달하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귀족이나 재벌이다.나은별은 자기가 이곳 주주와 아는 사이라는 점과 온다연이 북아메리카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이곳 상황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우위를 점하려 했다.하지만 온다연의 등장은 그녀의 예상을 뒤집었다.온다연은 최고급 롤스로이스 팬텀을 타고 왔고 호위 차량마저 롤스로이스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얼굴이 예쁜 건 그렇다 치고, 몸에 걸친 옷만 가격이 수십억은 될 것 같았다.이는 나은별이 기억하는 온다연과 전혀 달랐다.기억 속의 온다연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소녀였고, 아름답지만 카리스마는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온다연은 카리스마가 넘쳐 ‘여왕님’ 같은 포스를 풍겼다.‘이년이 죽은 줄 알았더니 3년 동안 뭘 한 거야? 왜 이렇게 몰라보게 변했지?’온다연이 입은 드레스는 북아메리카 최고 디자이너의 핸드메이드 오트쿠튀르였고, 보석은 200억, 가방은 6억 넘었다.반면, 그녀가 입은 옷은 지난해 출시된 샤넬 슈트로 유행이 지난 지 오래다. 이전 같으면 이런 옷은 진작에 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나은별은 이제 더 이상 최고급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단골 고객이 아니다.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안쪽에서 얘기합시다.”나은별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이곳은 상류층이 모이는 곳인데, 온다연 씨는 처음이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예요. 원한다면 잠시 후에 내로라하는 몇몇 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이 빵 터졌다
유강후는 평범한 부자들에겐 불가능한 이 특권을 부릴 수 있는 남자다.권력과 재력, 사람을 미치게 하는 얼굴, 심지어 젊은 나이에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른 남자다.‘나 나은별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이런 남자다.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가질 자격이 없다.’온다연은 나은별을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속내를 꿰뚫은 듯 말했다.“나은별 씨, 가시죠. 이곳에 왔으니 당연히 제가 사야죠. 홀에는 사람이 많아 얘기를 나누기 불편하니 VIP룸으로 갑시다.”말을 마친 그녀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갔다.나은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곧바로 뒤따라 올라갔다.최고급 VIP룸에는 이미 최상급 홍차와 다양한 한식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청아한 솔향이 공간을 채웠지만, 나은별에겐 모든 것이 거슬렸다.원래 이곳에서는 한식 디저트와 차를 제공하지 않았고, 서양식 디저트가 주메뉴였다.북아메리카 유학 시절, 그녀는 동창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는데, 그때는 유강후의 멤버십 카드를 쓰며 정말 화려한 나날들을 보냈다.모든 직원이 그녀를 공손하게 대했다. 북아메리카 한인 사회에서는 모두가 그녀 뒤에 유강후가 있다는 걸 알기에 온갖 특권이 저절로 주어졌다.심지어 국내에 있는 나씨 가문도 엄청난 혜택을 받았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특권들은 서서히 박탈됐고, 그녀 발밑에 있던 자들조차 머리 위에서 똥을 싸기 시작했다.그녀는 억울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그녀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 계집애에게 넘어갔다. 왜?그녀는 문어귀에 서서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이년은 이 얼굴로 유강후를 꼬셨겠지. 얼굴만 망가지면 유강후가 이년을 버릴 텐데.’독기 어린 눈빛을 감지한 듯 온다연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건넸다.“나은별 씨는 이곳에 오신 적이 있으니 아시겠지만, 이 차와 디저트는 일반 손님께 제공되지 않아요. 디저트 장인이 궁중 다과 전통을 잇는 분인데, 극소량만 제작해 최상위 VIP고객에게만 제공한다고 하네요.
나은별의 눈에 순간적으로 증오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강후 씨는 옛정을 중시하는 남자예요. 다연 씨에게 빚진 느낌이 들어서 제게 접근하지 않는 거죠. 하지만 우린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사이...”언어 기교가 뛰어난 그녀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이런 건 상대방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게 모든 진실을 까발리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하지만 온다연은 예상과 달리 화를 내지 않았다.온다연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아, 소꿉친구였군요. 그런데 서른이 훌쩍 넘지 않았나요? 30년 동안 사람 하나 못 잡은 건 매력이 부족해서인가요? 수단이 없어서인가요?”나은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무슨 뜻이죠?”온다연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저는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에요. 제가 이미 선택한 남자를 누가 뻔뻔하게 빼앗으려 든다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고요.”고개를 들고 나은별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제가 그쪽 뒷조사를 해봤는데, 집안이 망했다면서요? 옛정을 구실로 유강후와 한재민 사이에서 한몫 챙기려나 보죠?”나은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온다연이 이렇게 말발이 뛰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온다연 씨, 말씀이 너무 지나치네요. 우린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고, 집안끼리도 아는 사이인데 좀 도와주면 어때서요?”온다연은 그녀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과거의 일은 제가 어찌할 수 없고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지금부터는 당신이 그 사람에게서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할 거예요. 나은별 씨, 저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입니다.”나은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코웃음을 쳤다.“네가 뭔데? 유강후 같은 남자가 여자 말에 휘둘릴 것 같아? 그 사람이 너에게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나?”“아니면 유강후가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 정도의 남자가 어떤 여자를 못 가지겠어?”그녀는 일부러 음흉하게 웃으
온다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눈치는 있군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강후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이를 지켜보던 나은별이 코웃음을 쳤다.“이런다고 유강후가 정말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 생각해?”온다연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설마 상간녀 짓을 하려고?”나은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누가 상간녀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잠시 멈추더니 독기 서린 눈빛으로 물었다.“네가 그때 유강후와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아?”그녀의 눈에 음산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정말 그 사람이 너를 뼛속까지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저 죄책감에 보상하려는 거뿐이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다연이 벌떡 일어나더니 나은별의 따귀를 후려쳤다.“진작 때리고 싶었어.”나은별은 얼굴을 붙잡은 채 멍하니 있다가 발끈했다.“네가 뭔데 감히 나를 때려?”온다연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때리고 싶어서 때린 건데, 날짜라도 골라야 하나?”나은별이 눈을 부라렸다.“엄마도 없는 천한 계집애가 감히 내게 손을 대? 죽을래?”이때 밖에서 대기하던 진씨 가문 경호원 임원식이 뛰어 들어와 나은별의 얼굴에 따귀 두 대를 날렸다.힘이 어찌나 센지 나은별은 머리가 핑 돌며 휘청이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너희들이 감히...”온다연이 손을 비비며 중얼거렸다.“아, 손이 아파. 빨개졌어.”임원식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아가씨, 이런 여자와 얘기 나누실 필요 없어요. 조사해 보니 몰락해서 허울뿐인 H국 삼류 가문의 여식이더군요. 유씨 가문에서 굶어 죽지 않게 봐주는 덕에 간신히 버티는 거지, 아니면 벌써 뒷골목에서 쓸려나갔을 거예요. 아가씨의 귀한 시간을 낭비할 만큼 가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하도 심심해서 유강후의 소꿉친구가 어떤 수준인지 보려고 나왔는데... 진짜 실망스럽네.”“아가씨?”나은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네가 무슨 아가씨야?”온다연이 대답하기
나은별의 속내를 꿰뚫은 듯 온다연이 차갑게 말했다.“네가 예전에 유강후와 무슨 사이였든 상관없어. 하지만 앞으로 감히 그 남자에게 치근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아. 너 하나쯤 없애는 건 식은 죽 먹기야.”나은별은 부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유강후가 너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지웠어. 이제 누가 조사해도 유용한 정보는 나오지 않아. 왜 그랬을까?”임혜린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입 닥쳐! 한마디만 더 하면 혀를 뽑아버릴 거야!”나은별이 독사 같은 웃음을 지었다.“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유강후가 너한테도 과거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어?”“온다연이 진실을 알까 봐 몹시 두려운 모양이지?”임혜린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진실이 뭐든 두 사람 사이의 문제야!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나은별, 너는 스스로 호감을 모두 갉아먹었어. 네가 저지른 더러운 일들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해? 유강후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해?"나은별은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무슨 소리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임혜린이 콧방귀를 뀌었다.“정말 어리석구나. 온다연 사건 이후로 유강후가 네게서 완전히 손 뗀 걸 몰라? 그 뒤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잖아. 영화 제작이든 다른 투자든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 있어?”나은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무슨 소리야?”임혜린이 말을 이었다.“너희 집안도 그만하면 탄탄한데, 투자에 실패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게다가 매번 성공 직전에 좌절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나은별은 벼락 맞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헛소리하지 마!”이건 그야말로 심장에 칼 꽂는 말이었다.사실 나은별도 한때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유강후는 비록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매번 사업 초기 자금은 제공해 주었다. 그녀가 실패하면
나은별이 부은 얼굴을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온다연, 넌 너무 건방져. 감히 나를 때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온다연이 어깨를 으쓱했다.“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조만간 나씨 가문도 사라질 텐데 네가 뭘 할 수 있겠어?”그녀는 테이블 위의 정교한 디저트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정말 이 디저트를 안 먹을 거야? 어쩌면 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맛볼 수 있는 고급 디저트가 될 텐데.”나은별이 코웃음을 쳤다.“네가 갑자기 진씨 가문의 딸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어.”“하지만 네가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어.”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때 김원도가 나를 납치한 후, 유강후에게 너를 갖다 바치면 나를 놓아주겠다고 했는데, 유강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온다연은 관자놀이가 욱신거려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어떻게 했든 이미 지나간 일이야. 나은별, 당장 꺼져. 나한테 도발하지 마. 너는 그런 자격이 없어.”하지만 나은별은 말을 이어갔다.“유강후는 주저 없이 너를 납치범에게 넘겼고, 너는 결국 김원도에게 끌려가 바다에 빠져 죽었지.”“아니, 죽지 않았네.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에 대한 유강후의 사랑은 단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보상일 뿐이야. 언젠가는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온다연은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팠지만 애써 진정하고 냉담하게 말했다.“그렇게 확신에 차 있다면 기회를 주지. 지금 유강후를 불러 너를 선택할 건지 물어보는 게 어때?”나은별은 눈에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지금 당장은 날 선택하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이 너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 당연히 너에게 미안해서...”“닥쳐!”온다연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딴 헛소리 집어치우고 정신병 치료나 받아. 과거에 나와 유강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나는 그 사람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은 없으니까.”“정말 네가 말한 것처럼 나
나은별은 몸을 떨며 눈에 두려운 기색을 띠었다.“네가 감히!”온다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코웃음을 쳤다.“못 할 게 뭐가 있어? 네가 죽으면 너를 찾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네.”그녀는 몸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마.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나은별은 독살스럽게 그녀를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가버렸다.온다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저 여자에게 사람을 붙여서 대체 뭘 하려는지 지켜봐요. 저 여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아가씨!”임원식이 떠난 후에야 온다연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머리 통증이 더 심해져 토할 것 같았다. 나은별의 말은 칼날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임혜린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이 안 좋아? 나은별이 헛소리한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잠시 쉬니 조금 나아졌다.“그 여자 말이 사실인 것 같아.”임혜린이 급히 그녀를 달랬다.“말도 안 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유강후가 성질이 더럽고 잘난 척하는 데다 남의 비밀을 마음대로 까발리긴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아. 너를 두고 나은별을 좋아할 리 없어.”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그 말이 아니야. 강후 씨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아. 이전에 나은별이 납치됐을 때, 강후 씨가 나를 그 여자 대신 납치범에게 넘겼다는 거 말이야. 사실인 것 같다고.”임혜린은 한참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그 일은 내가 아는데, 오해가 있어. 그때 유강후는 너를 닮은 사람을 준비해 납치범에게 넘기고 나은별을 구출하도록 지시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부하들이 너를 그 사람으로 착각해 현장으로 데려간 거야.”온다연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통으로 시큰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그다음은?”임혜린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