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온다연은 끌어안았다.“작업실로 갈까? 그림 그릴 때 옆에 있어 줄게.”이때 조용하던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디 불편한 것 같은데요? 제가 안을게요.”장화연은 곧바로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마지못해 한숨을 내쉰 장화연은 아이를 토닥이며 태연하게 말했다.“아마 배고파서 우는 걸 수도 있어요. 분유 먹은 지 세 시간이 지났거든요. 사모님과 도련님은 작업실로 가세요. 저는 아이랑 같이 먼저 집으로 가보겠습니다.”온다연은 아이의 가냘픈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아이를 안기 위해 그의 품에서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허리를 잡힌 탓에 아무리 움직여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저씨, 이거 놔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유강후는 장화연에게 눈빛을 보내고선 갑자기 차 문을 열더니 온다연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그 후 곧바로 시동이 걸렸고 온다연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저씨, 왜 계속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요? 강씨 가문의 아이라서 이러는 거예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라고요.”유강후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스쳐 갔다.“아이도 얼른 밥 먹어야지. 날씨가 쌀쌀해서 감기 걸릴까 봐 장 집사랑 먼저 집으로 가라고 한 거야.”온다연은 믿지 않은 듯 울먹이며 말했다.“우리의 아이인데 왜 이렇게 싫어해요? 엄마로서 아이를 안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잖아요. 왜 매번 뽀뽀하려고 할 때마다 막는 거냐고요.”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유강후의 가슴에 꽂혔다.두 사람의 아이가 살아있다면 왜 굳이 모자를 갈라놓겠는가.“싫어할 리가 없잖아. 나중에 강씨 가문을 책임져야 할 아이라서 이렇게 크는 게 맞아. 다들 이렇게 자랐어. 앞으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데 감정에 쉽게 휩쓸리게 키워서는 안 돼. 둘째가 태어나면 우리가 직접 키우자. 응?”온다연은 괴로운
“1등.”“어제 점심에 지도 교수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전공과 이번에 1등했대. 화양대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재학 중인지 알지? 그중에서 우리 다연이가 1등 했어.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 넌 대단한 사람이야.”“정말 1등이에요?”유강후는 진지하게 답했다.“이런 걸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네가 1등인지 꼴찌인지 내가 신경 쓸 것 같아?”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강후의 말이 맞다. 사실 성적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온다연이 강씨 가문의 장부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전문 지식을 습득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모비크의 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모비크님은 아저씨가 모셔 온 게 아니죠?”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굳이 왜 모셔 와. 몸값만 해도 200억을 넘는 분이야. 네가 유명한 화가가 되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 돈을 쓸 리가 없잖아.”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난 다연이가 평생 내 곁에서 나만 바라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면 좋겠어. 정말 내가 모셔 왔을까?”온다연은 그 말을 믿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어떤 기술을 갖게 되는 걸 원치않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단지 그에게 의지하여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다만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전문 지식과 관리능력을 갖춰야 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온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고선 화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가볍게 말했다.“가요. 아마 화실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그 시각 유화실.염지훈은 눈앞의 유화를 보며 넋을 잃었다.그의 어머니인 박연화는 명문 집안의 아기씨로 어릴 때부터 문명원과 절친한 친구였다. 문명원이 H 국에 온 것을 알고선 반드시 문명원을 집으로 초대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 유화실에 오게 되었고 우연히 그림 한 폭을 마주하게 되었다.그림 속의 소녀는 온다연과 매우 닮았는데 문명원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존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이 그림은 도플갱어를 넘어설 만큼 너무 닮았다.문명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정말 사려고? 훌륭한 그림인 건 맞지만 사실 이건 복제품이야. 원본은 진씨 가문에 있어.”“솔직히 말하면 소장 가치가 없는 그림이라 구매를 권장하고 싶지 않아. 작가가 본인만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거든.”“저랑 인연이 있는 그림인 것 같네요. 얼마를 원하는지 한번 여쭤볼 수 있을까요?”“처음에 정한 타깃은 7,000만 원이야. 그런데 이 그림은 아마 아무도...”“제가 7억에 살게요.”염지훈은 그의 말을 잘랐다.“7억에 산다고 작가한테 얘기해주세요. 전시든 경매든 필요 없으니까 바로 제 손에 들어오게끔요.”“7억?”문명원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하지만...”그러자 염지훈은 비서에게 수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위에 숫자를 적은 후 문명원에게 건넸다.“받으시죠.”문명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일단 그림 작가한테 한번 물어볼게.”“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작가님이 저한테 팔 거라고 믿어요. 일단 이 수표는 갖고 계세요. 금액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이 돈은 제가 전액 지불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에 하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계약금으로 생각해 주세요.”문명원이 거절하기도 전에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바쁘신 것 같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저녁 잊지 말고 꼭 오십시오. 엄마가 신국을 떠난 지 꽤 되어 옛친구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알겠네.”염지훈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다연과 유강후가 화실에 도착했다.모비크는 그들에게 매우 열정적이었다.수염이 덥수룩한 이 예술가는 20대에 이미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고 한때 유강후 어머니의 개인 과외 선생이기도 했다.지금은 유강후의 덕분에 화양대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유강후에게 친절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수년 전 유강후 어머니와의 추억을 언급하며 거리감을 좁혔다.유강후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
모비크가 답했다.“제 친구의 지인이 사 갔습니다. 그림 속 인물과는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7억짜리 수표를 주며 꼭 이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 친구가 작가님한테 연락했고 7억에 이 그림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 작품 그분 소유입니다.”유강후는 그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분한테 연락해서 이 그림을 팔 의향은 없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얼마든 상관없습니다.”“그건 곤란할 것 같네요. 그 신사분도 돈이 부족한 사람 같지는 않았거든요.”작품에 꽂힌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일단 연락해 주세요.”모비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알겠습니다.”온다연의 유화 수업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유강후는 그림에 집중하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그러던 그때 이권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유강후는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니 핸드폰 너머로 이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원도 그 미친X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대범한지 윤 비서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서 납치했습니다. 저희가 사람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윤 비서는 진작에...”유강후의 말투는 싸늘했다.“윤 비서를 온다연으로 확신했나 보네?”이권이 답했다.“전에는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갑자기 납치한 걸 보면 윤 비서를 다연 씨로 착각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저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원도가 어르신이 시청 부근에 남긴 한옥 저택에 대해 알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연 씨라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움켜쥐며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내가 한옥에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철저하게 조사해 봐. 윤 비서한테는 돈 더 챙겨줘. 대신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돼.”이권은 쓴웃음을 지었다.“윤 비서가 이번 일로 많이 놀랐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 한다고 하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심미진은 버럭 화를 냈다.“온준용, 미쳤어? 이거 놔.”온준용은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네 언니 있을 땐 날 꼬시지 못해 안달이었잖아. 나랑 자고 싶어서 언니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이 웬 내숭이야? 이제는 사모님 되어서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건가?”“유자성? 그 사람 너보다 열 살이나 많다며? 만족할 리가 없을 텐데?”심미진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예전 일은 뭐 하러 꺼내. 본론부터 얘기할게.”과거에 그나마 볼만하던 온준용도 세월의 풍파를 겪고 나니 폭삭 늙었다.50도 안 되는 나이에 벌써 백발이 가득한데 심미진이 흔들릴 리가 없다.온준용은 본인과 달리 고급 명품을 입고 손목에 여덟 자리 금액의 고가 시계를 찬 심미진을 보며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왜? 이제는 내가 싫어? 예전에 침대에서 울부짖을 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잖아.”그렇게 말하며 온준용은 다시 심미진을 만지기 시작했다.그럭저럭 잘나가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지고 옷차림도 형편없는 그를 바라보며 심미진은 역겹다는 듯이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예전 일은 이제 그만 언급해. 당신이 형부라는 걸 잊지 마. 아무래도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온준용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거리? 무슨 거리? 너 어차피 유자성한테 만족 못 하잖아. 내가 그걸 해준다니까?”심미진은 짜증을 내며 그를 밀었다.“이 집 가질 거야 말 거야.”“곧 철거 예정인데 배상금이 경원에서 제일 비싼 금액이래. 심지어 새집 두 채까지 더 준다고 하니까 적어도 40억을 버는 거지.”온준용의 눈에는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X발. 이렇게 돈 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돌아왔지.”“사람 인기척도 없는 구석탱이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냈는지 알아? 그래도 경원이 최고네.”심미진은 비꼬는듯한 웃음을 지었다.“확실히 값어치가 있는 집인 건 맞아. 하지만 온다연 그 X이 지금 가진 것에 비하면 멀었어.”온다연을 언급하자 온준용의 탐욕이 더욱 뚜렷해졌다.“얼마 전에 봤는데 유강후가 옆에 찰싹
“유강후가 경원시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부동산을 온전히 온다연 명의로 돌려놨다고?”온준용은 그 말을 듣자마자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걔는 지금 집에서 매일 진수성찬에, 금은보화에 고급 차까지 타고 다닌다는데, 나는 매일 개처럼 살고 있어. 이제 슬슬 찾아가서 뭘 좀 받아내야겠군!”“그리고 내 아들, 그러니까 다연이가 남동생도 책임져야지. 그 집들 전부 다 남동생 건데, 여자애 주제에 자기 동생을 안 도와? 이게 말이 돼?”심미진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아들이 아직 살아있긴 해?”온준용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당연히 살아 있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어. 그때 바다에서 사고 난 건 그냥 우연이었어. 내가 죽은 척하지 않았으면 진씨 가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고.”그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비참한 생활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진수현 그 미친놈, 자기 딸이 죽는 걸 직접 눈으로 봤고, 화장까지 지켜봤으면서도 아직도 딸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지금까지도 계속 사람을 찾아다닌다니까. 진짜 미친놈이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다행히 내가 눈치 빠르게 움직여서 배 사고로 죽은 척한 거야. 아니었으면 벌써 들통났을 거라고!”심미진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심해. 진씨 가문한테 들키면 끝장나는 거야. 진수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그 수단이 어마어마하잖아. 네가 그 사람 딸을 바꿔치기한 걸 알면 너는 뼛조차 못 찾을걸!”온준용은 여유롭게 말했다.“나는 그냥 돈 받고 일한 것뿐인데 뭐가 대수야? 게다가 동남아시아 전체가 그놈 딸이 자기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어. 무서울 게 뭐야?”“게다가 지금 그놈이 주요하게 수색하는 곳은 아시아가 아니야. 북미 쪽에 집중하고 있어. 안심해.”“오히려 문제는 온다연이지. 이제 그 애한테서 돈 좀 받아내야지. 아버지인 나한테 효도할 때가 된 것 같아!”심미진이 덧붙였다.“첫째, 그 집들부터 내놓게 해야 하고, 둘째, 유강후가 준 것들도 전부 우리한테 넘겨야 해. 오늘 그 애를
이전까지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유강후는 마치 이 약욕탕에 집착이라도 있는 것처럼, 올 때마다 반드시 그 물속에서 그녀를 쥐락펴락해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하지만 온다연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잠시 약욕을 마친 그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이 호텔의 요리사는 디저트를 정말 잘 만들었는데, 온다연이 올 때마다 새로운 메뉴를 내놓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다만 오늘은 레스토랑이 굉장히 한산했다. 넓은 공간에 그녀와 다른 여자 한 명만이 식사 중이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직접 디저트를 가져왔고, 그녀가 좋아하는 몇 가지 요리도 함께 내놓았다.온다연은 매니저를 불러 물었다.“강후 씨는 어디에 있어요? 호텔에 없는 건가요?”매니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유 대표님은 바로 옆 방에 계십니다.”온다연은 텅 빈 레스토랑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요즘 호텔 장사가 잘 안돼요?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요? 예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이제 호텔이 그녀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매니저는 웃으며 설명했다.“아닙니다. 장사는 여전히 잘 됩니다. 보통 방을 예약하려면 1~2주 전에 미리 해야 할 정도로요. 다만 오늘 저녁에는 특별히 귀빈이 오셔서 유 대표님께서 장소를 비우도록 지시하셨습니다.”“특별히 귀한 손님이라고요?”온다연은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누구예요?”매니저는 온다연이 실질적인 사장임을 알고 있었기에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중동의 대부호 라시드 님이십니다.”“그 석유 재벌 말인가요?”“네, 다연 씨.”“알겠습니다. 가보세요.”이해가 갔다. 주말도 아닌데 유강후가 이곳에 온 이유는 중요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온다연은 디저트를 먹으며 레스토랑에 있던 다른 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이미 장소를 비웠다고 했으니, 그 여자는 아마도 라시드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중동 부호의 목소리인 듯했다.유강후의 목소리는 약간 나른하게 들렸다.“아이 하나 생기긴 했죠. 하지만 라시드 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듣자 하니, 아드님이 셋이나 된다고요.”라시드는 호탕하게 웃었다.“유 대표님은 소식이 참 빠르군요.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겨우 사흘이나 나흘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알고 계시다니. 이 소식은 아직 외부에 발표도 안 했는데요.”그는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 본처는 아직 아들을 낳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세 아들은 내 사업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유 대표님의 아드님과는 다르죠. 당신 아들은, 당신들 말로 하자면 적장자니까요. 훗날 유 대표님의 사업을 물려받을 존귀한 후계자죠!”유강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든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한참 후,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라시드 님께서 H국 문화를 꽤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하나 틀리셨습니다. 그 아이는 적장자가 아닙니다.”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저에겐 정식 부인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냥 제가 잠깐 즐기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일 뿐이에요. 당신의 세 아들과 별반 다를 것 없죠.”온다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강후가 일부러 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쩐지 불쾌했다.그때 라시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유 대표님은 참 농담도 잘하시네요. 경원시 전체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특별히 아끼는 여자가 있다는걸요. 그 여성분과 아이도 낳고 결혼까지 계획 중이라던데요. 심지어 그분 때문에 유씨 가문과도 갈등을 빚었다고 들었습니다.”라시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분 때문에 형님과 인연까지 끊으려고 한다던데요. 유 대표님, 제가 철저히 조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더는 속이려 하지 마세요.”유강후는 미소를 머금고 와인잔을 살짝 흔들었다.“거짓말입니다. 그저 소문에 불과해요.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