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갑자기 몸을 뒤집어 온다연을 침대와 자기 가슴 사이에 가두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그 자세가 싫다면 이렇게 하자!”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아당기며 몸을 덮었다. 온다연은 혼비백산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알겠어요! 아저씨, 아저씨 말대로 할게요...”유강후는 깊은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온다연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몸이 떨렸다. 방 안에서 온다연의 신음이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온다연은 지쳐서 유강후의 품에 쓰러졌다. 유강후는 아주 느긋해 보였고, 그의 목소리에서도 한결 느슨한 느낌이 묻어났다.“피곤해?”경험이 없던 온다연의 몸짓이 너무 서툴기도 했고, 유강후도 처음이었던 만큼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맞춰나갔다. 결국 온다연은 버텨내지 못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고 체감하며 제대로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완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말이다.그때, 밖에서 이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셋째 도련님, 이다 이치로가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습니다.”유강후는 방해받아 불쾌해진 듯 눈썹을 찌푸렸다. 온다연과의 시간을 방해받아 심기가 불편해진 유강후는 목소리가 차가워졌다.“기다리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게 해!”이권은 주저하며 말했다.“하지만 아주 진정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동양국 제3대 재벌가의 후계자이기도 하고, 가장 큰 공급자이기 때문에 너무 소홀히 대할 수는 없습니다”유강후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이권,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이권은 멈칫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셋째 도련님, 그럴 리가요. 단지 주의를 환기해 드리려는 것뿐입니다!”유강후는 냉랭하게 말했다.“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해. 곧 갈 테니.”“네! 셋째 도련님!”이권이 떠난 후, 유강후는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연이가 입고 나갈 만한 옷을 한 벌 준비해서 보내줘.”유강후는 전화를 끊고 나서 온다
유강후와 온다연은 한동안 서로를 감싸안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연이 옷을 가져왔다. 장화연이 준비한 옷은 온다연에게 매우 잘 어울렸다. 안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보리색 원피스였고, 그 위에는 연한 파란색 가디건이 있었다. 이는 온다연의 피부를 더욱 부드럽고 하얗게 보이게 했다.특별한 액세서리는 없었지만, 머리에는 사파이어 나비 모양의 머리핀 하나가 있었다. 이 핀은 약간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오래된 나무 상자에서 꺼내진 푸른 보석 같았다.장화연이 그것을 온다연의 머리에 꽂아줄 때 매우 조심스러워 보였다.온다연은 이런 장신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 핀이 매우 비싸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핀을 빼려고 했지만, 유강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왜?”유강후의 한 마디에는 강한 압박감과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온다연은 심장이 떨려 손을 뒤로 뺐다.“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유강후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잘 어울려. 어머니가 쓰시던 건데, 너한테 참 잘 어울리는구나.”그는 온다연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가자.”날씨가 쌀쌀해진 탓에 유강후는 정장 위에 같은 색 계열의 트렌치코트를 입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온다연은 그의 손에 이끌리며, 영화 속 대부들이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 같아 웃음을 지었다.“아저씨, 정말 카리스마 있어요.”유강후는 자기 외모와 위압적인 분위기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담담하게 물었다.“그래서 무서워?”온다연은 그의 말수 적은 무뚝뚝함에 흥미를 잃고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아꼈다. 그와 몇 걸음 떨어진 후, 유강후는 갑자기 멈춰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무서워해도 되지만, 너만은 안 돼.”온다연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이 말을 꺼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대답했다.
온다연은 자기가 왜 숨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나마 숨으면 덜 민망해 할 것 같았다.못 본 척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유강후가 나오라는 말을 듣고, 온다연은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엄청나게 이쁜 사람이 바로 유강후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온다연이 나갈까 말까 고민중인데 유강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온다연!”목소리에 불쾌함이 느껴졌다.온다연은 숨을 돌리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고개도 들지 않고 조용히 유강후를 향해 걸어가면서 하루코의 경이로운 시선을 느꼈다.“강후 씨, 이분은 누구시죠?”역시 예쁜 사람은 다르다. 행동과 말투에서 아주 우아하다는 걸 알 수 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느리게 걷는 것을 보고는 뒤돌아 서서 온다연을 자기 품에 안았다.유강후의 손은 온다연의 작은 손을 감싸며 말했다.“누가 숨으래?”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친구분이 찾으시는데요?”하루코는 그들을 보고 놀라는 듯 물었다.“강후 씨, 이분은...”“조카입니다!” 유강후가 말하기도 전에 온다연이 단호하게 하루코를 보며 말했다.“조카!”하루코의 시선은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에 떨어졌다.“강후 씨, 나은별 씨랑 약혼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계속 기다릴 거예요. 일 년에 한 번만 본다고 해도, 강후 씨가 저를 받아준다면,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왜...”“왜 이 사람은 되고 저는 안 돼요?”유강후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하루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힘을 주고 온다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온다연이 식은땀을 날 정도로 힘을 주었다.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 “하루코, 제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 것도 알았으면,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세요. 저는 당신한테 관심 일도 없으니까요.”하루코의 시선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머물러 있었고,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제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려왔는데, 왜 저를 택하지 않고...”유강후가 말했다.“우리는 그저 동창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온다연은 불안한 듯 작은 소리로 유강후를 향해 말했다.“아저씨, 저 좀 무서워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데리고 자가 옆자리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밥 먹고, 함부로 도망치지 마!”방이 커서 딱 봐도 비즈니스용이었다.식탁도 길고 세련됐다.그들 옆에 앉은 사람들은 유강후의 수하들이다. 하나둘씩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맞은편에 앉은 건 바로 이다 가문의 사람들이다. 딱 봐도 한국인과 달랐고 구분할 수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럼 신경 쓸 겨를도 없다. 하루코가 끌려갈 때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온다연은 극도의 불안을 느꼈다. 그 불안감은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느낌이랑 별개였다. 뭔가 곧 아주 무서운 사건이 일어날 듯했다.여기 온다고 일식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아까의 일로 뒤섞여 온다연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조금 먹고는 유강후에게 간다고 했다.“아저씨.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돌아가고 싶어요.”온다연이 접시에 담긴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걸 본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입맛에 맞지 않는 거니? 내가 먹어도 좀 별로이긴 하다. 나중에 장 집사보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할게.”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대응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기운이 없는 걸 보고 또 아픈 줄 알고, 온다연의 이마를 만지는 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잘래?”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불안감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우리 돌아가면 안 돼요?”온다연이 처음으로 ‘우리’라는 말을 썼다.유강후는 좀 의외였다.만약 이전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승낙했을 것이다.그러나 오늘 유강후를 위해 만든 자리이기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는 자리이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권 보고 데려다 달라고 할게.”온다연은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한참 뒤에야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랑 같이 돌아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유강후에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온다연이 처음으로 유강후에게 요구하는 거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은 만지며,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저씨. 여기는 안전해요.”확실히 안전하다. 요 며칠 동안 유하량과 유민준도 나타나지 않고, 온다연이 싫어하는 사람들, 일도 나타나지 않았다.모든 게 유강후의 생각대로이다.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이권에게 말했다.“데려다주고 와.”이권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온다연 씨, 가시죠.”사실 이권은 데려다주는 게 너무 오버라고 생각했다. 유강후가 너무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이 호텔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냥 몇 걸음만 가면 도착하는데, 굳이 데려다줘야 하나 생각했다.하지만 이권은 자기의 생각을 말할 엄두도 없고, 온다연의 뒤를 따랐다.거의 도착할 때쯤 온다연이 갑자기 멈추었다.온다연은 앞에 있는 작은 정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움직이지도 않고, 표정도 멍해졌다.이권은 온다연이 무슨 이상한 것을 본 줄 알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보았다.온다연의 시선을 따라 보더니, 이다 하루코가 정자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이권은 하루코의 눈빛을 보고 이상하고 불편했다.이권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온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매니저님. 이 하루코라는 여자가 아저씨의 외국에 있는 여자 친구인가요?”이권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잘 모르겠네요. 대표님을 2년 동안 모셨지만, 저는 주로 한국에 있는 일들을 담당해서요.”온다연은 하루코를 보며 그녀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어떤 영화배우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온다연이 본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다.온다연이 혼자 중얼거렸다.“정말 예쁘네요. 아저씨는 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하루코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유강후에게 찬밥 신세이니, 자기는 더욱 심할 거로 생각했다.유강후도 방금 나은별과 혼약했다고 인정했다.그러기에 지금 온다연의 신분은 유강후의 애완동물과 같다. 다들 자기를 첩이라고 부를 거고, 하루코보다 못한다.이권은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하루코가 아마 일
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하루코를 찬찬히 바라보았다.가까이 보니까 온다연은 하루코가 더욱 아름답다고 느꼈다. 달빛에 비춰서 아주 비인간적으로 예뻤다.“혹시 아저씨 좋아하세요?”하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강후 씨를 처음 만났어요. 그때 작심했어요. 이 사람이 아니면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강후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십 년을 기다렸지만, 여전히 저한테 눈길도 주지 않았어요.”“나중에 한국에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내연녀의 신분으로 강후 씨를 평생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요.”하루코의 목소리는 매우 씁쓸했다.“알아요. 강후 씨가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다는 거. 하지만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일본인으로 태어났고, 바꿀 수 없잖아요.”하루코는 유강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은 하루코의 눈빛이 전혀 화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온다연이 당황해서 말하려는데, 하루코가 입을 열었다. “강후 씨, 좋아해요?”온다연은 멍해졌다.유강후를 좋아하는가.온다연은 감히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하루코는 또 말했다.“좋아하지 마세요. 매우 고통스러울 거예요. 당신은 아직 너무 어리고, 나중에 더 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요. 당신한테 마음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마세요. 그거 알아요? 강후 씨가 우리 학교에서 유학할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강후 씨를 좋아했지만 아무도 강후 씨의 마음을 잡은 사람이 없었어요.”“강후 씨의 마음은 나은별 씨한테 있어요. 나은별이 아닌 이상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하루코가 중얼거렸다.“하지만 전 그가 저를 기억하길 원해요. 평생 저를 기억하게 하고 싶어요.”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어요.”하루코는 천천히 유강후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하루코는 옷을 얇게 입고 외투도 입지 않아 찬바람 속에 아주 가냘프게 보였다.온다연은 하루코의 뒷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온
온다연은 누군가의 팔을 움켜쥐고 중얼거렸다.“아저씨. 아저씨.”그 사람은 호텔 직원인데 온다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눈도 초점 없는 것처럼 보여서 당황했다.“아가씨. 괜찮으세요? 병원에 데려다줄까요?”온다연은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고 귓가에 인기척만 들리고 눈앞은 선홍빛 핏물이 가득했다.온다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다. 의도치 않게 그 사람에게 기댔다. 그 호텔 직원분 역시 놀라서 황급히 부추겼다.“이보세요. 아가씨, 괜찮아요?”온다연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의식이 없는 듯 손을 뻗어 호텔 직원을 끌어안았다.호텔 직원은 온다연이 땅에 쓰러질까 봐 어쩔 수 없이 몸을 기대게 했는데, 온다연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품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온다연의 그런 모습에 호텔 직원이 막 위로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매서운 한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키 크고 듬직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 남자는 호텔 직원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 압박감이 호텔 직원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는 듯했다.호텔 직원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대... 대표님?”유강후는 다가가서 호텔 직원 품에 있는 온다연을 안았다.“제가 안을게요.”호텔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고,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다연아.”온다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유강후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온다연의 주위를 감쌌고, 온다연은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유강후의 옷을 꼭 잡았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품에서 몸을 심하게 떨며 계속 그를 불렀다.“아저씨. 안아주세요.”“아저씨. 안아...안아주세요...”유강후는 이상하다고 느껴서 온다연의 이마를 만졌다. 분명히 손은 얼음처럼 차지만, 이마에는 온통 촘촘한 땀투성이였다.유강후는 순간 눈에서 살기가 나더니, 경찰이 와서 처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리고
유강후의 눈에는 악기가 가득했다. “이거 놓으세요!”이치로는 당연히 순순히 놓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대치하다가, 결국 이치로는 이권에게 강제로 끌려갔다.이권도 말을 곱게 하지 않았다.“이치로 씨, 말조심하세요.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 좀 해보세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마세요.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요.”이치로는 매서운 눈으로 유강후를 노려보았다.“어디에 있든 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온다연 씨는 제 여동생을 죽게 한 용의자입니다. 이대로 갈 수는 없습니다!”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첫째. 당신 여동생이 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제 연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컨디션이 보다시피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 일도 제가 책임을 물을 예정이니 각오하세요. 미래 그룹 수백 명의 법무팀이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둘째. 당신 여동생의 죽음은 제 호텔에 명예와 경제적 손실을 입혔으니, 이치로 씨가 저랑은 무관한 일이라고 사과하고 경제적 손실을 배상해야 합니다.”“셋째. 여기는 총기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계속 법 법 거리시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법으로 해결합시다.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이러한 불법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유강후는 이권을 바라보며 화난 듯 말했다.“이 매니저님. 당장 경찰에 다시 신고하고 이이다 가문과의 모든 계약을 중단하세요!”“알겠습니다!”이치로는 얼떨떨해하다가 정신을 차린 듯 하루코의 시신을 보니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하지만 말투는 매우 평온했다.“유 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제가 실수했습니다.”“하지만 미래 그룹과 이다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윈윈하고 있는데, 이대로 계약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부디 명령을 철회해 주십시오.”미래 그룹은 세계 최고의 대형 그룹으로 산업 사슬이 매우 다양하다. 이다 가문이 동남아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다. 이번에 미래 그룹과의 계약이 잘못되면 이치로의 후계자 자리도 사라지게 된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를 안중에도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