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곰돌이. 유강후의 프로필 사진은 자그마한 곰돌이였다.그는 온다연이 좋아하는 줄 알고 바꾼 것이다. 지난번 그에게 선물한 커프스 단추도 귀여운 곰돌이 모양이었기 때문이다.그건 그녀가 처음으로 선물해 준 물건이다. 하도 귀해서 아직 써보지도 못했다. 사진으로 찍어서 혼자 감상하던 중 보면 볼 수록 마음에 들어서 프로필 사진으로 해놨다.그날로 SNS는 난리가 났다. 오전 사이로 유재성까지 전화가 와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게 영원을 지나가는 길에 회사까지 찾아왔다.더욱 시끄러운 건 한이준이었다. 그는 유강후가 납치라도 당한 줄 알고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얌전한 모습이 온다연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귀여운 걸 사람들은 왜 유난인지 이해가 안 갔다.그는 핸드폰 넘어 곰돌이를 쓰다듬다가 이권에게 문자를 보냈다.[다연이는 뭐 하고 있어?]이권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침실에 계셔서 뭐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들어간 지 세 시간이 됐는데, 제가 노크해서 확인할까요?][됐어. 잠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둬. 밖에 나오면 나한테 문자 보내고.][네, 알겠습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기사한테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이 말은 나은별한테 하는 것이었다. 나은별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그 잠깐 같이 있는 것도 안 돼? 아버님이 가시자마자 날 쫓아내는 거야? 강후야, 너 저기 기억해? 진수도 있을 때 우리 자주 갔었잖아. 네 18살 생일도 저기서 보냈어.”나은별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실은 나 어제 꿈에 진수가 나왔어. 너랑 진수가 같이 바다에 빠지는 꿈이었어...”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때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강후야, 나 진수 보고 싶어. 곧 진수 생일이잖아. 우리 저기라도 가보면 안 돼?”옛친구가 언급되자 유강후는 침묵에 잠겼다. 그는 한진수의 희생 덕분
온다연은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 건너편에서는 그녀의 숨소리만 들렸다.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혼자 호텔에 돌아갔어?”“네. 아저씨는... 가족분이랑 같이 있어요?”핸드폰을 사이 두고도 유강후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도 화가 나 있어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온다연은 혼자 호텔에 돌아갔다. 문자도 전화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녀는 10살도 아닌 20살이었다. 그런데도 철없이 연락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됐다.그는 완전히 잊었다. 온다연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그녀는 뭐든 혼자 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는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선택도 한다.유강후는 핸드폰을 꽉 잡으며 말했다.“난 친구랑 같이 있어. 저녁에 늦게 돌아갈 거야. 룸서비스 시킬 테니까 그거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온다연은 짧게 대답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이때 나은별이 갑자기 웃으면서 끼어들었다.“다연 씨예요? 나 강후랑 같이 있어요. 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 갈 건데, 다연 씨도 같이 갈래요?”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온다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다연 씨도 여기 있었어? 왜 한 번도 못 봤지?”“응.”유강후는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온다연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다.그러자 나은별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는 온다연과 통화하던 유강후의 말투가 아주 거슬렸다. 함께 자란 사이이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았다.유강후는 태생이 냉랭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그가 먼저 온다연의 상황을 알아봤다. 심지어 늦게 돌아간다는 설명과 함께 저녁 식사도 챙겨줬다.사실 나은별은 괘 오래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성인 남녀가 함께 살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유강후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온다연은 그저 며칠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나은별이 등장했다.잠시 앉아 있던 그녀는 또다시 비밀 계정에 로그인했다. 오전에 올린 글은 벌써 꽤 화제가 되고 있었다.지금쯤 이효진은 스팸 전화와 문자에 꽤 골치를 앓고 있을 것이다. 온다연에게 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받는 셈이다. 이 생각에 온다연은 속이 후련했다.이효진에 관한 글을 잠시 보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계정을 클릭했다. ‘별&강’이라는 계정이었다.몇백 명의 팔로워가 있는 이 계정은 나은별의 비밀 계정이었다. 이걸 찾으려고 온다연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이 계정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올린 것은 자잘한 일상생활이었다. 그 속에는 유강후의 그림자도 볼 수 있었다.지난번에 올린 사진은 반지를 끼고 있는 나은별의 손이었다. 반지에 새겨져 있는 자그마한 Y는 모든 걸 설명했다.이번에 다시 확인하니 계정의 프로필 사진은 곰돌이로 변해 있었다. 유강후의 프로필 사진과 똑같았다.온다연은 또다시 가슴이 아팠다.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면서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커플 프로필 사진이겠지.’잠시 후에야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만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은별이 또 무언가 올린 것을 발견했다.두 사람이 깍지 낀 손을 찍어 올린 사진이었다. 약간 희미하기는 했지만 남자의 중지에 은색 반지가 있는 것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다음 사진에서 두 견지의 옷은 마구잡이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곁에는 힘줄이 튀어나온 팔뚝이 보였다.온다연의 머릿속에는 자동으로 유강후와 나은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봤던 유강후의 모습을 나은별도 똑같이 봤을 것 같았다.원래는 달콤하기만 했던 기억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그녀는 참다못해 결국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전화 건너편에서는 나은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 씨, 강후는 샤워 중이에요. 무슨 일이에요?”목소리 중에는 신음도 들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남자는 방에 잘못 들어왔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잠든 온다연을 발견했다.물안개 속에서 자그마한 몸집은 의자에 완전히 담겼다. 비단 같은 머리카락은 몸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남자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시선이 완전히 꽂혔다. 공기 중에 드러난 하얀 다리와 의자 아래로 툭 떨어진 손은 특히 매력적이었다.작은 덩치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아서 쉬운 인상을 줬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몸을 훑어봤다. 얇은 발목은 한 손으로 잡힐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몸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남자는 예쁜 여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러나 얼굴을 보기 전에도 마음이 끌리는, 정확히 몸이 끌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이곳은 VIP 온천탕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걸 망각할 정도로 온다연이 아름다웠다.그는 휘청거리며 온다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피부는 유독 하얗게 빛났다.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얼굴에 붙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온다연이 울며 애원하는 모습으로 가득했다.가장 놀라운 것은 얇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볼륨이었다. 곁으로 누워서 드러난 얇은 허리 라인도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잡고 싶게 했다.남자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얇은 허리를 잡힌 채 자신에게 매달리는 온다연을 말이다. 취기가 가시지 않는 머리는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했다.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평생 가장 후회할 결정을 했다. 그는 결국 온다연에게 손을 뻗기로 했다.이제는 그녀가 누구든지 상관없었다. 정 안 되면 결혼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영원에 그가 얻지 못할 여자는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결정을 내린 그는 주저 없이 온다연의 위로 올라타 얼굴에 마구 입을 맞췄다. 한순간 잠을 깬 온다연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포박하며 위로했다.“괜찮아. 괜찮아. 살살할게. 내가 진짜 좋아서 그래. 책
남자는 강압적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때마다 온다연은 머리를 박았다. 이제는 그녀마저 어지러울 정도였다.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시선을 완전히 가렸다.그녀는 기회가 될 때마다 몸을 일으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다리를 잡으면서 못 가게 했다. 그녀가 반항할수록 더 흥분하는 모습이었다.남자가 다리를 잡아당기자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자 남자는 또다시 위로 덮쳐왔다.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역시 난 당돌한 게 좋아. 도망가지 마. 어차피 도망도 못 갈 테니까.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해줄게.”거친 키스에 온다연은 입술이 다 찢어졌다. 그녀는 다리를 허우적대며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그럴수록 남자는 더 흥분해서 입술을 비벼댔다. 술 냄새로 가득한 혀가 입안을 휘젓자, 그녀는 급기야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몸을 마구 만져댔다. 그녀는 반항하다가 손이 먼저 풀려났고, 그러다가 차가운 감촉의 물건을 잡았다. 확인하니 과일과 함께 놓여 있던 과일칼이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칼을 휘둘러 남자의 등을 찔렀다. 칼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휘청거리다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온다연은 넋을 잃었다. 급소를 찌른 것인지 피는 무서운 속도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사람을 죽여 본 적 없다.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도 처음인지라, 겁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렸다.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럴 수 없었다. 그 사이로 피는 더욱 많이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이 사람 죽은 건가? 내가 사람을 죽였어?’그녀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 순간 호흡하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피가 그녀의 발끝에 닿을 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두리번거리다가 핸드폰을 발견했다.핸드폰을 주워 든 그녀는 유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려오는 몇 초가 몇 세기는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곧이어 유강후의 목소리가 들려왔
유강후는 핸드폰을 꽉 잡은 채 기사에게 말했다.“최대한 빨리 운전해 주세요.”이때 적신호가 켜졌다. 유강후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신호등 신경 쓰지 말고요.”다행히 거리에 차가 없어서 차는 최대속으로 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호텔 로비에 들어가자, 이권과 지배인이 보였다. 지배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온다연 씨는 온천탕에...”유강후는 지배인의 말을 마저 듣지도 않고 말했다.“데려다줘요! 당장!”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유강후는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온다연은 처참한 몰골로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얼굴에는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붉은 자국도 가득했다.중간에는 등에 칼이 꽂힌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출혈 정도로 봤을 때 아직 살아 있기는 한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유강후의 눈빛에는 순간 살기가 맴돌았다. 그는 외투를 벗어서 온다연에게 걸쳐주고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이제 다 괜찮아. 나한테 기대.”그는 이토록 신경 썼는데도 문제가 생길 줄 몰랐다. 그것도 호텔 내부에서 말이다.온다연의 눈빛에는 이제야 약간의 빛이 돌았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어서 겨우 목소리를 냈다.“제가 사람을 죽였어요... 저 사람이 갑자기 들어와서 물고 뜯고 옷을 찢어서... 그래서 칼로 찔렀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저 사람 죽을까요?”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위로하듯이 얼굴에 뽀뽀했다.“괜찮아. 안 죽었으면 내가 죽일 거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널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야. 이제 내가 처리할게.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그는 온다연의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그래서 훌쩍 안아 올리며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등을 토닥였다.“죽어도 싼 놈이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안심하고 자.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일이 다 해결되어 있을 거야.”뒤따라 들어온 이권은 남자의 생사를 확인하고 말했다.“이 사람 아직 살아 있어요. 이제 어떡할까요?”유강후는 말없이 온다
“오늘 일어난 일은 호텔 측의 과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임 지배인. 오늘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유강후가 문을 나설 때까지 매니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은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이권이 답했다.“호텔을 봉쇄하세요. 오늘 연회에 참석한 분들한테 곧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여유로운 날도 이제 끝났어요.”지배인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오윤호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이권은 오휸호에게 다가가 발로 가볍게 차며 동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참 불쌍하죠. 아무래도 대표님이 직접 나설 작정이니까 구급차 불러줘요. 죽으면 큰일 나요.”잠시 후, 호텔 입구에 수많은 경찰이 모여들었다.영원에서 이름 있는 인물들은 줄줄이 끌려 나갔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다만, 어떤 실세를 잘못 건드려서 체포된 것만은 분명했다.스위트룸 안에서,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럽게 욕조에 담갔다.욕조에서 그녀의 목욕 가운을 벗겼을 때, 그의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팔, 가슴, 목, 그리고 다리에는 수많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입술도 터지고, 이마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등은 심하게 긁혔다.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유강후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는 부드러운 수건을 들고 온다연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기 시작했다.온다연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옷깃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유강후가 씻겨주는 동안에도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완전히 그에게 맡겼다.온몸을 깨끗이 닦고 나서야 온다연은 가볍게 말했다.“더러워요, 더 씻어줘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더러워. 세상에서 우리 다연이가 제일 깨끗해.”온다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허했다.“아니에요. 더러
유강후의 강렬한 입술과 혀가 그녀의 입안을 휩쓸었다. 마치 그녀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려는 듯했다.한참이 지나서야,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또 이마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더럽지 않아. 이제 깨끗해졌어.”온다연은 여전히 세면대 모서리를 꽉 잡고 놓지 않았다.“아니에요. 몸은 더러워요. 더 씻을래요.”유강후는 그녀의 생기를 잃은 눈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속삭였다.“더럽지 않다니까. 내가 씻겼는데 그것도 모를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카운터에서 내려와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오윤호에게 당한 흔적들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세면대 위에 있는 칫솔을 집어 들었다.뽀각 소리와 함께 칫솔이 두 동강 났다. 그녀는 끊어진 칫솔로 목에 가득한 붉은 자국을 힘껏 긁어내기 시작했다.유강후가 급히 칫솔을 빼앗았을 때, 온다연의 하얀 목에는 이미 여러 개의 상처가 생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난 상처를 보고 가슴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온다연의 몸에 난 모든 상처는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남겼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증명이자 치욕이었다.온다연은 그의 영역에서 상처받고 모욕당했다. 이 일과 관련된 사람들은 반드시 백 배, 천 배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세면대 위에 앉혔다. 목에 맺힌 핏방울들을 부드럽게 입술로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착하지. 이제 더럽지 않아. 내가 깨끗하게 씻겼어.”온다연은 생기 없는 눈으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더러워요. 그냥 피부를 찢어내서 새 피부가 자랐으면 좋겠어요.”짧은 그 한마디가 유강후의 손에 핏줄이 돋게 했다.그녀를 괴롭혔던 사람들 모두, 한 명도 빠짐없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그는 천천히 그녀의 피부 위에 남겨진 붉은 자국들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자국으로 이전의 흔적을 덮으려는 듯이 말이다.오랜 시간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