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연은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녀는 쫓아가려는 충동을 애써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분이 유강후의 어머니 강해숙이에요. 강씨 가문의 아가씨죠.”온다연이 고개를 홱 돌렸다.강해숙은 유재성의 부인인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한 번도 유씨 본가에 돌아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온다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그런 분이 갑자기 돌아왔다. 게다가 딱 봐도 급하게 돌아온 것이다. 유강후가 심각한 상태인 게 틀림없다.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방법을 대서 들어가야겠어요. 유강후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에요. 가봐야 해요. 더 이상 이렇게 기다릴 수 없어요.”장화연이 그녀를 잡아당겼다.“들어가면 뭐 해요? 수술해 줄 거예요?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셋째 도련님은 아직 위험한 고비를 넘기지 못해서 들어가도 보지 못해요. 중환자실에는 의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들어갈 수 없어요.”온다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병원 앞을 지키고 있는 완전 무장 경호원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잠시 후, 바람이 불기 시작해 곧 폭설이 내릴 것 같았다.장화연은 온다연이 감기에 걸릴까 봐 억지로 끌고 호텔에 돌아왔다.하지만 장화연이 약을 달여서 들고 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방에 없었다.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승합차에서 온다연이 병원 간호사복을 갈아입고 있었다.임정아는 팔짱을 낀 채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지난달까지도 도망치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그새 푹 빠졌어요? 유강후가 곧 죽는데, 지금이 도망칠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온다연은 멈칫하더니 말했다.“정아 씨와 상관없는 일이에요.”“네네, 저하고는 상관없죠. 하지만 궁금한 게 있는데, 임 교수가 저의 삼촌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고 제가 영원시에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고?”“어려울 게 뭐 있어요? 회사에서 정아 씨가 여기서 촬영하고 있다고 매일 홍보하는데.”“임 교수님이 정아 씨 삼촌이라는 건 기사를 통
그가 싸늘한 시체처럼 여기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다.이 장면이 앞으로 악몽이 될 것 같다.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차가운 손을 건드렸다.“유강후...”그의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거무스름해 보였고, 손에는 전혀 온기가 없었으며 건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예전에는 아침에 그녀가 조용히 이름을 부르면 그는 오랫동안 키스를 퍼부었다.이번에도 그가 일어나서 키스한다면 그녀는 열광적으로 반응할 것이다.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강후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뿐이고 들리는 건 차가운 의료기기의 작동 소리뿐이다.온다연은 그를 바라보며 괴로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유강후,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이러면 제가 당신에게 목숨을 빚지게 되잖아요. 이런 방법으로 저를 묶어두고 싶으면 빨리 일어나세요.”이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그녀는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그녀는 링거를 꽂지 않은 손을 당겨다 자기 아랫배에 대고 울먹이며 말했다.“저 임신했어요. 당신이 아기를 포기하면 저는 당신을 다시 보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너무 괴로워 이 말을 했을 때 유강후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온다연은 말을 이었다.“다만 앞으로 저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마세요. 제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쓴 약을 마시라고 강요하지도 마세요.”“그리고 저는 나은별이 싫어요.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유강후, 당신이 이 아이를 없애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 곁에 오랫동안 머물 것이예요.”“사실 당신이 만든 음식은 맛있었어요. 갑자기 먹고 싶네요.”“아저씨, 보고 싶었어요...”그녀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목이 메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주변의 기기들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온다연은 뒤를 돌아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모두 마스크를
온다연은 머리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유강후!”즉시 뛰어갔지만 그녀의 손이 이송침대에 닿기 전에 유강후는 응급실로 옮겨졌다.그녀는 간호사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밀려났다.“여기는 수술실이에요. 나가세요.”현장은 어수선했고, 유씨 집안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온다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유자성에게 발각됐다.“너 온다연이구나.”그는 앞으로 다가와 온다연의 모자와 마스크를 확 벗겼다.온다연은 한발 물러서서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저는 그냥 아저씨를 한 번 보고 싶어서...”“닥쳐!”유자성의 눈에는 싫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강후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 너는 자격이 안 돼.”“너를 받아준 것이 후회되는구나. 너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유씨 가문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어.”유자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하령이 달려들어 뺨을 후려갈겼다.“천한 년, 감히 우리 오빠를 꼬시고 우리 삼촌을 이 지경이 되게 해? 죽여버릴 거야.”온다연은 몸을 낮추어 피했다.이때 최금영이 호통쳤다.“저년을 죽도록 두들겨 패거라.”경호원처럼 보이는 사람 두 명이 곧바로 온다연을 붙잡았다.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유씨 집안과 관계가 없다면서요? 무슨 자격으로 저를 때리는데요?”“이건 법을 알면서 고의로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최금영은 화가 잔뜩 나서 온다연을 가리키며 말했다.“때려! 주둥이를 찢어놔!”손바닥이 곧 온다연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그만!”경호원의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강해숙이 온다연의 앞에 다가가더니 말했다.“놓아줘요.”경호원은 온다연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강해숙은 그녀를 자세히 훑어본 후 물었다.“네가 온다연이니?”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듣기 좋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박력이 있었다.온다연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유씨 집안 사람들 쪽으로 돌아서더니 말했다.“내 아들이 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인데, 누가 감히 건드려?”그녀는 온다연의 앞에 서서 부드럽지만
온다연은 묵묵히 의자 위의 캐시미어 숄을 그녀에게 건넸다.“이걸 걸치세요.”강해숙은 그것을 받아서 어깨에 걸치더니 담배를 던지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내 아들이 지금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엄마인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내 아들의 성격을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걔 마음속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그녀는 다시 한번 온다연을 훑어보았다.“어느 단계까지 갔어?”온다연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또 말을 이었다.“대답할 필요 없어. 걔가 널 강박했다는 걸 알아. 수단을 써서 너를 억지로 곁에 두고 자유도 박탈했겠지.”그녀는 극히 지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미안해. 내가 아들을 잘못 교육해서 너한테 폐를 끼쳤어.”그녀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너를 위해 죽을 지경이 됐으니 이전의 일은 퉁친 셈이야. 이제 너는 자유로운 몸이니 떠나렴. 장화연한테도 너를 막지 말라고 말해둘게.”강해숙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온다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한참 후에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가요. 아저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강해숙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후를 좋아해?”온다연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아까 하신 말씀이 절반만 맞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통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도 기꺼이 원한 것이고 저도 아저씨를 이용했어요. 그러니 피차일반이라 할 수 있죠.”강해숙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앞으로 나를 강 대표라고 불러. 네가 이렇게 담대할 줄은 몰랐네. 감히 내 아들을 이용하다니.”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아저씨가 저를 이렇게 아낄 줄은 몰랐어요.”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이 다시 가슴속에서 치솟아 올랐다.알고 보니, 이 세상에 그녀를 이렇게 아끼는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아랫배에 올려놓고 침묵을 지켰다.강해숙은 마음이 초조해서 온다연의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 못했다.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강후가 언제 깨어났는지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차분한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유강후...”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목멘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고, 손에 든 칼도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손을 가져와 봐.”온다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살살 해.”온다연은 잔뜩 긴장하며 이내 그를 놓아주었다.“미안해요. 혹시 상처 부위를 건드렸어요?”유강후는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큰 병을 앓고 난 후의 병색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머리가 좀 어지러워. 너무 오래 자서 그런가 봐.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온다연은 상처 부위가 갈라질까 봐 걱정하며 즉시 의사를 부르러 가려고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잔뜩 긴장한 그녀를 불러세웠다.“조금 있다가 불러. 먼저 내 곁으로 와 봐.”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손에 칼에 베인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온다연은 손을 빼며 말했다.“부주의로 긁힌 거예요.”사과를 너무 오래 깎다 보니 가끔 집중하지 않으면 다쳤다.유강후는 침대 가장자리를 툭툭 쳤다.“여기 앉아.”온다연은 얌전히 그의 옆에 앉았다.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건드리더니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살이 많이 빠졌네.”온다연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도 살이 많이 빠졌어요.”그녀는 얌전하고 온순하게 그의 가슴팍에 엎드려 나지막이 말했다.“너무 오래 잤어요. 10여 일이 지났거든요. 아저씨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어요.”유강후는 말없이, 그저 조용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칼날이 온다연을 향할 때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전에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적이 많은데,
물론 물어봐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온다연이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너를 싫어할까 봐 걱정돼?”얼굴이 더 빨개진 온다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바닥을 주무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온다연, 아무도 내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어. 유씨 가문이든, 강씨 가문이든, 그들의 취향은 아무 소용이 없어.”이때 임 교수가 들어오자, 온다연은 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다시 한번 자세히 검사한 후 임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이 가져온 약이 효과가 좋아서 빨리 회복되셨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며칠 일찍 깨어나셨어요. 앞으로의 회복도 이상적일 것으로 예상됩니다.”“오늘부터 유동식을 먹을 수 있어요. 큰 운동은 하지 말고 너무 흥분해도 안 돼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이번에는 강해숙과 다른 유씨 가문 사람들이 들어왔다.그 속에 유민준도 있었다. 그는 온다연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다연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그는 거의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다.요 며칠 그는 온다연에게 말을 걸려고 각종 기회를 이용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온다연은 항상 그를 피했고, 유씨 가문의 사람들도 단단히 감시해 온다연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오늘이 절호의 기회다. 온다연이 상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온다연이 동의할 줄이야.“밖에 나가서 얘기해요.”온다연은 말하면서 유강후를 힐끗 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문을 나서자마자 유민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잘 들어요. 저는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전혀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앞으로 더 이상 저한테 매달리지 마세요. 우리가 단둘이 얘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유민준은 감정이 약간 격해졌다.“아니, 그럴 리 없어. 내가 이전에 너한테 못되
유하령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 분명하다.그녀는 경멸과 혐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온다연, 네년이 감히 우리 오빠를 이렇게 대해? 이렇게까지 비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죽으면 돼?”“닥쳐!”유민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가 맨날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다연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뭐라고?”유하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민준을 쳐다보았다.“오빠도 작은 아빠처럼 저년 때문에 나한테 못되게 굴 거야?”유민준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우리가 이전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오빠!”유하령이 분노하며 유민준의 말을 잘랐다.“얘한테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얘가 뭔데? 얘랑 얘 이모는 모두 품성이 나쁘고 뻔뻔스러운 년들이야.”찰싹! 온다연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유하령에게 따귀를 한 대 갈겼다.유하령은 완전히 멍해졌다.온다연이 먼저 때릴 줄은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온다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네가 고유정을 들여보냈지? 네가 아니면 내가 테이프 커팅식 현장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어떻게 현장에 들어갈 수 있어?”“고유정이 나를 죽였다면 너는 뜻을 이루었을 것이고, 나를 죽이지 못해도 고유정이 감옥에 가게 되잖아. 어차피 고유정은 상갓집 개와 같으니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그녀는 유하령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아저씨가 나를 구하려고 칼을 맞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겠지. 너 때문에 아저씨가 죽을 뻔했어.”유하령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고유정을 못 본 지 오래됐어. 내가 들여보냈을 리가 없잖아?”그녀의 표정에서 온다연은 원하는 답을 얻었다.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하령을 노려보았다.“유하령, 이건 다 자업자득이야. 아저씨가 너를 가만둘 것 같아? 강씨 가문에서 너를 가만두겠어? 이 일은 유씨 가문 아가씨라는 신분도 소용없어. 감옥에 갈
유강후는 표정이 잔뜩 굳어있고 눈빛도 차갑고 침울했다.화났다는 것을 눈치챈 온다연은 물티슈를 뽑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깨끗이 닦은 후 손을 유강후 앞에 내밀었다.“그 사람이 잡았던 손을 깨끗이 닦았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그 자식과 단둘이 얘기하지 마.”그는 또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것 같았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그 자식이 너를 괴롭히지 않았어?”온다연은 솔직하게 말했다.“있어요.”유강후는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너한테 무슨 말을 했어?”온다연은 그의 옆에 앉은 후 그의 손을 자기 얼굴에 대고 속삭였다.“아저씨가 깨어나기 전에는 그 사람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유씨 가문 사람들이 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잖아요. 제가 피할 필요도 없이 그 집안 사람들이 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어요.”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좀 풀렸다.“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저씨와 나은별은 어떤 사이에요?”“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유강후의 표정을 봐서는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중요한 얘기가 있는데, 나은별과 어떤 사이인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그 중요한 일을 말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보드라운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복잡한 일이라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하기 어려워. 내가 좀 힘이 생기면 천천히 말해줄게. 나와 나은별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은 말해줄 수 있어.”“두 분이 외국에서 결혼하지 않았어요?”온다연의 말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두 사람은 약혼반지도 있잖아요...”그 반지는 그녀의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무슨 반지?”유강후가 어리둥절해하자, 온다연이 뾰로통하게 말했다.“아저씨가 항상 끼고 있는 그 은색에, K자가 새겨져 있는 반지 말이에요.”유강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담담하게 웃었다.그는 그 은색 반지를 빼서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 놓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