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들을 바라보던 주희의 손끝은 핏기가 가시며 희미하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남하윤이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술에 취한 듯 보였고 강민규가 그녀를 부축하며 차 쪽으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주희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예전의 남하윤은 늘 곁에 바짝 붙어 있었고 주희에게 그것은 부담스럽고 지겹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의 장점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오히려 그 좋은 면들이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그러나 이런 낯선 감정은 주희를 두렵게 했다.그의 어머니도 한때는 ‘영원히 사랑한다’라며 주희를 품에 안아주었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떠나버렸다.주희의 형 역시 함께 자라주겠다 약속했지만 저녁노을이 핏빛으로 물든 황혼에 4층에서 몸을 던졌다.온다연 또한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렸다.그는 가족애도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고 다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렸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지옥 같았다.그는 스스로를 누가 어떤 약속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버려질 수밖에 없는 끝내 떠나게 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그래서 주희는 더는 누구를 좋아할 마음조차 없었고 최근 들어 남하윤이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그 사실이 낯설고 아프고 무엇보다 두려웠다.다시는 사랑에 손을 대고 싶지도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그렇게 주희는 차 안에 앉아 강민규의 차가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날 밤 남하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주희는 거실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남하윤은 집으로 돌아왔다.그녀의 옷차림은 어제 입고 나갔던 것이 아니라 평소 일할 때 즐겨 입던 단정한 복장이었고 은은한 화장에 상쾌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얼굴에는 술기운이나 숙취 같은
바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사귀어라, 사귀어라!”강민규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남하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함부로 말하지 마, 나와 남하윤은 그냥 친구야.”사람들은 또 한바탕 웃었다.“맞아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죠.”“여자친구처럼 데리고 다니는 친구예요.”“민규 선배는 예전에 매일 남하윤과 함께 등하교했고,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도 남하윤의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까지 데리러 왔던 거로 기억해요!”“민규 선배가 이겼네. 우리 서림 선배가 졌어. 아쉽다...”주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의 씁쓸함이 점점 커졌다.그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뒤돌아 가려고 했는데 그떄 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와, 또 남하윤이네. 이번엔 뭔가를 시켜야지!”“그래, 민규 선배한테 키스해.”“키스해!”“키스해!”“인연은 결국 이루어지는구나!”주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보며 강민규와 눈을 맞췄다.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 모습이 유난히 눈에 거슬린 주희는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남하윤은 모두의 기대 어린 눈빛 속에서 천천히 말했다.“진실을 말할게.”사람들이 탄식하는 가운데 오직 주희의 긴장했던 심장만이 안정을 찾았다.누군가 물었다.“그럼 남하윤, 너의 첫사랑은 누구였어?”남하윤이 웃으며 말했다.“이 질문 꼭 말해야 해?”“말해야지, 당연히 말해야지. 혹시 민규 선배야?”남하윤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스스로 술 석 잔을 따랐다.“답변 거부야. 벌주로 세잔 마실게!”주희는 천천히 룸을 빠져나왔다.남하윤과 그들에게 그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던 그는 마음이 매우 좋지 않았다.‘하윤이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 많은 눈이 하윤이를 쫓았는데 왜 나는 예전에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까?’점점 더 짜증이 난 그는 차에 돌아와 술집 입구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무심결에 그는 남하윤의 예전 학교 웹사이트를 찾아보았다.남하윤의 이름을 입력하자 휴대폰에 관련 게시글들이 잔뜩 떴다.[다솜 중학교 여신
차가 술집 앞에 멈춰 섰다.룸 안으로 들어선 남하윤은 이미 예전 친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가 의아해하는 것을 보고 강민규가 말했다.“오늘 너희 학년 동창회가 있거든. 많은 사람이 나에게 너에 관해 물어봤어. 다행히 지금 네 연락처를 가지고 있더라고. 안 그러면 나도 모두의 기대를 저버릴 뻔했어.”“그동안 너는 사람들과 연락도 안 하고 심지어 반 단톡방에서도 나갔었잖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들어가서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눠. 네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정말 인기가 많았잖아.”그의 말에 남하윤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열광했다.아무래도 남씨 가문의 공주라는 신분이 있으니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남하윤 역시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동창들을 만나자 감회가 새로웠다.잠시 웃고 떠들다가 다들 술을 좀 마셨다.그러자 사람들이 게임을 하자고 졸랐다.몇 차례 게임이 지나가자 분위기가 더욱 뜨거워져 룸의 다른 쪽 문이 살짝 열려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주희는 룸의 다른 쪽 편에 앉아 조용히 남하윤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술을 꽤 마셨는데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얼굴에 홍조가 띤 것을 볼 수 있었다.지금의 남하윤은 주희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활발하고 명랑하며 어린 소녀처럼 사람들과 장난치고 있었다.가끔은 친구에게 억지로 술을 건네기도 했고 친구도 그녀에게 술잔을 돌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결국 여러 잔 마시고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여자 동창들도 그녀에게 친한 척하며 다가왔고, 그녀는 인내심 있게 묻는 말에 대답했다.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는 모습은 맑고도 매혹적이어서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완전히 달랐다.‘아, 하윤이는 사람들 속에서 저렇게 눈에 띄고 인기가 많았구나.’그녀를 바라보는 남자 동창들의 눈에는 모두 사랑이 담겨 있었다.잠시 후, 게임 용 병뚜껑이 남하윤을 향했다.그러자 누군가 소리쳤다.“진실 게임, 진
송혁이 급히 말했다.“형, 마스크 좀 쓰시면 안 될까요? 이런 모습으로 찍히면 내일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거예요.”주희는 그를 흘긋 보았다.“너무 참견이 심하잖아.”송혁은 매우 답답했다.내일 또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이런 모습으로 나갔는데 내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주희는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갔다.안은 매우 깨끗하게 청소되어 먼지 한 톨 없었다.오랜 시간 누군가 관리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집은 새로 단장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이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가구들도 다시 칠했을 뿐이고, 몇몇 오래된 물건들도 깔끔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생각할 필요도 없었다.이런 일에 공을 들여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하윤뿐이었다.이 모든 것을 보며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옛집에서 나오니 이미 오후였다.역사가 오래된 카페를 지나다가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남하윤을 발견했다.주희는 잠시 멍해졌다가 차를 멀리 나무 아래에 세우고 카페 맞은편 가게에 앉았다.거리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찬란한 햇빛 속에서 남하윤이 매우 즐겁게 웃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고, 눈가까지 휘어졌다.주희는 그녀가 그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그는 지금 남하윤의 눈에는 별이 가득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매우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남하윤은 맞은편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계속 웃었다.몇 번은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위치상 주희는 그녀 맞은편 사람이 누구인지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잠시 후 맞은편 사람이 일어서더니 남하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향해 또 웃었다.그런 모습은 마치 순진한 어린 소녀가 자신이 믿는 사람에게 응석을 부리는 듯했다.주희의 심장이 갑자기 찢어지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수년 동안, 남하윤은 그의 앞에서 항상 여장부인 척 씩씩한 모습만 보여오며 약
송혁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죽을 드시고 싶어요? 그럼 제가 다시 주문해 드릴게요. 아래층에 해산물 죽집이 괜찮은데 새우죽이랑 전복죽이 제일 맛있어요. 이 두 가지 맛을 시도해 볼래요?”주희는 미간을 찌푸렸다.“됐어. 내가 할게.”그는 냉장고를 열고 안에 간단한 재료만 있는 것을 발견했다.잠시 생각하던 그는 흰죽을 끓이고 새우볶음과 소고기 볶음을 만들었다.오랜만에 부엌에 들어간 터라 그는 요리하는 것이 좀 느렸다.간단한 두 가지 요리를 완성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그는 남하윤의 입맛을 잘 몰랐기에 비교적 담백하게 만들었다.요리를 마치고 남하윤의 방문을 두드리려다 망설이고 있는데 뜻밖에도 이때 남하윤이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외출할 옷으로 갈아입었고 머리도 손질한 듯했으며 화장도 단정했다.주희가 미간을 찌푸렸다.“외출하려고?”남하윤은 아마 아직 화가 났는지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주희를 지나쳐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분위기가 좀 어색했다.송혁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서둘러 말했다.“하윤 누나, 먼저 식사부터 하세요. 형이 직접 만드셨는데...”“아니, 둘이서 먹어.”남하윤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가야 해. 여기서 식사 안 할 거야.”송혁은 주희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얼굴을 보며 서둘러 말했다.“하윤 누나, 식사는 이미 다 준비됐어요.”남하윤은 신발을 갈아 신으며 말했다.“됐어. 친구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오후에는 약속도 있고. 아, 저녁도 기다리지 마.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말을 마치고 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주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후, 그는 발코니로 갔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또렷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남하윤이 건물에서 나와 검은색 차로 곧장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 남하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남하윤은 마치 진짜 부잣집 아가씨처럼 우아하게 차에 올랐다.주희는 천천히 주먹을 꽉 쥐었다.‘맞아, 주희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은지, 이렇게 계속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특히 어젯밤, 강민규의 말은 그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남하윤, 너는 분명히 좋은 앞날이 있는데, 왜 너의 모든 청춘을 너에게 평생 응답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바치려 하는 거야?”‘맞아. 왜 내 청춘을 미래가 없는 내일에 걸어야 할까? 정과 사랑이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하지만 수년이 흘렀다.그녀는 그의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의 뒤를 따르는 것에 익숙해졌다.그의 모든 발전, 첫 수상, 심지어 모든 좌절까지, 그녀는 그 과정에 참여했다.그녀는 주희를 좋아했고, 그의 성장을 함께하는 것도 좋아했다.그녀는 마치 물건 수집가처럼 그의 모든 발자국을 모았고, 그가 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누구보다 기뻤으며 그가 실패할 때면 그보다 더 괴로워했다.너무나도 많은 것을 쏟아부었기에 돌이킬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었다.수년간의 매일매일, 함께했던 웃음과 눈물은 이미 뼈와 피에 깊이 스며들어 자신을 뽑아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만약 그가 계속 자신을 이렇게 차갑게 대한다면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무심결에 그녀는 천천히 잠이 들었다.밖에 있는 주희도 소파에 오래 앉아 있었다.그는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고 의심했다.‘그 남자 때문에 질투하는 거야!’이것은 매우 낯선 감정이었고, 그는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어릴 때부터 그는 온다연만을 접했고, 눈에는 오직 온다연 하나뿐이었다.나중에 남하윤이 그의 곁으로 왔다.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무조건 그를 용인했다.점점 그는 그녀가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는 남하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남하윤이 원한다면 공개적으로 연인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든, 혹은 합리적인 신분을 원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가능했다.감정을 제외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보상해줄 수 있었다.하지만 수년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곁에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