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욕의 물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작은 물결을 일으켰고, 온다연은 작은 배처럼 그에게 매달려 흔들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유강후는 지친 온다연을 안고 라운지체어에 앉았다.그녀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유를 가져와 직접 먹여 주었다.부드러운 수건으로 그녀를 감싸 눕힌 뒤, 헤어드라이어로 한 가닥씩 정성스럽게 머리를 말렸다.온다연은 내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그대로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여자는 지금 화가 나 있다.유강후는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그녀를 안아 자신의 몸 위로 눕혔다.반쯤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들었어?”온다연의 몸이 살짝 굳었다.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유강후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차갑게 말했다.“그대로 있어. 움직이면 나중에 더 혼날 줄 알아.”“날씨도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았는데, 누가 너더러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라고 했어?”치마는 겨우 무릎까지 내려왔고 위에는 헐렁한 넓은 목의 니트 하나만 입고 있었다. 심지어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도우미들을 다 내쫓아야 할까 보다!그는 그녀의 통통한 발목을 꽉 쥐며 말했다.“겨우 몸 상태가 조금 좋아졌는데, 또 건강을 망치려고? 계속 약만 먹고 싶어? 이러다간 대체 언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온다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남한테 넘길 거라면서요. 그런데 대체 누구 아이를 낳으라는 건데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려 했다.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눌렀다.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그의 가슴에 다시 몸을 맡겼다.“괜한 소리 하지 마. 응?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야?”온다연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요.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요.”유강후는 그녀의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유강후가 말했다.“그 하루코, 기억나?”온다연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었다.그 여자는 유강후의 눈길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온다연에게는 달랐다.큰 잘못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맞춰주었고, 심지어 주한의 사건이 들통났을 때조차 그녀를 책망하지 않았다.그리고 세상을 떠난 유연서에 대해서는 유독 애틋하게 그리워했다.순간, 온다연은 유강후가 과연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아니면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유연서가 유강후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성장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하루코, 유연서, 그리고 나은별 같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아이만 그녀 곁에 있다면 유강후가 그어 놓은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았다. 때때로 그가 요구하는 무리한 부탁조차 순순히 따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그녀가 어릴 적에 가지지 못했던 것을, 그녀의 아이만큼은 반드시 누리게 하고 싶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강후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하루코의 오빠, 이다 이치로가 H국에 왔어. 하루코의 죽음을 내 탓으로 여기고, 내가 하루코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복수를 원하는 것 같아.”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일부러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그 사람, 성격이 좀 과격해. 너한테도 조금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다만 조심하는 건 나쁠 게 없지.”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당분간 학교에 못 가게 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
집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사실대로 말했다.“접니다. 시간이 늦은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옷을 준비해 드리려고 보냈습니다.”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월급 계산하고 떠나.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집사는 깜짝 놀라며 급히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제발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아직 학업 중이라 이 직장을 잃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해고만은 피해 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에 더해 전날 밤 겪었던 고생 탓인지, 온다연은 단잠에 빠져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잤다.몽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새로 온 집사가 데운 우유를 내밀며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서 드시죠.”온다연이 우유를 받자 집사는 미리 준비해 둔 숄을 그녀에게 걸쳐주었다.온다연이 습관적으로 맨발인 것을 보고는 급히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온다연은 이런 섬세한 배려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어제 보던 직원들과 오늘의 직원들이 다르다는 것만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레 죽 한 숟가락을 떠먹으며 물었다.“어제 따라왔던 이 집사님은요? 집에 일이 생긴 건가요?”집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이 집사님은 업무 미숙으로 어젯밤에 찻잔을 깨뜨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온다연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직원들에게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단순히 찻잔 하나 때문에 사람을 해고했을 리 없었다.“강후 씨는요? 서재에 있나요? 와서 저랑 같이 아침 먹으라고 전해주세요.”집사는 잠시 망설이다 사실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옆방에서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30분 전에 이 비서님이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셨는데 굉장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그때 옆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평범한
유준석의 눈은 핏발이 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고 있긴 해? 내 할아버지가 강씨 가문에 공을 세운 걸! 그런데 왜 중요한 자리는 나한테 주지 않았어? 내가 분명 관리자가 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야?”유강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냐? 실력 있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거야.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충성스럽지 않았다면 너는 강씨 가문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거야!”유준석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네가 날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널 배신하겠어? 그들이 나한테 뭘 약속했는지 알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준다고 했다고!”유강후의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 그는 단숨에 유준석의 배를 걷어차며 말했다.“변명은 그만해.”“감옥에 집어넣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해!”유준석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안 돼! 나를 감옥에 보낼 순 없어! 감옥에 가긴 싫다고!”유강후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지체하지 말고 당장 끌고 나가. 다시는 이놈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으니까.”그 순간, 유준석은 갑자기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유강후, 네가 이런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속박을 풀어내고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그것은 칠흑 같은 총이었다. 그는 그 총구를 유강후에게 겨눴다.탕!총성이 울리고, 유강후 뒤에 있던 방탄유리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총알은 유강후를 맞히지 못했다.유준석이 총을 꺼내는 순간, 유강후는 그의 행동을 예측하고 가볍게 피했다.다음 순간, 유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바닥에 쓰러졌다.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이권의 손에 들려 있던 총구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피어올랐다.이권은 총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유강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유준석을 매섭게 응시했다.그는
온다연은 유강후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다.마치 평소 그가 자신을 다정히 안으며 달래주던 것처럼, 그녀는 그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힘껏 감싸 안았다.“저 왔어요, 강후 씨. 저 여기 있어요.”그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아주 작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떨림이었지만, 온다연은 분명히 느꼈다.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예고 없이 아파왔다.‘강후 씨도 이렇게 약해질 때가 있구나!’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이 사실을 깨닫자 온다연은 더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여긴 상황이 복잡합니다. 먼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놀라실까 걱정이 돼서...”“거기 누구 없어요?”온다연이 갑자기 말했다.“홍차 한 주전자 가져와요. 당장!”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이 집안의 안주인답게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이 비서님, 저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아직 살아 있으니 살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안 된다면 평소 하던 대로 처리하세요. 깨끗하게 끝내야 합니다.”이권이 놀란 듯 굳어 있자, 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였다.단호하고 날카로운 톤이었다.“어서 가서 처리하세요!”이권은 정신을 차리고 즉시 대답했다.“네, 사모님!”몇 분도 지나지 않아 유준석은 끌려 나갔고, 바닥의 핏자국도 흔적 없이 정리되었다.방 안에 진동하던 짙은 피비린내만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방금 전까지 극도의 위기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곧 누군가 홍차를 우려 가져왔다.온다연은 그것을 옆 테이블에 두게 하고 창문을 열도록 지시했다.이른 아침 경원시의 날씨는 아직도 매섭게 추웠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면서 피비린내를 날려버렸다.방 안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온다연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캐시미어 숄을 풀어 유강후의 등 위에 덮어주었다.그리고 홍차를 따라 적당한 온도를 확인한 뒤 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조금 마셔요.”유강후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은
온다연이 대답할 새도 없이,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홱 끌어당기며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온다연이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유강후는 조각난 잔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녀의 신발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어 한쪽으로 던지곤,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연아,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어. 무섭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부드럽게 대답했다.“무섭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강후 씨,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에겐 내가 있고, 우림이가 있어요.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유강후의 마음속은 거센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의 눈동자 속 감정은 서서히 넘쳐흘렀다.“다연아, 너 영원하다는 말이 뭔지 알아?”온다연은 조용히 말했다.“알아요. 이생 동안 당신 곁을 지키는 거요.”유강후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맹세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그를 힘껏 안으며 대답했다.“맹세할게요.”유강후는 낮고 강렬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오늘 네가 한 말을 꼭 기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이제 차를 마실 수 있겠어요?”유강후는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강렬하게 덮쳤다.차의 은은한 향기가 입술과 입술 사이를 스쳐갔다. 키스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거칠었지만, 온다연은 이번만큼은 그의 키스에 욕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그 키스는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공기 중엔 여전히 피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방금 전까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이것이 유강후와 나눈 키스 중 가장 특별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변할 거라
온다연은 그 메시지를 수업 중에 받았다.그녀는 메시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강의실을 떠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생각한 뒤, 그녀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대체 누구세요?]처음엔 이 번호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유하령이나 나은별 같은 사람이 일부러 그녀를 불쾌하게 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최근 들어 이 번호에서 보내오는 메시지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비록 온준용이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묘지에서 본 그 뒷모습이 떠오르자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피어났다.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서려던 순간, 휴대폰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열어보니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에는 13~14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얼굴 옆모습이 청순하고 색이 바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책상과 교복이 낡아 보여 주변 환경이 열악함을 짐작하게 했다.하지만 온다연의 시선은 사진 속 흐릿하게 처리된 어른의 모습에 멈췄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온준용이었다.그녀는 숨을 삼켰다.그가 살아 있었다니!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그 남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착한 딸아, 이 아이가 네 동생 준휘란다.]순간,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녀를 향한 온준용의 학대가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은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온다연은 거의 확신했다. 사진 속 소년의 상처는 온준용이 때린 자국이라는 것을.아들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착해 보이는 아이마저 폭행하다니.과거의 비참했던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온다연의 마음속엔 깊은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다.‘저런 인간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딸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본처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첩과 아들을 낳아 놓고도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라니.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그 순간, 또 다른 메시지
“반장, 나 이따가 또 수업 있어서 그러는데 교수님께 못 간다고 전해줘.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얘기해.”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교수님께서 이번엔 졸업 논문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어쩔 수 없이 온다연은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염지훈이 여유로운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손에서는 은색 라이터를 장난감처럼 돌리고 있었다.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이 집 케이크 맛있더라. 한번 먹어봐.”온다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케이크 먹으라고 날 부른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무 일도 없으면 저 수업 가야 해요.”염지훈은 느긋하게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나지막이 말했다.“먹어봐. 네가 가던 케이크 가게 것보다 훨씬 맛있어. 가정식 전문점에서 만든 거야.”온다연은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그가 또 별거 아닌 걸로 트집을 잡는 게 싫어 등을 돌리고 나가려 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보고, 낯선 번호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직감적으로 누가 전화했는지 알아챘다.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또 끊었다.두세 번 같은 일이 반복된 뒤, 염지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받아버렸다.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건 온다연이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착한 딸, 왜 아빠 전화를 안 받니? 아빠 보고 싶지 않아?”염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온다연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눈으로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뭘 바라는 거예요?”온준용은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히 내 딸을 보고 싶어서지. 이렇게 오랜만인데, 아빠가 널 보고 싶지 않겠니?”온다연은 휴대폰을 꽉 쥐었는데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보고 싶다고요? 엄마가 남긴 집이 값나가니 가져가고 싶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