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양이는 유강후가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서 얻어온 것인데. 며칠 전에 다리가 부러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걸 외국에서 제일 유명한 수의사를 불러들여 수술을 해주었다. 고양이를 지금까지 애지중지 키워온 것은 단지 그녀가 고양이를 많이 보고 좀 더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이제 그녀는 감히 고양이가 싫어졌다는 말을 하고 심지어 그 고양이가 자기처럼 자유롭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날 따르는 게 그렇게 괴로울까?’유강후는 더 힘을 주어 온다연의 턱을 꼬집으며 말했다.“다연아, 너 참 좋은 줄 모르네!”그는 실눈을 뜨고 말했다.“이 고양이가 싫어졌다고? 그래. 바로 다른 곳에 보내 버릴게! 쓰레기장으로 보내면 이렇게 작은 고양이는 바로 죽겠지.”그의 말투는 아주 잔인했다.“그런 곳은 들개와 들고양이가 얼마나 많겠어. 근데 이렇게 젖 먹던 새끼 고양이가 버려진다? 몇 분 안 되어서 갈기갈기 찢기고 말 거야.”유강후가 한 글자 말할 때마다 온다연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이런 미세한 동작을 다 지켜보고는 냉혹하고 잔인한 말투로 말했다.“근데 그건 다 네가 원해서 그런 거야. 다연이 네가 원해서!”온다연은 몸을 떨었고 가슴도 기복을 이루었다.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입술을 꼭 깨물었고 손은 침대보를 세게 움켜쥐었다.유강후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마침내 그녀의 굳센 입술에 내려앉았고 냉정하게 말했다.“화연아, 고양이를 보내 버려. 당장!”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서서 방금 들여온 고양이를 다시 케이지 속에 넣었다.아마 충분한 어루만짐을 받지 못해서인지 고양이는 계속 울어댔다. 그 소리는 귀엽고 말랑하여 온다연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손힘은 침대보를 거의 찢을 것 같았다.유강후는 꼼짝하지 않고 그녀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고양이는 밖으로 이송되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입을 열고 용서를 빌지 않았
유강후는 점점 멀어져가는 차의 후미등을 노려보면서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회사로 가줘!”이권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더니 애틋하게 말했다.“도련님, 그래도 꼬박 이틀 동안 밤을 새우셨는데 회사도 중요하지만, 휴식하는 것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온다연 씨도 돌아가셨는데 도련님도 돌아가서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말이 너무 많다!”유강후는 조금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이권은 앞차의 후미등이 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그는 비록 유강후와 온다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이 이틀 동안 유강후는 한 시각도 좋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고 업무 강도로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회사 총무팀의 분위기는 한시도 늦춰지지 않았고 거의 모든 사람은 다 전전긍긍하며 유강후와 함께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지새웠다. 심지어 그 누구도 감히 퇴근하지 못했다.근데 지금 또다시 돌아가서 야근해야 한다니,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도련님, 저는 비록 도련님과 온다연 아가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온다연 씨께서 겪은 일들은 정말 일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삶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온다연 씨 심리도 좀 문제가 있어서 말과 행동이 어떨 때 보면 일반인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다연 씨를 대할 때 이해심과 인내심을 조금 더 가져주셔야 합니다.”말을 마친 후 이권은 핸들을 잡고 입을 꾹 다물었다.차 안에는 다시금 침묵이 흘렀고 분위기는 조금 다운되어 있었다.비록 이권은 유강후의 곁에서 몇 년 동안 지냈지만, 여전히 경원시 황태자 유강후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종래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며 심지어 웃는 얼굴을 한 적도 별로 없다. 침묵할 때는 엄숙하고 쓸쓸한 느낌이 있었으며, 지금의 경우에 비록 차 안은 히터가 충분했지만, 이권은 어딘가 등 뒤에서 쌀쌀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이렇게
비록 그 말소리는 조금 낮았지만 온다연은 요 며칠 눈이 안 보이는 관계로 귀가 평상시보다 더 예민해 있었다.그녀는 은은하게 유하령과 유자성의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그녀는 우산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쌀쌀한 바람이 불어 추위는 한껏 더 심해졌다. 온다연은 기다란 눈초리를 가볍게 드리운 채 눈 밑의 감정을 감추었다.하인들은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들어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가여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몇 번 쳐다보았다.지금 온다연의 눈은 그저 모호하게 사람의 윤곽만 보일 뿐 그들의 눈빛은 당연히 보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검은 우산을 들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장 집사님, 아저씨네 집에 손님이 온 건가요?”집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여전히 무표정으로 대답했다.“온다연 씨, 집에는 확실히 손님이 와 계십니다. 저희는 먼저 옆에 있는 집으로 가서 잠시 기다립시다. 셋째 도련님께서는 이 부근에 집을 한 채 더 갖고 계십니다.”온다연은 말이 없었다.그녀는 이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온다연의 신분은 빛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게다가 지금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유씨 가문의 사람들이었다.온다연은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네.”장 집사는 어쩌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온다연을 데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온다연이 차 안에 안자마자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온다연!”온다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의식적으로 문을 닫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유하령은 이미 그녀에게 달려와서 차 문고리를 꼭 잡고 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정말 너네. 정말로 너였다니! 유민준이 네가 아직 살아있다고 했을 때 난 안 믿었어. 근데 삼촌의 호텔에서 나타난 사람이 정말로 너였다니!”유하령은 위에서 아래로 온다연을 내려보았다. 그러자 온다연의 아름답고 정교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온다연의 얼굴은 정말로 정교하게 빚어낸 아름다운 조각상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유하령이 어릴
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눈빛은 의외로 엄청나게 냉랭했으며 심지어 오싹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그녀는 그저 그렇게 유하령을 한 눈 보고는 눈빛을 거두었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유강후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온다연은 유강후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떠보았다.“아저씨?”유강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하령은 온다연에게 달려들어 험상궂게 삿대질하며 말했다.“누구보고 아저씨라고 하는 거야?”온다연은 살짝 몸을 떨더니 무의식적으로 뒤로 피했다.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조금의 혈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말소리까지 부들부들 떨렸다.“그럼 난, 난 뭐라고 불러야...”온다연의 이 모습은 마치 정말 유하령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보였다.유하령은 연약한 모습을 한 온다연을 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눈빛으로라도 온다연의 몸에서 살을 파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하지만 유강후가 옆에 있는 관계로 유하령은 너무 나댈 수 없었으며 고개를 유강후 쪽으로 돌려 물었다.“삼촌, 온다연이 왜 삼촌 차에 있어요? 이 여자는 삼촌 차에 탈 자격도 없어요!”“닥쳐!”유강후의 눈빛은 어둡고 냉랭하게 변하더니, 그의 시선은 조금 더 야윈 것 같은 온다연의 작은 얼굴에 쏠렸다.이삼일 안 본 사이에 온다연의 어렵게 생긴 볼살은 또 온데간데없어졌고 눈 밑은 거무스름한 게 딱 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보였다.‘나를 화나게 했으면 자기는 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더 초췌해진 거 같지?’그는 온다연을 빤히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유하령은 이 말을 듣더니 유강후가 온다연을 내쫓는 줄 알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으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들었어? 삼촌이 너 보고 차에서 내리라고 하잖아!”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매를 내리 드리우고는 작은 소리로 유강후를 한번 불렀다.“아저씨!”그녀의 소리는 말랑말랑하고 나지막한 것이 마치 용서를 비는 듯한 느낌이 살짝 깃들어있었다.유강후는 눈빛이 조금 어둡게 변했
유하령이 기억을 더듬을 때부터, 그의 삼촌인 유강후는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가 어릴 때부터 유하령을 아끼고 사달라는 대로 다 사줬지만 사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소외감과 냉랭함이 묻어나 있었다.그리고 이런 소외감과 냉랭함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강후는 태생부터 성격이 야박하고 냉정해서 유하령한테 뿐만아니라 전체 유씨 가문 사람들한테도, 심지어 그의 아버지인 유재성한테도 그랬으며 다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이 몇 년간, 유하령이 본 유일하게 유강후와 가깝게 지낸 사람이 바로 나은별이었다.하지만 나은별은 그의 약혼녀이자 앞으로 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근데 온다연이 뭐라고? 걔는 그저 유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한 마리 개나 다름이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삼촌의 아낌을 받는 거야? 그저 눈이 멀었다고?’유하령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앞으로 다가가 유강후의 팔을 잡고 놀랍고 화난 말투로 물었다,“삼촌, 뭐 하는 거예요? 잘 보세요. 이 여자는 온다연이에요. 그 첩의 조카라고요. 심지어 며칠 전에 사람까지 때려서 지금 온갖 사람들이 이 여자를 찾고 있다고요!”유하령이 한마디를 할 때마다 온다연은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곤 하였다. 그녀는 유강후의 품에 옹크린 채 그의 옷깃을 한사코 잡고 있으며 온몸을 떠는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면서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냉랭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쳐다보았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쌀쌀한 기운과 살벌한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은 눈빛으로 유하령을 쳐다보았다. 이에 놀란 유하령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삼, 삼촌...”유하령은 벌벌 떨었다. 그녀는 20년 동안 자신을 아끼던 삼촌이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유강후는 쌀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유하령, 난 이미 너에게 경고했었어. 내가 누구에게 잘 해주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
“강후야, 얘가 왜 네 집에 있어?”유자성은 유강후가자기의 친 동생이 자기 아내의 조카를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감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았으며 그저 이마를 찌푸렸다.“고씨 가문에서 계속 얘를 찾고 있었어. 네가 얘를 숨겨놓은 거야? 그러니까 고씨 가문에서 온갖 곳을 뒤져도 얘를 찾아내지 못했지!”이 말에 온다연은 더욱 부들부들 몸을 떨었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몇 번 살살 토닥이고는 엄청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유강후는 자기의 맏형을 보며 눈 밑의 싸늘한 기운이은 더 짙어졌도로 증가했다.“형이 여긴 웬일로 왔어요?”유자성은 아직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있는 온다연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쟤가 왜 이곳에 있는지부터 말해.”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온다연을 안은 손에 힘을 꼭 주면서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방 안에 들어온 후, 유강후는 온다연을 소파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려고 한 순간, 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정교한 얼굴은 혈색 한 점 없이 하얗고 그 잠깐 사이에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귀밑머리를 적셨다.그녀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않은 두 눈에는 선명하게 초조함이 깃들어있었다.유강후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 내리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살랑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다연아, 내 영역에서 널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없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묵직한 것이 사람에게 믿음을 안겨주었다.온다연은 조금 긴장을 푼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그의 옷깃을 잡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지금 그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말해줄 건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보며 침착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넌 그들에게
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고씨 가문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난 그저 지금 미래 그룹과 무한테크가 합작 관계이니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고씨 가문에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요?”유강후는 휙 고개를 들더니 아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는 심미진을 보고 눈 밑에는 풍자의 기운이 깃들었다.“그 당시 큰형수가 돌아가신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형은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사코 심미진과 결혼했잖아요. 근데 그 여자의 조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요? 아니면 심미진이 이미 한물 건너갔다는 거예요?”유자성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강후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유강후의 눈빛은 지극히 냉랭했다.“형한테 다연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난 아니에요. 얘가 유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아무리 고양이를 키워도 10년이면 정이 들었겠어요.”이때 심미진이 어느덧 걸어왔다.배가 살짝 나온 심미진은 여주인 행세를 하면서 아까까지도 두 사용인을 지휘해 유강후네 집 복도에 있는 한 쌍의 골동품 꽃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진정한 집주인이 돌아온 것을 보더니 그녀는 얼른 기세를 줄이고는 형수 행세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강후가 돌아왔구나. 너도 참, 집에 여자가 없으니, 생기가 안 돌아. 내가 볼 땐 너도 하루빨리 은별 씨랑...”그녀의 시선은 갑자기 소파에 있는 온다연에게 떨어졌고 이내 큰소리로 외쳤다.“다연아!”온다연은 일어서서 유강후의 옷깃을 살짝 당기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이때 심미진은 이미 다가와 온다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너 어디 갔었어? 그렇게 큰 사고를 쳐놓고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 이 계집애, 온종일 일을 벌일 줄만 알았지. 빨리 나랑 같이 고씨 저택으로 가서 용서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진의 팔목은 갑자기 커다란 손에 잡혔다.“아, 아파!”고개를 들고 보니 유강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다들 그가 방금 한 말에 놀라서 어리둥절했다.특히 심미진은 유강후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뜻이에요?”유강후는 표정도 차갑고 목소리도 차가웠다.“말 그대로예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안색이 더 쌀쌀하게 변했다.“전 오늘 두 분에게 통지하는 것이지 두 분의 의견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형과 형수님께서 이해해주길 바라요.”그러자 뒤에 있던 온다연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아직 내 이모예요.”유강후는 두 눈에 피어난 차가움이 더 짙어진 채 그곳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화연아, 온다연이 좀 불편해 보이니 방으로 데리고 가서 쉬도록 해.”집사가 다가와 온다연을 이끌고 갔다. 유자성과 심미진은 그제야 온다연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심미진은 안색이 좋지 않은 채 온다연 앞을 막아 나서려 했지만 유자성이 붙잡았다.온다연의 모습이 복도로 사라지자 유자성는 비로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눈이 안 보이는 거야?”유강후는 시선을 거두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네, 스트레스가 심해서 실명했어요.”그는 심미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두 달 전 온다연이 버스에 치여 멀리 날아갈 정도였는데 일어나자마자 도망갔어요.”심미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3일 후 한 오래된 동네에서 찾았는데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그중 한 개가 간을 뚫었더라고요. 찾아갔을 때 이미 배가 부어서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때를 생각하면 유강후는 아직도 살을 에는 듯한 그 한기를 느낄 수 있다. 바로 그때 그는 마음을 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온다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심미진을 노려보며 그의 두 눈엔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찾아낼 때까지 사흘 동안 형수님은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형수님은 한 마디도 묻지 않은 것 같았고, 지난 두세 달 동안에도 온다연에 대해 아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