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아니,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멈칫하던 그는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괜찮아. 난 바로 문 앞에 있을 거야.”“아니야, 싫어요!”온다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세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강제로 다시 의자에 앉게 되었다.유강후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나가자마자 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까지 왔어요?”핸드폰 너머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대표님. 30분 뒤에 경찰서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길이 많이 막혀서요.”유강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당장 어떻게든 15분 내로 오세요.”남자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끊은 후 유강후는 바깥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몇 모금 만에 담배꽁초가 되어버렸다.장화연도 따라 나왔다. 그녀는 유강후가 검은색 셔츠만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들어가 계세요, 도련님. 밖은 추워서 감기 걸리실 거예요.”그러나 유강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길가의 가로등을 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화연아,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안 되는구나. 난 지금 당장 다연이 괴롭힌 그놈들을 족치고 싶어.”그놈들이 누구인지 장화연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하지만 그분들은 도련님 가족인걸요.”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고 분위기도 살얼음판이었다.“그놈들이 다연이를 괴롭힌 방식대로 하나씩 전부 다 똑같이 돌려줄 거야. 우리 아버지 제외하곤 난 그 사람들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없거든.”“괴롭힘을 당하는 공포와 치욕을 받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전부 다 알려줄 거야.”장화연은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유민준은 일찍이 온다연의 피곤에 찌든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다연아, 네가 고생했어.”온다연은 머리도 들지 않고 물었다.“이모는 어떻게 됐어요?”유민준은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하면서 대답했다.“아이는 지키지 못했어. 지금 수술 중이야.”온다연은 시선을 숙이더니 옷자락을 꽉 잡았다.“아이가 없으면 또 집안에서 괴롭히는 거 아니에요?”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초췌한 모습에 유민준은 더욱 가슴이 떨렸다. 만약 온지유를 얻을 수 있다면 심미진에게 잘해주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괜찮아. 내가 잘해줄게. 남도 아닌 네 이모인데 당연히 챙겨야지. 아버지한테도 잘 얘기할 거야.”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저는 이모가 유씨 집안에서 원하는 걸 이루기를 바라요.”그러면 그녀도 더 이상 심미진에게 마음의 빚을 지지 않아도 되었다.몽롱한 조명 아래에서 온다연의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민준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넌 당분간 밖에서 지내고 있어. 작은아버지네서 지내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나고 잠잠해진 다음, 내가 다시 데리러 갈게. 집도 준비해 놨어. 때가 되면 우리 둘이 같이 살자.”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그는 황급히 말을 보탰다.“효진이는 내가 정리할게. 네가 싫다면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이대로 몇 년만 참아. 우리한테 애가 생긴다면... 아들이 생긴다면 집안에서도 널 인정할 거야. 다연아, 내가 잘해줄게.”온다연의 눈빛에는 선명한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손을 빼내면서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이효진은 유하령이랑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오빠는 이효진의 약혼자이자 유하령의 오빠예요. 저는 오빠랑 만날 수 없어요.”유민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해야 허락해 주겠어?”온다연은 머리를 들어 평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곧 유민준과 이효진에게 닥칠 일을 떠올리자 삶도 마냥 답답한
온다연은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는 옷에 손을 있는 힘껏 닦았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말이다.이때 유민준이 그녀를 따라와서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강후의 눈치가 보여서 그냥 멈춰 섰다.“다연아, 작은 아버지랑 돌아가. 내가 내일 만나러 갈게.”그는 온다연을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강후가 지켜보는 데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유강후는 그가 아버지보다도 무서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유강후와 팔짱을 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 저 힘들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누가 봐도 유민준을 피하려는 말이었다. 유민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만류했다.“다연아, 아직도 내가 미워?”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끼어들었다.“그게 무슨 말이지? 유민준, 넌 이미 약혼했어. 다른 말 나오지 않게 똑바로 행동해.”유강후의 시선만으로도 유민준은 단단히 쫄았다. 더 이상 입을 열면 안 될 것 같은 경고의 눈빛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소름이 다 났다.본가에서 일어난 일은 유민준도 알았다. 유강후는 유하령의 뺨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회사 투자 계획도 철수했다. 그날 유자성과 크게 싸웠다는 말도 들렸다.유민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유강후가 유하령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하령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줬다. 심지어 한 번은 비행기까지 선물했다.유강후와 유자성은 사이가 좋았다. 유민준이 알기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유민준에게도 엄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 줬다.그런 유강후가 온다연 때문에 집안과 척을 진 것이다.유민준의 기억 속에서 유강후는 좋은 작은아버지였다. 그런데도 거리감은 언제나 유지했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타고 난 냉혈한인 그는 유재성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유하령을 그렇게 아끼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발짝도 못 들어가게 했다.
온다연이 차에 탄 것을 보고 그는 더욱 급해졌다.“다연아, 네가 말한 거 내가 잘 생각해 볼게. 금방 연락할 테니까 절대 날 차단하지 마. 알았지? 내가 꼭 연락할게.”자꾸만 쫓아와서 말하는 유민준 때문에 온다연은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러나 유강후가 곁에 있기에 빨리 대답해 버렸다.“알았어요. 이만 돌아가요.”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뒤로 기대 빨리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그녀의 외면에 실패감이 들었는데도, 유민준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인내심 있게 말을 이었다.“네 이모 일도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아버지한테 잘 말할게.”이때 유강후가 차에 올라타서 유민준의 시선을 막았다. 차는 퍽 소리를 내며 닫혔고 금방 멀어져갔다.출발한 지 2분 정도 지나 온다연이 물었다.“아저씨, 여기 물 있어요?”유강후는 그녀가 목이 마른 줄 알고 물을 가져다줬다.“차가운 물이야. 적게 마시고 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물 마시자.”온다연은 말없이 뚜껑을 열고 손을 창밖으로 뻗었다. 그러고는 물을 손에 쏟아서 한참이나 씻었다.창밖에서 찬물이 닿은 손은 금방 빨개졌다. 더군다나 자꾸만 비벼서 살이 떨어질 지경으로 달아올랐다.그녀의 이상 행동을 보고서도 유강후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 하얗고 예쁘던 손이 빨갛다 못해 보랏빛을 띠자, 그제야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유강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목소리도 약간 차가워졌다.“손 버리고 싶어? 이 추운 날에 찬물로 씻으면 어떡해.”그는 온다연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에 꼭 감쌌다. 차가운 살얼음이 한층 낀 것 같은 온도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추워졌으니 말이다.얼음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잡고 있었는데도 녹여지지 않자, 그는 온다연의 손을 외투 속으로 넣었다.손이 얇은 한 장의 셔츠를 두고 복근에 닿자, 온다연은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온도였다.지금껏 쌓였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기
유강후는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말은 안 해도 온다연이 부탁한 일을 벌써 지시했다.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갑자기 속상해진 그는 그녀를 본가에 데려간 자체가 후회되었다.그는 자신이 있는 한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있었다.‘괴롭힘이 습관이 된 건가? 아니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어찌 됐든 그는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잠시 후 온다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 내일도 경찰서에 가야 해요?”유강후는 느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부르면 가야겠지?”온다연은 약간 굳은 몸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저는 이제 가기 싫어요...”“나랑 변호사가 같이 갈 거야. 걱정할 것 없어.”온다연은 이제야 약간 안심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우리 이모는 정말 유산한 걸까요?”유강후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마도.”“근데 저 진짜 이모를 밀지 않았어요. 맹세해요.”“알아.”“이모는 왜 그런 걸까요? 전에는 저한테 잘해줬는데, 왜 갑자기...”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진이 한 모든 행동이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는 하도 찔려서 무감각해질 지경이었다.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미진이 남과 손을 잡고 유일한 혈족인 그녀를 괴롭히는 이유를 말이다.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어.”그의 옷깃을 꽉 잡은 온다연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게 맞아요. 제 물건이 아직 그곳에 있잖아요.”“중요하지 않은 거면 버려도 돼. 내가 새로 사줄게.”“엄마가 남겨준 물건이에요. 꼭 가져와야 해요.”유강후는 자그마한 상자가 떠올라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어?”“그건 제 비밀이에요. 아저씨한테도 알려줄 수 없어요.”얌전
유강후의 방향에서는 온다연의 빵빵한 볼과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만 보였다. 그녀의 상자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물론 그는 열어 볼 계획이 없었다. 그저 내용물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니 괜히 더 놀리고 싶었다.“가까이 와봐.”유강후는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내 말 안 들을 거야?”유강후는 원래도 남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강압적인 말투를 쓰자 그 아우라는 더욱 강해졌다.짧은 한마디에도 온다연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천천히 몸을 돌려 유강후의 곁으로 돌아갔다.얼굴에는 아직도 화난 표정이 있었다. 입술은 하도 깨물어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을 톡톡 누르며 말했다.“깨물지 마. 또 찢어지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잊었어?”온다연은 시선을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아저씨가 먼저 약속 안 지켰어요. 거짓말쟁이예요.”유강후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난 봤다고 한 적 없는데?”“몰라요! 이제 상자는 제가 직접 보관할 거예요!”온다연은 드디어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상자에 묻었던 흙을 떠올리며 유강후는 눈썹을 튕겼다.“어디에 보관하게? 땅속?”그의 말투에 숨은 비웃음을 들어낸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비밀이에요!”유강후는 그녀가 귀 끝까지 빨개진 것을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말투도 덤덤하기만 했다.“네 물건 본 적 없어.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근데 넌? 나랑 한 약속을 안 지켰네? 이제 어떡할까?”온다연은 머리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댔다.“제 입술을 깨무는데 뭐가 문제예요.”반항기가 섞여 있는 말투였다.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누가 네 거라고 했어? 이제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내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
후퇴의 여지를 주지 않은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감당할 수 없는 직전까지 몰아붙였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늦었다. 유강후는 가는 길에 잠든 온다연을 침실까지 안아갔다.그녀는 아주 고된 밤을 보냈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열부터 끓어올랐다. 유강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주성원은 별다른 말 없이 해열제를 처방했다. 그 외에 보탠 것이라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아침이 되니 열이 내렸다. 그러나 아프고 일어난 온다연은 축 처져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오후까지 자고 나서야 무기력감이 조금 가셨다.유강후는 이 시간에 보통 집에 없었다. 온다연은 그가 거뒀던 물건이 떠올라서 슬금슬금 서재에 가서 한참 어슬렁거렸다.‘대체 금고는 어디에 있는 거야?’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는 슬슬 집 구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금고는 찾아내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중요한 물건이 금고에 있다. 찾기 어렵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구석구석 샅샅이 뒤졌는데도 금고는 끝내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닌 온다연은 장화연을 찾아가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유강후의 취미나 습관 같은 것을 말이다. 그의 습관만 알아도 금고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었다.장화연은 냉랭한 얼굴로 묻는 것만 대답했다. 유용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다연은 급한 마음을 티 내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후 5시쯤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창가에 서서 눈을 구경했다.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니트 세트를 입고 있었다. 크림색은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썹도 유난히 돋보였다.기온은 하루가 멀다 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몸이 약했기에 장화연이 미리 집안 온도를 높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케이프를 걸쳐줬다.부드러운 양털 케이프는 한눈에 봐도 비쌌다. 그만큼 따듯
온다연은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나갔다. 유민준의 차는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그는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버린 담배꽁초만 봐도 한참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유민준은 얼굴만 유강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취향도 닮았다. 온다연이 이런 착장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눈빛에는 빠르게 빛이 돌았다.“다연아, 난 네가 나올 줄 알았어.”온다연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거리를 유지했다.“무슨 일로 왔어요?”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유민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리감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났다. 그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소유욕과 패배감이 샘솟았던 그는 다소 충동적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했다.“밖에 추워. 차에서 말하자.”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됐어요. 여기서 얘기해요. 오빠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오해할 소지를 만들면 안 된다고, 아저씨가 그랬어요.”나른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유민준은 대문을 지키는 장화연을 힐끗 봤다. 답답하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네 이모를 만나고 왔어. 아이를 잃고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아.”온다연은 심장이 아프면서 답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오빠한테는 좋은 일이겠어요.”“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네 이모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크게 관심도 없어. 그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나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아. 그 아이는 평생 서자로 살 수밖에 없어. 내가 손을 쓸 가치는 없다는 말이야.”익숙한 말이다. 얼마 전 유강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유씨 가문은 출신을 많이 따진다. 온다연도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유씨 집안사람다운 말이네요.”“다연아, 그러지 마. 내가 전에 기분 나쁘게 했던 일은 전부 보상할게. 나 별장도 사놨어. 이제 가구만 들이면 되니까 네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