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마지막에 유자성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또박또박 말했다.“내가 바로 형이 말한 그 애비 없는 자식의 아빠야.”마른하늘에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현장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몇 분이 지나서야 최금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강후야, 그 말은...”유강후는 표정이 극히 담담했다.“네, 제 아이입니다.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온다연과 결혼식을 올릴 생각입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금영이 버럭 화를 냈다.“안 돼.”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동의하지 않아도 소용없어요. 할머니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거예요.”최금영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그녀는 원래 온다연 그년을 혼내서 유하령 대신 분풀이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다.그런데 유강후가 제 입으로 온다연이 임신했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줄이야.이 소식은 외계인이 지구에 침입했다는 것보다 더 이해할 수 없었다.유씨 가문의 자랑인 유강후는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고 장래가 한없이 밝다. 그런 그가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고아와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틀림없이 저년이 유강후를 유혹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강후의 신분으로 어찌 저런 천한 년을 마음에 둘 수 있겠는가?그녀는 온다연 앞에 막아선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너희들 비켜. 저 천한 년이 또 무슨 여우 같은 재주를 배워 강후를 유혹했는지 봐야겠어.”경호원들은 유강후의 명령만 따르기에 최금영의 명령을 아예 무시했다.경호원들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자, 최금영은 더욱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비켜. 너희들은 귀가 없어?”이때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아저씨, 경호원들을 한쪽으로 비키게 해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경호원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모든 유씨 집안 사람의 시선이 그녀의 배에 집중됐다. 온다연은 그런 시선
유씨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심미진이 급히 다가가 최금영을 부축했다.최금영은 숨을 헐떡이며 유강후와 온다연에게 손가락질했고, 부들부들 떨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치 유강후와 온다연이 무슨 큰 죄를 지은 것처럼.심미진이 급히 그녀의 등을 두드려 진정시켰다.몇 분 후에야 최금영은 숨을 가다듬고 온다연을 가리키며 말했다.“너를 절대 유씨 집안에 들이지 않을 거니까 포기해.”온다연은 무슨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었다.“내 아이는 유씨 성을 가지지 않을 거예요. 더러워서 싫어요.”“너!”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최금영은 잠시 더 험한 말로 온다연을 욕하지 못해 얼굴이 시뻘게졌다.온다연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심미진이 그녀를 말렸다.“다연아, 할머님을 여기서 죽일 작정이야?”“할머님에게 사과해, 어서.”온다연은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유강후에게 말했다.“아저씨, 저는 피곤해서 이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요. 가라고 하세요. 앞으로도 이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요.”유강후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았어.”그는 돌아서서 유자성을 바라보았다.“형, 이만 가세요. 안 가면 경호원을 불러 끌어낼 거예요.”유자성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애써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후야,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어떻게 할 건지 상의해야 하지 않겠니? 온다연은 어쨌든 네 형수 조카딸이야. 너희 둘이 결혼하면 우리 유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돼...”“그건 형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을 잘랐다.“온다연은 가족이 없고 누구의 조카딸도 아니에요. 다연이 누구랑 결혼하든 유씨 집안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그의 말투는 극히 차가웠다.“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형의 아들과 딸이나 잘 간수하세요. 이 상태로는 민준에게 유씨 가문의 회사를 넘겨줄 수 없어요. 민준이 정말 경영의 길로 갈 수 없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유하령이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유강후는 M국에 있었던 몇 년 동안 많은 산업에 투자했으며 그 규모가 이미 미래그룹과 비슷하다고 한다.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강후가 강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것이다.그리고 강씨 가문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이며, 일국 경제를 조종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그러니 후계자인 유강후의 몸값은 가늠할 수 없다.유씨 가문도 회사를 더러 가지고 있지만, 유강후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나 되는가?그녀는 원래 유강후에게 기대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온다연 때문에 유강후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카드까지 정지시켰다.그녀가 지난달 눈독 들였던 한정판 가방과 차도 아직 사지 못했다.‘이는 모두 온다연 그 천한 년의 잘못이다.’이제 온다연은 염지훈을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유강후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앞으로 유하령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유하령의 시선은 독사처럼 온다연의 얼굴에 닿았다가 다시 담요를 덮은 그녀의 배로 내려갔다. 대담하고 악독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나지막이 말했다.“작은 아빠,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저를 버리지는 마세요. 제가 고칠게요...”그녀를 상대할 마음이 없는 유강후는 직접 유자성에게 말했다.“당장 나가세요. 안 그러면 경호원을 불러 쫓아낼 거예요.”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유자성도 기진맥진했다. 그는 온다연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강후야, 너무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화가 나서 기절할 뻔했던 최금영을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떠나기 전에 심미진은 달갑지 않은 듯 온다연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유강후의 매서운 눈빛에 놀라서 그만뒀다.유씨 집안 사람들이 떠나자 병실은 즉시 조용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귀밑머리를
그런 생각을 하며 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가구는 고르기 싫으면 그만둬. 커튼과 침구는 밝은색으로 하는 게 어때?”온다연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더욱 눈빛이 어두워진 유강후는 거의 빌붙는 말투로 말했다.“그럼, 아기방은 어떤 색으로 페인팅하고 싶어? 노란색으로 할까?”온다연이 마침내 손을 움직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아기를 아저씨에게 맡기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한 것으로 볼 때,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그는 온다연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정원에 화단을 설계하고 있는데, 이곳에 어울리는 해바라기 모종을 보내오라고 했어. 잘 관리하면 겨울에도 꽃이 필 거야.”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해바라기를 낭비하지 마세요, 아저씨.”말하고 나서 그녀는 눈을 감고 유강후의 어떤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모노드라마 주인공처럼 계속 말했지만 끝까지 대답을 듣지 못했다.온다연이 계속 그를 무시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그에게 컴퓨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요즘 그녀는 휴대폰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항상 플랫폼에서 스타들의 콘서트를 관람했다.특히 주혜성이라는 신인 톱스타에게 푹 빠진 것 같다.그녀는 하루 중 태반을 그 스타의 동영상을 보는 데 썼다.그의 콘서트는 물론 최근에 찍은 드라마, 예능, 심지어 광고까지 몇 번씩 반복해서 봤다. 보면서 가끔 웃기도 했다.유강후는 지금까지 그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진짜 큰일 났다.그는 겉으로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처럼 평온하고 차분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가 콘서트를 볼 때 옆에서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하기도 했다.하지만 뒤에서는 질투심이 폭발해 주혜성의 배경을 낱낱이 캤다.알고 보니, 그는 남씨 가문 아가씨 남하윤의 남자친구였다.나이가 18-19세에 불과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분위기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느낌이 있어 처
이번에 입원한 후, 유강후는 그녀를 유난히 감시했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한 듯 대부분 자기가 직접 지켰다.그래서 온다연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간만에 기회를 얻은 그녀는 자신의 메일 계정에 로그인했다.요 며칠 전화를 할 수 없는 까닭에 그녀는 임정아와 메일로 연락했다.임정아가 보낸 메일이 몇 통 있었다. 별일은 없고, 그냥 그녀를 도와 매입한 주식과 펀드가 꽤 수익을 냈다는 것과 유하령이 최근 악평이 자자하다는 소식이었다.온다연은 간단히 몇 마디 답장한 후 로그아웃하려다가 이전에 사용한 적이 있는 계정을 발견했다.그녀가 이전에 주한과 연락할 때 사용했던 계정인데, 주한이 죽은 후 그 계정을 한 번도 열지 않았다.잠시 넋 놓고 있던 그녀는 5년 만에 처음 그 메일에 로그인했다.메일함을 열자마자 600-700통의 읽지 않은 메일이 떴다. 광고 메일을 제외한 나머지는 놀랍게도 모두 주희가 보낸 것이었고, 가장 최근에 보낸 건 오늘 아침이었다.클릭해서 열어보니 전부 ‘왜 연락이 없냐’, ‘나를 잊은 것이 아니냐’, ‘주한을 잊은 것이 아니냐’, ‘유강후를 멀리하라’라는 내용이었다.온다연은 몇 통만 보고 메일을 닫은 후 답장을 보냈다.[나는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그녀는 ‘자신을 잘 돌보라’고 쓰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주희는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남하윤이라는 아가씨가 주희를 무척 좋아하는 듯하다.남하윤이 챙겨주고 있으니 그는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그의 병도 당연히 최선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주희는 더 이상 그녀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그녀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주희가 다 커서 기뻤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슬펐다.잠깐 망설이다가 온다연은 잠겨 있는 폴더를 열었다.그 안에는 그녀와 주한이 주고받은 1,000여 통의 메일과 1,000여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는 그 시절의 사소한 일상에 관한 기록이다.이전에 여러 번 봤던 그
식은땀이 이내 캐미솔과 이마를 적셨고 복부에서 간헐적으로 경련이 일었다.마치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며칠 동안 없었던 태동이 갑자기 나타났다.배 속의 태아가 초조한 듯 심하게 움직였다.통증은 온다연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끌어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른 채 한 손으로 메일과 컴퓨터를 닫았다.허둥지둥하다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지며 밖에 있던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온다연이 흥건히 식은땀을 흘린 것을 보고 즉시 이상함을 감지했다.“온다연 씨, 어디 불편하세요?”온다연은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요. 빨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끈적끈적한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간호사는 깜짝 놀라 황급히 뛰쳐나갔고, 잠시 후 온다연은 응급실로 옮겨졌다.유강후는 응급실 문이 닫힌 후에야 도착했다.그는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를 붙잡고 화를 냈다.“어떻게 된 거예요?”그는 겨우 30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온다연도 계속 침대에 가만히 있었는데 왜 갑자기 유산한다는 거지?그 간호사는 마침 온다연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유강후가 화를 내자, 해고되는 줄 알고 놀라서 벌벌 떨며 말했다.“저, 저도 몰라요. 제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을 때, 온다연 씨는 줄곧 안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져서 제가 들어가니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이때 또 다른 의사 두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갔다.이 광경을 지켜보던 유강후는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몸도 조금씩 차가워지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천천히 확산해 하나하나의 뼈마디 사이로 파고들었다.그는 전에 없던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천성적으로 침착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연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병실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응급실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권은 그의 옆에서 계속 지켜보았지만 감히 위로의 말을 건넬 용기가 없었다. 이때 유강후의 비서가 다가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유 대표님이 사인해야 할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습니다!” 이권은 고개를 저으며 막아섰다. “지금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잠시 기다려야 해요!” 이권은 유강후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기에 그의 말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그 서류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계속 재촉했지만 비서는 이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서는 평소에 당당한 모습으로 회사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유강후가 지금은 응급실 문 앞에 서서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유강후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소 모든 이들이 의지하던 그가 지금은 심한 고통에 빠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아파하고 있었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비서는 잠시 지켜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져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대표님을 계속 지켜봐 주세요. 저는 다시 회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나중에 유대표 님께 급히 서명이 필요한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알려 주세요.” 시간이 일분일초 지나갈수록 마치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 마침내 응급실의 문이 열렸다. 온다연이 침대에 실려 나왔다. 유강후의 마음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그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아는 일단 무사해요. 잘 돌보셔야 해요. 더 이상 자극을 받으면 안 됩니다. 온 아가씨가 너무 큰 감정적 충격을 받아 갑작스러운 심장 리듬 이상이 생겨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 겁니다...” 유강후의 마음은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마치 물 밖으로 튕겨 나갔던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온 듯 그는 정상적으로 숨
유강후의 손이 잠시 멈추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미 구월이가 있잖아. 왜 아직도 그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때, 온다연의 손이 갑자기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옷을 꽉 잡았다. 마치 악몽에 갇힌 사람처럼 몸이 경직된 채로 하니만 애타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불안과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녀의 꿈속에서 하니는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 애틋하게 헤어진 누군가인 것처럼 느껴졌다. 유강후는 미간을 더욱 찡그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에 입 맞추며 낮게 말했다. “다연아, 그 고양이가 그렇게 중요해? 네 꿈속에 나도 있어?” 하니가 그냥 고양이여서 다행이었지 만약 그게 사람이었다면 온다연이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유강후는 몰랐다. 온다연은 그 순간 악몽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주한이 죽을 때의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검 붉은색의 피가 그녀의 꿈속 하늘을 뒤덮었고 온다연은 붉은 하늘 아래서 그의 부서진 몸이 서서히 사라지며 작은 거품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려가 그 사라지는 거품을 잡으려 했지만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 없었고 잡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반복되는 악몽은 그녀를 점점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연아.”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그 꿈에서 천천히 끌어냈다. 그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고 그녀에게 안전한 느낌을 주었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그녀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었다. 진정제가 그녀를 깊이 잠들게 했고 그녀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꿈속에는 거대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낯선 복도의 앞에 서 있었다. 복도의 끝에는 조그마한 아이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