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 씨가 내 앞에서 단 두 마디만 남기고 쓰러졌을 때 난 정말... 강후 씨가 죽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그의 옷깃을 적셨다.“그땐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유강후가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온다연은 마치 심장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었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녀도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때 온다연은 뭐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포기해도 좋으니 유강후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심지어 배 속의 아이들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 있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았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건 마치 현실이 아닌 악몽처럼 느껴졌다. 온다연은 매일 아침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그 끔찍한 총격 현장 속에 다시 갇힐까 봐.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꼭 움켜쥐었다.“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나를 놔두고 가면 안 돼요.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요.”유강후는 그녀를 꼭 안았다. 마치 영원히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서약하듯 진지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야. 두 번 다시는.”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 살아남았다는 기적을 온전히 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깊게 남은 흉터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흉터 수술 받아요. 그럼 예전처럼 깨끗이 없어질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상처 위에 단단히 눌렀다.“안 돼. 그대로 둘 거야.”“보기 안 좋아요.”“난 남자야. 굳이 좋게 보일 필요 없어. 이 상처를 남겨 두고 싶어. 그래야 네가 볼 때마다 기억할 거잖아. 넌 절대 나 없이 살 수 없다는 걸.”온다연은 코끝이 시큰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흉터가 없어도 난 강후 씨 없이 못 살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웅얼거리는 듯했지
유강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에 네 어린 시절이 나왔어.”그건 아주 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마치 평행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어린 온다연을 만났다. 작고 여린 아이, 항상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이.유강후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신이 그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꿈에서만큼은 그는 어린 온다연을 구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유강후는 열여섯 살이었고 온다연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녀가 유씨 가문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2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2년은 온다연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유강후는 꿈속에서 직접 봤다. 온준용이 아내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모습을. 작은 몸집의 온다연이 어둡고 축축한 방에 갇힌 모습을. 비 내리는 거리에서 홀로 울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낯선 소년이 나타나 그녀의 어깨에 우비를 살포시 걸쳐 주는 모습을.온다연과 그 소년은 서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처음에 유강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끼어들 수 없었다.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그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었고 몇 가지 방법을 써서 온다연의 이웃이 되었다.그리고 온준용이 또다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날 유강후는 그를 처참하게 두들겨 패고 경찰에 넘겼다. 그 후 여러 수단을 동원해 어린 온다연을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그 순간부터 유강후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 온다연은 그의 곁에서 자유롭게 자랐고 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처럼 보살폈다. 마치 어린 공주처럼.온다연이 처음으로 1등을 했을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했을 때, 처음으로 학원에 갔을 때, 처음으로 부모님 호출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심지어 처음으로 생리를 했을 때조차... 그 모든 순간에 유강후가 있었다.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온다연이 낯선 소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그녀를 혼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모든 일은 강후 씨의 큰 형님이 벌인 거예요. 강후 씨 아버님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는데 괜히 그분에게 분풀이했던 것 같아요. 강후 씨 아버님은 권력이 높고 바쁘신 분이잖아요.”“국가 대사만으로도 너무 바쁘셔서 친아들인 강후 씨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어린 여자애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온다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강후 씨 아버님은 강후 씨를 키우는 데 있어서만큼은 정말 성공하신 것 같아요. 강후 씨도 아버님처럼 지혜롭고 결단력이 있어요. 위기 앞에서도 침착하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졌고요. 정말로 그분과 연락을 끊은 거예요?”유강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야?”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강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가끔 좀 덜 소심하기만 하면 더 좋겠지만.”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이를 악물었다.“방금까지 날 대범한 사람처럼 말하더니, 이제 와서 소심하다고?”온다연은 그의 손을 툭 쳐내며 웃었다.“요즘 집사님한테 들었는데 강후 씨 아버님께서 매년 강씨 가문에 여러 번 찾아가신대요. 하지만 늘 대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셨고 강후 씨 어머님은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왜 어머님은 아직도 아버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유강후는 표정이 싸늘해졌다.“유자성은 내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야.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함께 복무하던 선임의 아들이었어. 아버지는 그 선임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그 대가로 선임은 전장에서 죽었어. 아버지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고 유자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어. 그래서 유자성을 위해 뭐든 해주려고 했지.”“아버지가 그동안 유자성에게 베푼 건 나에게 준 것보다 훨씬 많았어. 사실 난 물질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유씨 가문의 재산 따위
강씨 가문 저택에 돌아와 보니 이미 환영회 준비가 성대하게 되어 있었다.강씨 가문의 모든 친척들이 모였고 길게 놓인 테이블 앞은 수십 명의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는데 강씨 가문은 단결력이 강하고 쉽게 내부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집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회사의 주가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심지어 유강후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순간에도 그를 배신하거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이토록 강씨 가문을 위해 애써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가장 상석에는 강양호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유강후와 온다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온다연의 맞은편에는 강현미와 안심이 앉았는데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유강후와 온다연이 자리에 앉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제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음식도 거의 다 차려진 상태였다. 강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이번 위기 속에서 강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공로는 온다연에게 있으며 그가 강씨 가문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오늘부터 온다연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경제적 권한을 전적으로 맡게 된다는 공식적인 발표도 덧붙였다.그 후 자연스럽게 유강후와 온다연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은 강씨 가문의 큰 행사였고 사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몇 달 전에 이미 치러졌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미뤄진 것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고 초청할 하객 명단까지 이미 준비해 둔 상태였다.하지만 온다연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현재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고 최근 산전 검진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몸이 평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조산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지금 그녀는 임신 5개월 차였고 설령 8개월까지 무사히 버
유강후는 바로 게를 집어 들고 정성스럽게 속살을 발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강후는 언제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그는 가문의 모든 이들이 의지하는 거목이었다.그런데 지금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다가올 아이들의 좋은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생경하기도 했지만 지난 몇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환영회가 끝난 후 안심이 온다연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그런데 안심이 입을 떼기도 전에 온다연이 먼저 물었다.“아빠는 아직도 강후 씨를 만나려 하지 않으세요?”안심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유씨 가문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데 그 얘기를 듣고도 네 아버지가 강후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온다연은 고개를 떨궜다.“전 정말 나쁜 딸이에요. 부모님께 걱정만 끼쳐 드리고...”안심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잘못한 건 우리야. 어릴 때 우리가 널 잃어버려서 결국 네 인생을 힘들게 만들었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해야 했고.”온다연은 다가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잖아요. 그동안의 고생이 이 순간을 위한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세요.”안심은 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내일이면 난 신국으로 돌아가야 해. 네 아빠가 집에 혼자 있는데 늘 네 걱정을 하니 곁에 있어 줘야지. 그래도 강씨 가문이 널 잘 대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정말 H국에서 출산할 생각이야? 신국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네 아빠랑 나는 네가 집에서 아이를 낳길 바라고 있어
다음 날 오후, 온다연은 안심을 배웅한 뒤 H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우미들에게 이것저것 짐을 싸라고 지시했다.그 모습을 보던 장화연은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는 다급하게 온다연의 팔을 붙잡고 소파로 데려갔다.“사모님, 제발 좀 쉬세요. 며칠 동안 피곤하셨잖아요. 이런 건 제가 알아서 챙기면 됩니다. 그리고 집에 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요. 예전에 쓰셨던 것들도 전부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새 거랑 다름없어요.”“지금 겨울이라 돌아가시면 영운산 별장에서 지내시겠죠? 거기에 천연 온천이 있어서 출산 후 몸조리하기도 좋아요. 거긴 원래 신혼집으로 지내려고 준비한 곳이라 하루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사모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매일 관리인을 보내 청소해 왔으니 따로 뭘 챙겨 가실 필요 없어요.”하지만 그 말을 듣고 온다연은 표정이 굳어졌다.“전 영운산 별장이 싫어요.”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해 겨울 유강후와 나은별이 다정하게 지내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장화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는 그 별장이 나은별 씨를 위해 지어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그 집은 처음부터 사모님을 위해 준비된 곳이고 내부 인테리어도 사모님께 맞춰 설계된 거예요. 그때 사모님께서 H국에 계셨을 때부터 말이에요.”“나은별 씨와는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요. 나은별 씨가 거길 두어 번 구경하러 갔던 게 전부예요.”잠시 말을 멈췄던 장화연은 다시 덧붙였다.“게다가 나은별 씨도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 일로 사모님께서 도련님과 다투시지 않길 바라요.”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유강후와 온다연 두 사람은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극단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이제야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는데 장화연은 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왜 나은별 씨
유강후는 무심하게 말했다.“그건 네 형이 결정한 일이야.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그냥 임혜린한테 집 키 하나 줬을 뿐이야. 네가 무능해서 못 찾은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내 집이 그렇게 찾기 어려웠어?”한이준은 폭발 직전이었다.“그래! 너 딱 기다려. 나 나은별에 관한 소식 들었거든? 이따가 온다연에게 말해 줄 거야. 그럼 넌 평생 버림받겠지!”하지만 유강후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고는 표정이 굳은 채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다.“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은별이가 새어나갈 구멍을 끊으라고 했는데 왜 아직도 은별이에 대한 소식이 흘러나오는 거냐고?”이권은 잽싸게 답했다.“도련님, 제가 바로 그 문제를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전화를 주셨네요. 나은별 씨가 그곳에서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는데 여러 번 도망치려 했고 마지막에는 창문을 통해 탈출하려다 아래 있는 대나무에 찔렸습니다.”“하지만 그쪽 사람들은 나은별 씨를 구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피가 한 시간 넘게 흘렀고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쪽에서 시신을 수습할지 묻더군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나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게 이 소식을 흘려서 양쪽에서 더 심하게 싸우도록 만들어. 그리고 다연이 앞에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마. 다연이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까. 알아들었지?”“네,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그리고 당분간 한이준의 전화는 전부 차단해. 나한테도 다연이에게도 연락 못 하게 말이야. 문자도 못 보내게 해.”“알겠습니다, 도련님!”성당 근처에서 임혜린은 선배 정연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산책하고 있었다.오랜만의 재회였다. 서로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임혜린은 이사 온 지 이틀 만에 동네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정연석은 이제 국제적으로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고 그의 집은 임혜린이 사는 건물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과거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였지만 한이준이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오해를 만들면서 연락이 끊겼던 것이
임혜린은 이를 악물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노려보았다.“뭐 하는 거예요?”한이준은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왔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그는 천천히 검은 가죽 장갑을 벗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널 잡으러 왔지.”임혜린은 코웃음을 쳤다.“이준 씨가 뭔데요? 무슨 자격으로 날 잡겠다는 거예요?”한이준은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내 자격은 누가 주는 게 아니야. 네가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아?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넌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임혜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예전엔 그래도 착한 척이라도 하더니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어요? 이게 이준 씨 본모습이죠?”그녀의 움직이는 입술을 본 순간 한이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이 입술이 다른 남자에게 닿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렸다는 것.그 사실들은 밤낮없이 그를 괴롭혔고 가슴을 죄어오며 미칠 듯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임혜린을 그냥 목 졸라 죽여 버릴까?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 삼켜 버릴까? 그럼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할 텐데.’그런 생각이 들수록 한이준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고 손아귀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임혜린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파 손톱으로 그의 손을 할퀴었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절박해진 그녀는 한이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힘껏 물어버렸다. 그러자 한이준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그녀의 이빨이 살을 뚫고 들어가자 그는 순간적으로 손을 놓고 소리쳤다.“임혜린, 너 개야? 왜 이렇게 물어대!”임혜린은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는 골든 리트리버를 가볍게 두드렸다.“코코, 네가 나설 차례야. 물어!”평소 순한 성격의 코코는 몇 번 신음을 내더니 바닥을 긁으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몸집으로 한이준에게 덮쳐들어 그의 옷을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이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