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신경은 온통 온다연에게 가 있었고 남하윤의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다만 유감스럽게도 온다연은 그를 등지고 앉아 있었던지라 계속 유강후를 빤히 보게 되었다.한참 지난 후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작은 식당 화장실 옆엔 문이 하나 있었다. 온다연은 화장실 가는 척 그 문으로 나갔다.2분 뒤, 주희도 그 문에서 나왔다.“누나.”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그녀를 불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온다연은 흐트러진 그의 옷깃을 정리해주며 작게 말했다.“연예계 들어가기로 한 거야?”주희가 답했다.“네, 돈 좀 벌려고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어떤 길을 걸어가든 누나는 널 말릴 생각 없어. 하지만 아직 수능을 못 쳤잖아. 적어도 수능은 끝내고 해.”주희는 온다연의 손을 꼬옥 잡으며 결의에 찬 어투로 말했다.“저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누나가 매일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만 떠올리면 너무 괴로워서 버틸 수 없어요. 게다가 누나는 제 약값까지 감당하고 있잖아요. 누나가 힘들게 사는 게 싫었어요. 요즘엔 누나가 유강후랑 함께 살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유강후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사람이라고요. 누나, 전 더는 누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소년의 눈빛은 단호했고 두 눈엔 오로지 온다연만 담고 있었다.온다연은 손을 빼내며 문 쪽을 힐끗 보더니 작게 말했다.“여긴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아. 짧게만 말할 수 있으니까 잘 들어야 해.”“첫째, 일단 수능부터 봐. 두 번째, 네 형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세 번째,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너랑 상관없는 일인 거야. 내가 죽든 말든 모른 척하고 살아. 이건 내가 네 형한테 빚진 것이기도 하고 너한테 빚진 것이라고 하니까...”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희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말했다.“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발걸음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리자 마음 급해진 온다연은 있는 힘껏 주희의 손을 떼어낸 후 밀어버리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작은 나무문이 닫힌 순간 모퉁이에 서 있는 유강후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키가 아주 컸던지라 좁은 복도에 서 있기만 해도 공간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기분이 들어 숨이 막혀왔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곤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우리 돌아가요. 저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아요.”바깥에서 다소 오래 서 있었던지라 그녀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고 손도 차가웠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환자 같았고 보기만 해도 나약하고 가련해 보였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몸이 왜 이렇게 찬 거지?”온다연은 행여나 주희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올까 봐 겁이 나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아파요.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집으로 가요, 네?”불빛 아래서 본 그녀의 얼굴은 더 창백했다. 입술엔 혈기도 없어 유강후는 정말로 그녀가 아픈 줄 알고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해버렸다.“안 돼요. 여긴 아저씨 지인이 있잖아요.”망을 마친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물건을 챙긴 뒤 계산을 했다.유강후는 그녀가 수상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의심을 지우게 되었다.나가기 전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힐긋 보았다.주희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주희의 얼굴은 주한과 닮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빤히 보고 있을 때 그 눈빛은 죽은 주한과 똑같았다.온다연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더는 그를 볼 겨를이 없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가버렸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장화연은 이미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두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 욕조에 담근 후 꼼꼼히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그런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유강후는 천천히 강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그녀를 탐했다. 그녀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부끄러워하면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한때 경원에서 잘 나가던 부잣집 딸 고유정이 이런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물론 사람들의 호기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더 큰 소식이 퍼졌다. 바로 이씨 가문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조사를 받게 된 원인은 이씨 집안의 딸 이효진이 영원에서 대놓고 남자를 불러 거창하게 놀았기 때문이다.이효진의 진짜 SNS 계정을 찾아낸 사람들은 그녀가 올린 사치스러운 사진과 영상에 넋을 잃고 말았다.몇억이나 하는 슈퍼카에 가치가 억에 달하는 보석까지, 그리고 엄청나게 호화로운 커다란 별장 전부 그녀가 찍은 영상에 나왔다.게다가 이효진은 부계정을 만들어 네티즌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간간이 [내가 누구 딸인지 알아?]라는 댓글도 달았다.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네티즌들이 이효진을 신고하면서 엄밀하게 이씨 집안을 조사해주길 바란다는 청원을 올렸다.이씨 집안은 여론의 압박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되었고 수색영장도 떨어졌다.이씨 집안에 폭풍우가 휘몰아쳐 곧 망할 것 같았다.이러한 사람들과 인기 검색어 순위를 다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연예인 주혜성이었다.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예능을 하게 되었다. 뛰어난 예능 감각과 꿀 바른 듯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인기도 치솟았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 몇 개월이 지났다. 온다연의 고양이 구월이도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오후에 경원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구월이도 데리고 갔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원에 급한 일이 생겨 유강후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몇 시간 뒤, 유씨 집안 집사인 주석진이 찾아왔다.“온다연 씨, 사모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셋째 회장님께서도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셋째 회장님은 유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유씨 집안의 셋째였던지라 젊었을 땐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셋째 회장님이라고 불렀고, 셋째 도련님은 유강후의 호칭이 되었다.온다연은
차는 빠르게 달려 유씨 가문 본가로 왔다.차가 멈추자마자 온다연은 강제로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커다란 거실엔 유재성을 제외한 유씨 집안사람 전부 앉아 있었고 다들 사나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보고 있었다.특히 최금영의 눈빛은 꼭 그녀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유자성의 표정도 한껏 일그러졌다.비록 유자성은 예전에도 온다연에게 눈길을 준 적 없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었다. 이렇듯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보아하니 그도 온다연을 죽여버리고 싶은 듯했다.이들 중에서 오직 심미진만이 복잡하고 난감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이들을 본 온다연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유강후의 관계를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다.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발밑으로부터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오늘 어쩌면 정말로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유하령을 보았다.주먹을 꽉 움켜쥐며 생각했다. 만약 이 집에서 죽게 되면 반드시 유하령과 함께 죽이리라 말이다.이때 유하령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가와 손을 올리더니 그녀의 뺨을 갈궜다.“천박한 년!”온다연은 몸을 굽히며 유하령의 손길을 피해버렸다.그리고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보더니 머리채를 확 잡고 힘껏 벽에 받아버렸다.그녀는 비록 키가 작았지만, 막상 궁지에 몰리게 되면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다.유하령은 소리를 질렀다. 벽에 머리가 부딪치고 나니 어질거렸다.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온다연, 이 천박한 X! 지금 날 때린 거야?!”온다연은 그녀가 일어서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또 벽에 받아버렸다.유하령의 이마엔 어느새 피가 흘러나왔고 엄청난 통증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까진 이마를 만졌다. 손에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그러더니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아아악! 감히 날 때렸어! 이 미친 X이!”온다연은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난 왜 널 때릴 수 없는데? 네가 뭐라고?”
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담긴 악의를 발견한 유하령은 멈칫하더니 이내 화를 냈다.유하령은 또 온다연을 때리려 했다.이때 유민준이 방에서 나와 달려오며 말했다.“그만해!”온다연이 유하령에게 맞고 있는 모습에 유민준은 얼른 달려와 유하령을 밀쳐냈다.그리고 온다연을 붙잡고 있던 두 사용인에게 뺨을 때렸다.“이거 놔!”그는 온다연을 잡았다. 긴장한 얼굴로 온다연의 뺨을 살폈다.“아파? 많이 아프지?”온다연은 뺨을 감쌌다. 터진 입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나와 하얀 옷 위에 떨어져 가슴 아프게 했다.유민준은 너무도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린 뒤 유하령을 노려보았다.“네가 뭔데 다연이를 때리는 거야?”유하령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오빠, 이제야 걱정해주는 거야? 그런데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오빠는 잊었나 봐, 예전에 저 X을 본인이 어떻게 대했는지. 겨우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용서해 줄 것 같아? 저 X이 예전에 오빠가 했던 짓을 전부 잊어줄 것 같냐고!”그녀는 온다연을 가리키며 악독한 말만 내뱉었다.“똑똑히 봐. 얘는 오빠가 어릴 때부터 괴롭혔던 애라고! 오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릴 때부터 괴롭혔던 애를 좋아할 수 있는 거야? 겨울에 얘 옷에 얼음 가득 넣고, 여름에 난방 끝까지 올려놓은 방에 가둔 사람도 오빠잖아. 설마 오빠는 자신이 괴롭혔던 사람이 취향인 거야?”유민준의 표정이 굳어지고 서늘한 한기를 뿜어냈다.유하령의 말은 아버지에게 훈계를 당하고 온 가족의 반대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그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10년 전으로 가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 차릴 수 있게.온다연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신임을 잃고 온 가족의 지지를 잃게 되었을 때보다 더 백 배, 천 배 더 고통스러웠다.그는 고개를 홱 돌려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다소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다연아,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렇지? 말해줘, 얼른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 네
강한 바람이 정원에 있던 나무와 풀을 흩날리며 착륙했다.집 안에 있던 사람도 그 소리를 듣고 전부 밖으로 나왔다.유자성은 그 헬기가 유강후의 헬기임을 알고 있었던지라 눈빛이 어두워졌다.지금 이 순간 그는 온다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눈길 한번 주지 않은 고아가 자기 아들에게 꼬리 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생마저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유씨 집안은 그녀를 재워주고 먹여주었는데 그녀는 집안을 망치려 들고 있었다.‘더는 살려둬서는 안 되겠어!'한참 후, 헬기는 저택 정원 잔디밭에 착륙했다.헬기가 착륙하자마자 유강후는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내렸다.그는 검은 옷에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 기세는 아주 싸늘해 보는 사람마저 등골이 서늘해지게 했다.유강후는 빠르게 유자성에게로 다가갔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유자성은 순간 자신과 함께 20년 넘게 자란 이복동생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유씨 집안사람 중 유강후가 가장 행동력이 빠르게 인내심이 있다는 것을.그리고 유일하게 아버지 유재성의 두뇌를 물려받은 사람이기도 했다.유강후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엔 유강후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자신이 아무리 유강후의 형이라고 해도, 유강후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실권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유강후였다.게다가 유자성은 알고 있었다. 그때 그 일 후로 유강후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을. 집안사람들에겐 여전히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사실 유강후는 가족애라는 것이 없었다.이 집안에서 유강후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유재성이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한낱 고아 때문에 자신을 적으로 돌리려 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유자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를 띄었다.‘그 고아, 아무래도 정말로 살려둬선 안 되겠어!'‘형제 싸움은 절대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유강후가 다가오기도 전에 유자성이 차갑게 말했다.“뭐냐, 가족도 아닌 남을 위해
“하령이한테서 들어보니까, 그 천박한 것이 학생 때부터 더럽게 몸을 굴리고 다녔다더구나. 이미 더러운 몸이었으면서...”“그만 하세요!”유강후는 유난히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은 어디에 있죠?”최금영은 이렇듯 화를 내는 유강후의 모습은 처음이었던지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내 부아가 치밀었다.“지금 나한테 소리를 지른 거니? 그 천박한 것을 위해 나한테? 넌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해? 피도 안 섞인 남을 위해 자신의 형한테도 예의 없이 굴고. 왜, 이젠 이 늙은 할미한테마저 그렇게 굴 거니?”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다시 유자성에게 시선을 돌렸다.“대체 뭐 하신 겁니까? 또 10년 전과 똑같은 짓을 반복하시려고요? 제 누나 유연서가 어떻게 죽은 건지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 짓을 이번엔 온다연에게 또 똑같이 반복할 생각이신 거예요?”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목과 이마엔 핏줄이 툭 튀어나와 있었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꿈 깨세요!”그의 말에 최금영과 유자성의 표정이 확 변했다.유연서는 유씨 집안의 아픔이자 비밀이었다. 그리고 유강후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유재성과 유강후에겐 엄청난 상처가 된 일이었다.어느 한번은 유씨 가문에서 20년 넘게 일한 사용인이 유재성의 앞에서 유연서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늘 말수가 없고 무뚝뚝하던 유재성은 바로 화를 내며 경호원을 불러 쫓아내 죽일 뻔했다.그랬기에 그 뒤로 누구도 유연서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강후가 유연서의 이름을 언급하자 최금영과 유자성의 안색이 변했다.최금영은 부아가 치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유강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엄숙하게 말했다.“너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너도 네 아빠와 똑같구나. 다들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유강후는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 두 눈에 담긴 음험함에 최금영은 다소 멘탈이 무너지며 눈물을 흘렸다.“나도 알고 있다. 너와 네 아빠가 날 원망하고 있
유강후는 우뚝 멈추어 섰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저 차갑게 말할 뿐이다.“형, 형은 본인만 잘 숨기고 있으면 아무도 형수님이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모를 거로 생각해요? 형이 어떻게 지금 형수랑 결혼할 수 있었는지, 형이 더 잘 알겠죠!”유자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등 위로 퍼런 핏줄이 드러났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음험해진 눈빛으로 떠나가는 유강후의 뒷모습만 빤히 보았다.유씨 가문 본가 물탱크 옆에 작은 창고가 있었다. 평소엔 장비들을 보관해두는 곳이었지만 가끔 사람을 벌하는 방으로 쓰기도 했다.온다연은 이곳에 한두 번 갇혀본 것이 아니었다.과거의 수많은 시간 동안 그녀는 수없이 이곳에 갇혔었다.제일 오래 갇혀 있었던 적은 유하령과 유민준이 밀어 넣은 그때였다. 그때 그녀는 이틀 꼬박 갇혀 있었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만약 물탱크에 문제가 생겨 관리인이 수리하러 오지 않았더라면 그때 아마도 탈수 증상으로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때 그 시절 아무리 이곳에 갇혀 있어도 그녀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온다연은 얇은 니트 한 장만 입고 있었다.비록 여긴 밀폐된 공간이라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겨울이라 기온은 영하 10도 이상 내려갔고 그녀는 실내화를 신고 있었기에 보온 작용이 전혀 없었다.비닐 더미에 몸을 한껏 웅크린 그녀는 추위에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고 얼른 유강후가 자신을 찾으러 와 주길 바랐다.비록 그가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두 사람의 사이는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기에 그녀가 이곳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극한의 추위에서 사람의 체온이 빨리 떨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은 자신이 추위에 아이스크림이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온몸이 아프면서도 간지러웠다.게다가 의식도 점점 흐릿해져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그녀는 절망에 빠지지 않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