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나는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러 가야겠다. 매일 손주들 사진을 올려 나를 약 올렸던 거 복수해야지.”강양호가 떠난 후, 강현미가 입을 열었다.“다연이 과거 기억을 되찾으면 어떡해? 계속 이렇게 숨길 작정이야?”이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유강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벌써 기억을 찾았어요.”강현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자코 있었다.유강후는 한참 후에야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과거의 일은 제가 잘못한 거니까 잘 해명해 볼게요. 이젠 아이도 있는데, 타협하겠죠.”“성격도 많이 달라져서 이전처럼 꾹 참지 않아요. 몇 번만 제대로 폭발해서 속에 쌓인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내면 해결될 겁니다.”강현미가 우려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지금 그 애 신분은 진씨 가문의 따님이야. 너를 용서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하면 막을 수 없어.”유강후가 단호하게 말했다.“이미 각오하고 있어요. 우리 사이에 감정이 남아있어 화가 나더라도 제 곁을 떠나지는 못할 거예요.”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가는 데까지 가 봐야죠. 아이를 사랑하니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강현미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그 애 뜻을 따라주어라. 이전처럼 강압적인 태도로 나오지 말고.”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유강후는 오전에 반날 시간을 들여 본채의 패브릭을 싹 다 교체했다.커튼과 식탁보는 파스텔 컬러로 바꾸었고, 곳곳에 크고 작은 인형 소품들을 배치했다.마당의 식물들도 심신 안정 효과가 있는 라벤더로 바꾸었다.온다연은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침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밖에서 하인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작은 사모님이 임신하셨으니 앞으로 모든 일에 조심해야겠어.”“어르신께서 무척 기뻐하시면서 하인과 집사들을 불러놓고 모든 일에 작은 사모님이 우선이 돼야 하고, 실내에서 조용히 하라고 분부했어. 큰 소리로 말해도 안 된대.”“강씨 가문에 얼마 만에 찾
그녀는 침대 위에 조용히 앉아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슬슬 만졌다.유강후가 방에 들어왔을 때, 온다연은 침대에 멍하니 기대어 있었다.“깼으면 나를 부르지 그랬어?”그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으려 하자, 온다연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건드리지 마요.”이런 반응을 예상했음에도 유강후는 마음이 괴로웠다.유순하고 순종적이던 다연이 어쩌면 이렇게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지...그는 여전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배고프지? 점심이 준비됐어. 전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야.”온다연은 고개를 돌린 채 냉랭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그럼 당신은 나가요. 당신 얼굴을 보면 밥맛이 다 떨어져요.”유강후는 입을 꽉 다물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알았어. 하지만 너를 안고 나가게 해줘.”그는 말하면서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서 당장 밀어내고 싶었지만, 아이 생각에 발버둥 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긴 채 다이닝룸으로 이동했다.식탁에는 무려 여덟 가지 반찬과 두 가지 국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강씨 가문은 사치스러움으로 존귀함을 과시하는 단계는 넘어섰고, 이제는 정교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데, 특히 음식 문화에서 이 점이 뚜렷이 드러난다.요리하는 사람과 식사하는 사람만이 평범해 보이는 요리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는지 알고 있다.온다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유강후도 손을 씻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온다연은 아직 그와 평화롭게 식탁에 마주 앉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접근하는 그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당신 얼굴을 보면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나가요.”유강후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양갈비 스테이크를 잘라 그릇에 올려주었다. 이어서 새우를 까기 시작했다.화가 난 온다연이 그릇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가지 마. 새우 까놓고 나갈게.”온다연이 차가운
이 요리들은 정말 맛있었다. 그녀는 모든 음식을 조금씩 맛보았고 국도 조금 마셨다.평소에 많이 먹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많이 먹으니 속이 받쳐주지 않아 일어설 때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녀가 급히 화장실로 뛰어가자, 밖에 있던 사람이 이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 들어왔다.세면대를 잡고 헛구역질하는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 유강후는 초조한 나머지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그는 다가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속이 불편해? 토하고 싶으면 토해도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소량으로 자주 먹으라고 말씀하셨어. 정 안 되면 곽혜진 선생님께 부탁해서 식욕을 돋우는 약을 받아와야겠다.”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속이 뒤집히는 듯한 메스꺼움을 억눌렀다. 몇 번 심호흡을 하자 약간 진정되는 것 같았다.조금 나아진 그녀는 유강후를 밀어내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녀는 여전히 속이 안 좋아 뜨거운 물을 마신 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쉬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완전히 잠든 듯한 모습이 되었을 때야 조심스럽게 안아 침실로 옮겼다.그가 다시 나왔을 때는 식탁 위의 음식들이 다 식어버렸다.“이 음식들은 사모님이 드시고 남은 것들이니 주방에 새로 차리라고 지시할게요.”오진숙의 말에 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냥 먹을게. 그래야 맛이 어떤지 보고,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개진할 수 있어.”결국 오진숙은 늘 높은 곳에 있던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온다연이 남긴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식사를 마친 유강후는 요리사를 불러오라고 했다.“앞으로 최대한 영양 균형을 고려해 식단을 짜도록 해요. 구입하기 어려운 식재료가 있으면 미리 집사에게 말하고요. 반드시 최상급의 신선한 재료만 사용하고 하룻밤 지난 음식은 다 버리세요.”“육류와 해산물은 비린내를 철저히 없애고, 고기는 가장 연하고 맛있는 부위만 사용하세요. 신선도 확인은 필수고요.”“조미료는 최대한 천연 조미료로 바꾸세요.”“오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의자를 밀어젖히고 걸어 나갔다. 현관에는 진씨 가문에서 온 네 명의 집사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유강후를 본 집사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인사했다.유강후는 그들의 캐리어를 지켜보며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신국으로 돌아가려는 거요? 그렇다면 내가 전용기를 준비하도록 하지.”네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뭐라고 말할지 망설였다.그들의 눈에는 아가씨의 행동이 부부싸움 후 성질을 부리는 것쯤으로 보였다. 아직 화해하지 않았을 뿐이지, 화해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도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잠시 후 임원식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신국에 돌아가겠다고 하시는데, 저는 아직 회장님께 보고드리지 않았습니다. 보고드리면 전용기를 보내실 텐데... 어떻게 할까요?”유강후가 단호하게 말했다.“당신들만 돌아가시오. 다연은 가지 않을 거요.”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밖에서 막 들어와서 모르겠지만, 다연이 임신해서 장시간 비행이 불가능하오.”임신이라고? 그들은 잠깐 멍해 있다가 이내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이렇게 큰 경사가 났는데, 바로 회장님께 보고드려야겠습니다. 회장님과 사모님이 당장 날아 오실지도 모르죠.”유강후가 손사래를 쳤다.“아직은 알리지 마시오. 우리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짐을 다시 푸는 게 좋겠소. 다연이 나한테 삐쳐 있지만, 곧 화해할 것이니 여기를 떠나지 않을 거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다연이 작은 캐리어를 끌고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유강후를 쳐다보지도 않고 직접 밖으로 향했다.유강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어디 가?”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연히 집에 가는 거죠. 여긴 내 집이 아니잖아요. 설마 또 예전처럼 저를 가두실 작정이에요?”유강후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다연아, 옛날 일은 내 잘못이야. 때리든 욕하든 다 괜찮은데, 떠나겠다는 말은 함
무슨 뜻인지 이해한 임원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임원식이 온다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포레스트 호텔에 묵게 됐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이상함을 감지했다.고급 호텔이긴 하지만 로비에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는 것도, 직원과 매니저들이 모두 로비에 몰려 있는 것도 너무 이상했다. 게다가 그들 일행이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듯 벌벌 떨고 있었다.온다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임원식에게 물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죠? 호텔 분위기가 이상해요. 우리 말고는 다른 손님이 없는 것 같아요.”임원식이 급히 둘러댔다.“정상적인 호텔입니다. 고급 호텔이라 가격이 비싸서 방문객이 적은 것뿐입니다.”온다연은 로비를 둘러보던 중 밖에 주차된 고급차 몇 대를 발견하고서야 경계심을 조금 늦추었다.지쳐 있던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임원식에게 스위트룸을 예약하라고 지시했다.2층에 있는 스위트룸은 무려 90평이 넘었고, 침실 창문 아래로는 거대한 천연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한 쌍의 백조가 늘어진 버들가지 아래에서 우아하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온다연은 영원시에 있을 때 살던 집이 생각났다.그리고 그때 키우던 고양이 구월이도 생각났다. 3년이 지났는데, 그 고양이가 아직 살아있을지, 주희가 잘 돌보고 있을지 궁금했다.영원시에서 너무 우울한 나날을 보내서인지, 수많은 불행한 기억들이 떠올랐다.가장 많이 화가 났던 일은 나은별이 구월이를 다치게 했을 때 유강후가 그녀를 믿어줬던 일이었다.그리고 그때 나은별이 신씨 남매를 이용해 그녀를 죽이려 했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유강후는 전혀 추궁하지 않았다.이런 일들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주먹으로 벽을 콱 쳤다.“유강후, 나은별은 정말 당신이 아끼는 보물이었어. 그 여자를 그렇게 믿으면서 왜 자꾸 나한테 치근대는 거야?”워낙 피부가 연약한데, 너무 세게 쳐서 한 방에 손가락 마디의 살갗이 벗겨졌다. 그녀는 아파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마음속으로 유강후를 천만번 저주했다.그렇
온다연이 말했다.“아까 보니 건너편에 카페가 있길래 거기서 친구와 만나려고요.”“임혜린 씨를 만나시는 건가요?”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임 집사님, 내가 누구와 커피를 마시는지 당신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바로 길 건너편이니까 따라오지 마세요.”임원식은 더 이상 찍소리도 못했다. 온다연이 떠나자, 그는 옆방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아가씨께서 건너편 카페에 가신다는데, 따라오지 못하게 합니다.”유강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돌려 이권에게 말했다.“경호원을 두 명 붙여. 다연이 모르는 애들로. 절대 놓치면 안 돼.”“알겠습니다.”온다연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돼서 임혜린이 도착했다.한밤중인데도 그녀는 선글라스와 썬캡을 쓰고 있었고, 카페에 들어선 후에야 벗었다.온다연을 본 그녀는 흥분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진짜야?”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짜야. 쌍둥이.”임혜린은 깜짝 놀라며 환하게 웃었다.“동현이 무심코 던진 말이 현실이 될 줄이야. 네 배 속에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아들딸 쌍둥이야?”온다연이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아들딸 쌍둥이면 더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어. 아들이든 딸이든 다 좋아.”임혜린이 한숨을 쉬며 입을 삐죽였다.“유강후는 참 복도 많다. 쌍둥이를 얻다니, 좋아 죽겠네?”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이상하네. 유강후가 널 혼자 나오게 할 리 없잖아?”온다연이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나 기억이 돌아왔어.”임혜린은 얼어붙어 한참 잠자코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모든 일이 다 기억났어?”“전부인지는 모르겠는데, 거의 다 기억난 것 같아. 주한, 온준용, 심미진, 유하령, 나은별, 그 인간들이 나한테 했던 짓들이 다 기억났어.”임혜린은 침묵에 잠겼다.과거의 기억들은 온다연을 증오와 수치심에 빠뜨렸다. 그녀는 우유 잔을 꽉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정말 이가 갈려. 내 과거는 짐승보다
“나를 나은별과 바꾼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유강후가 처음부터 그 여자를 제대로 파악하고 도와주거나 편들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결국 이 모든 게 유강후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너희는 다 그 사람에게 잘못이 없다며 용서하는데, 그럼 나는? 나는 그 고통을 당연히 겪어야 했단 말이야?”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유강후가 나은별과 아무 사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고통도 진짜잖아. 그때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고, 바다에 빠진 후 폐렴에 걸려 죽다 살았어. 당시 너무 괴로워 심각한 자기혐오에 빠지고 인격 분열 직전까지 갔었어.”그녀는 눈을 감은 채 컵을 꽉 쥐고 있었다.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했다.그때의 광경이 떠오를 때마다 그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유강후에게 잘못이 없을 수 있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임혜린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속삭이듯 말했다.“됐어,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이 일은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고 몸조리가 우선이야. 지금은 아기가 가장 중요하니까.”온다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또 그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어.”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이?”생각밖에 염지훈이었다. 그는 온다연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다가왔다.“너 왜 여기에 있어?”온다연은 그의 뒤에 서 있는 권예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권예진 씨와 커피 마시러 오신 거예요?”염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권예진을 힐끗 보더니 욕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 카페는 친구가 운영하는 곳인데 지나가다 들러봤어.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온다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괜찮아요? 이렇게 빨리 퇴원했어요? 요 며칠 일이 있어서 문안을 못 갔어요.”염지훈은 마음이 씁쓸했지만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괜찮아. 네가 안 찾아와도 내가 알아서 네 눈앞에
온다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이 일은 제가 직접 얘기해 볼게요. 만약 강후 씨가 정말 그랬다면 반드시 지훈 씨에게 사과하고 보상하게 만들 거예요.”염지훈은 몹시 괴로워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보상? 나한테서 널 빼앗아 갔는데 그게 보상으로 해결될까? 다연아, 왜 아직까지 그 사람 편을 드는 거야?”온다연은 나지막이 말했다.“지훈 씨, 아무도 절 빼앗지 않았어요. 나의 일이고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에요. 강후 씨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우린 결혼하지 못했을 거예요...”온다연은 컵을 움켜쥐었다.“예전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어요. 지훈 씨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염지훈은 손을 떨며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다연아, 정말 기억이...”온다연은 그를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처음 지훈 씨를 만난 건 학교 주차장이었어요. 그때의 전 강후 씨를 엄청 무서워했죠. 무서워서 피하는 저를 지훈 씨가 차에 태웠잖아요.”그녀는 조금씩 하얗게 질려가는 염지훈의 표정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눈보러 산에 갔던 얘기까지 해줄까요?”염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그동안 거짓말을 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때의 너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어. 계속 과거에 집착한다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온다연이 말했다.“그래서 최면을 걸었어요? 주변 친구들과 아이의 존재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게? 난 내가 누군지도 몰랐어요.”“최면으로 우리가 예전부터 만나던 사이라고 한 것도 다 저를 위한 거예요?”온다연은 그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거짓말을 했을 땐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안 했겠죠? 우리 부모님을 속이고 우리가 지훈 씨를 믿고 의지하는 걸 보면서 즐거웠어요?”염지훈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다연아, 믿어줘. 널 다칠게 할 생각은 한 번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온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빼냈다.“용서할게요.”염지훈은 그제야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