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밀어내고 있었다.이건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수영장 사건 이후로 그녀의 마음속에 그는 이미 무서운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아마 그녀는 평생 그날 일을 잊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비록 극단적이긴 했지만, 그가 원하는 상황 중 하나이기도 했다.그녀의 마음과 몸을 전부 갖고 싶었다.손이든 입술이든 발이든, 혹은 다른 부위든 그녀의 처음과 끝은 전부 그의 것이고 반드시 그의 것이어야 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고 쉽게 손에 넣었지만 온다연은 쉽지 않았다. 온다연은 그가 지금까지 제일 정성을 쏟아붓는 상대이거니와 제일 오래 기다리고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벗어난 탓에 점차 인내심이 사라지고 있었고 예상보다 빨리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빨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결정한 만큼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했다. 온다연의 이런 반응도 전부 그의 예상 범위에 있었다.이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10년 전 제 발로 유씨 가문을 나간 건 그녀였으니까.그녀가 먼저 하찮은 작은 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고.그녀가 매번 고양이처럼 숨어 그를 유혹했고.그녀가 그날 방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 그에게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게 했고.그녀가 3년 전에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3년 동안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원래는 5년을 계획했지만 3년으로 줄여버렸다.모든 것 하나하나 전부 그녀의 탓이었다.그는 이미 10년이나 자유롭게 살게 해주었다. 그녀가 성인이 되기 전에 덮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봐준 것이었다.그랬기에 지금 힘들어한다고 해도 응당 그녀가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마에 올려두었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덕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거렸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하니야.”이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강후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그 고
저녁때가 되니 온다연은 이제 좀 살 것 같았다.다만 여전히 정신은 흐릿하여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집사는 저녁을 차린 후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유강후와 온다연만 남게 되었다.유강후가 그녀를 안기도 전에 온다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삼촌, 제 핸드폰은요?”거의 하루 만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전과 똑같이 나른했다. 다만 삼촌이라고 부를 때 여전히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고 아직도 그가 조금 두려운 듯했다. 그래도 그의 예상보다 하루 일찍 그녀가 입을 연 것이다.그는 온다연이 이틀 정도 지나야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거의 지날 때쯤 입을 연 것을 보니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았다.“일단 밥부터 먹어. 다 먹고 나면 새 핸드폰으로 사 오라고 할게.”온다연은 다소 조급해졌다.“그럼 제가 쓰던 핸드폰은요?”바삐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버렸어. 너무 낡아서.”온다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꼬리라도 밟힌 고양이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디에 버렸는데요?”그가 말해주면 바로 달려가 주워올 기세였다.유강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투도 어딘가 차가웠다.“그 작은 상자랑 같이 버렸어. 다연이 네가 얌전히만 있으면 원하는 걸 다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없겠지.”그 말에 온다연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 씩씩대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개를 푹 숙인 채 식탁으로 걸어가 앉았다.유강후는 전복죽을 그릇에 담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번에 그녀는 전처럼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있어도 반항하지 않았다.꼭 이미 그의 손에 길들어진 사람처럼.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정상적인 체온에 유강후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사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효과가 아주 강한 약이었다. 원래부터 그를 두려워하고 있던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스킨쉽을 했으니 말이다. 마지막 과정을
온다연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지나서야 새 핸드폰을 받아들었다.핸드폰을 완전히 손에 넣기도 전에 유강후가 물었다.“주한은 누구지?”온다연은 순간 당황했다.“아, 제 그림을 사간 고객님이에요.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거든요. 저한테 매달 그림을 한 폭씩 그려서 달라고 하면서 1년 치 그림값을 줬거든요.”유강후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다시 건넸다.“그랬군, 너한테 서른 통 넘게 전화를 하던데.”온다연은 핸드폰을 받자마자 뒤로 숨겼다. 이내 무언가 눈치챈 듯 핸드폰을 꽉 움켜쥐면서 작게 중얼거렸다.“이미 60만 원을 저한테 줬거든요. 그래서 아마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 걸 거예요.”유강후의 시선은 핸드폰을 든 그녀의 손으로 향했고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그 자그마한 그림 한 폭이 4만 원 넘는다는 거야?”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네, 조금 귀찮기도 해요. 그 손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거든요. 본인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기도 했어요. 저도 더는 그리고 싶지 않아서 돈을 돌려주기로 했거든요.”이때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움직였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고 유난히도 얌전해 보였다.유강후는 그녀를 보더니 양팔을 뻗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감추었다.이번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아프게 할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옷을 꽉 잡으면서 멈춰주길 바랐다.“삼촌, 아파요. 살살해줘요.”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강후는 멈춰주지 않았다.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켜 그의 욕망을 건드려 버렸다.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허리에 매달리게 하면서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다
“여긴 천연 온천이라 몸을 담그고 있으면 나랑 아이한테도 좋다고 하더군요.”“자성 씨한테서 들은 건데 이 호텔 지분 절반은 강후 것이라고 하더군요. 강후 것이면 그럼 당연히 유씨 가문 것이고 내 아이의 것이기도 하죠. 우린 우리 가문의 호텔로 온 거니까 가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달라고 해요.”정원의 무성한 나무 풀숲 사이로 온다연은 개량 한복을 입은 심미진을 발견했다. 심미진은 살짝 부어오른 배를 만지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있었다.유씨 가문의 사용인인 장혜선이 심미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사모님, 미래 그룹은 안씨 가문의 산업이에요. 유씨 가문과 연관이 없어요. 셋째 도련님 어머님 쪽 재산이니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심미진은 민망해진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요. 어차피 강후는 유씨 가문 사람이잖아요. 나중에 강후가 가진 재산도 전부 유씨 가문의 재산이 될 텐데 설마 팔이 바깥으로 굽겠어요? 아무리 강후의 어머니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결국 나중엔 전부 아들에게 물려줄 거잖아요.”그녀는 거만한 모습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유 씨 성을 이어받을 아이라고요. 강후의 미래 친조카라고요. 친조카. 친조카가 삼촌의 덕을 보는 게 뭐 어때서요?”장혜선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네, 사모님 말씀이 맞으십니다.”그러더니 갑자기 심미진의 표정이 굳어지고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이건 전부 온다연 그 X 때문이에요. 그 X 때문에 내가 매일 사모님들 모임에서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내가 사모님들과 친해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어요. 그 X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요.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정말로 어디 모르는 곳에서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내가 하는 일 방해하지 않게.”배를 만지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그래도 내게 아들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본처면 뭐해요, 어차피 아들도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휴식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하며 그녀는 휴식실의 작은 침대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문이 천천히 열리고 키 큰 남자가 휴식실로 들어왔다.남자는 길고 마디마디 선명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조금 간지럽게 느껴진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방에서 퍼진 시원한 우디향을 맡게 되었다.비몽사몽 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오는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삼촌...”방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유강후는 셔츠 한 장을 몸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셔츠는 달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덕에 온다연은 정신이 확 들었다.하지만 빠르게 유강후의 손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오후 내내 여기 있었던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삼촌, 저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고개를 떨군 그녀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인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유강후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안았다.“그 사람들 때문이야?”온다연은 그의 셔츠를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작게 말했다.“저 오늘 그 사람들 봤어요.”유강후는 침묵했다.어두웠던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는 것도 보지 못했다.시간이 꽤 흐른 뒤, 유강후는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배 안 고파?”온다연은 갑자기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비비적거렸다.“삼촌, 우리 다른 곳으로 가요, 네?”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다만 그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여기 온천은 상처 회복에 좋으니까 며칠 뒤에 떠나자. 그때가 되면 더는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될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은 한 손도 올려 그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마지막으로 구경해 본 게 언제였을까?아마 4년 전일 것이다. 주한이 떠나간 뒤로 더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은 다시 허공에 붕 떴다. 유강후가 또 그녀를 안아 올린 것이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두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꼭 인형을 안고 있는 것처럼 품에 꽉 끌어안았다.두려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당연히 거부감도 들었지만 온다연은 자기 생각대로 했다.그녀는 버둥대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최대한 몸이 떨려오지 않도록 애를 썼다.유강후는 이 자세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 그녀를 안고 가만히 있었다.두 사람은 모두 얇게 입고 있었다. 그런데 찰싹 붙어 있으니 온다연은 그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에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그녀는 너무도 불편했지만, 그는 계속 그녀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허리가 뻐근해져 몸을 살짝 버둥대며 자세를 바꿔보려고 했다.그러나 움직이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꽉 끌어안았고 자세를 바꿔 자신과 마주 앉게 했다.너무도 야릇하고 민망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거의 그의 몸과 찰싹 붙어 있었고 그의 심장 소리도 들려왔다. 심지어 옷감 사이로 뜨거운 그의 온기도 생생하게 느껴졌다.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고 그의 옷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은 땀으로 축축해졌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자신의 몸에 비비더니 큰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았다.그녀의 발은 그녀의 손처럼 작고 부드러웠다. 발가락도 동글동글하니 만지기만 해도 얼마나 귀여운지 알 수 있었다.게다가 그저 크기만 작을 뿐 살집이 조금 있었고 만지면 아주 말랑거렸다.꼭 말랑거리는 느낌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녀의 한쪽 발만 한참 만지작거렸다.온
유하령은 노크하면서 웃으며 말했다.“분명 나은별 씨는 아닐 거예요. 오늘 나은별 씨랑 만났었거든요. 삼촌, 언제부터 집안에 여자 숨기는 취미가 생기신 거예요? 얼른 나오세요. 우리 아빠가 아직도 삼촌 기다리고 계시잖아요.”온다연은 더욱 긴장해졌다. 버둥거리며 유강후의 몸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화가 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유하령, 자꾸 선을 넘는구나.”유리방이라 방음은 그다지 잘 안 되었다. 유강후의 분노가 섞인 차가운 목소리는 그대로 유하령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유강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유하령은 또 한 번 간 크게 기어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삼촌, 빨리 나오세요. 상의할 것이 있다고요.”말을 마친 후 방 문 앞에서 사라졌다.유강후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안고 있던 온다연만 의자에 홀로 남겨둔 채 허리를 굽혀 이마에 뽀뽀했다. 그제야 그는 온다연의 이마는 이미 축축할 정도로 땀이 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도 축축했다.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휴지를 뽑아 이마와 손바닥을 세심하게 닦아주었다.“다연아, 예전에는 몰랐는데...”“삼촌!”순간 온다연이 갑자기 말허리를 잘랐다. 뒷말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새였다.“전 예전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제가 여기 있다는 거 그 사람들한테 알리지 말아요.”유강후는 그윽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쓸면서 다소 차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온다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풀면서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삼촌, 나은별 씨랑은 언제 약혼해요?”유강후의 손이 멈추었다. 순간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온다연, 혹시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그의 두 눈을 피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목소리에선 쌀쌀함이 느껴졌다.“다연아, 그날만 손꼽아 기다린대도 소용없어.”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드러운
유씨 가문의 두 형제는 아주 바람직하게 생겼다. 유자성은 40이 넘는 나이었지만 여전히 점잖고 위엄이 있었으며 그의 기세는 누구라도 탄복할 정도였다.유강후는 당연히 더 잘생겼다. 차갑고 귀티가 흐르는 냉미남 유형에 그 나이대에 보기 힘든 상위 포식자의 맹렬한 기운이 흘러넘쳤다.겉모습으로만 봐도 두 형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멀지 않았던지라 창가에 서서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유자성의 목소리는 묵직했다.“염지훈은 말도 잘하고 일도 척척 잘하지. 젊은이 중에서도 꽤나 잘생긴 축에 속하니까 하령이 짝으로 맺어주는 거 어떻게 생각해?”유강후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가웠다.“하령이만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죠.”말을 마친 뒤 그는 틈이 생긴 창문과 커튼 쪽을 보았다.유자성은 동생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염씨 가문은 수완이 좋아. 집안도 꽤나 좋고 흠잡을 데가 별로 없지. 하지만 같은 사업인으로서 생각하면 우리 유씨 가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유강후는 유리방을 빤히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형, 유씨 가문이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만 해도 끝이 보이는데 정말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그래.”유자성은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잘 되고 싶어도 이제 더는 안 될 거야.”이때 심미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하령이는 염지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최근 두 달 동안 매일 염씨 가문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잖아요. 젊으니까 가끔 마음 조절이 않나 봐요. 그래도 약혼식은 될수록 빨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속도위반으로 먼저 임신하기라도 하면 저희 가문의 이미지에도 안 좋잖아요.”그러자 유자성은 아주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내 딸은 그런 아이가 아니야.”심미진은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고 과일을 가져와 껍질 까는 척했다.유강후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