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고작 이런 방법으로 저한테 덤빌 생각을 했다면 크나큰 오산이에요. 제가 지금 인내심이 있을 때 물러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연시온 씨가 누나네 집에서 딸을 키운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동국 왕실의 체면은 더할 나위 없이 짓밟히겠죠!”연시온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강 대표가 스캔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의외네요.”유강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저랑 진유나 씨 사이에 끼어들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맞은편 바다가 연시온 씨가 이번 생을 마무리할 곳이 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연시온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안윤희 씨처럼요? 동남아시아까지 손을 뻗을 생각을 다 하고, 강 대표도 참 대단해요. 안윤희 씨 죽음 말이에요, 강 대표가 그런 거죠?”유강후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동요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연시온 씨, 부디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곧장 로비로 들어갔다.대진 그룹은 6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제일 꼭대기가 본부 회의실이었다.장장 네 시간에 걸친 회의를 마치고 나서야 대진 그룹의 최근의 동요가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그리고 대진 그룹은 오아시스 그룹과 대대적으로 합작할 것이라는 기사를 대외적으로 내보냈다.이는 외부에서 봤을 때 진씨 가문은 결국 오아시스 그룹과 혼인 관계를 맺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또한 동국 왕실이 이번 경쟁에서 패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회의가 끝난 뒤에도 진수현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진수현은 단호하게 유강후에게 경고했다.“이런 방법으로 대진 그룹을 살렸으니 제가 저희 딸을 강 대표님에게 넘겨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 딸은 절대 이번 혼인 관계의 희생양이 될 수 없어요.”안심은 진수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그만 해요, 당신 사흘이나 못 잤잖아요. 화 그만 내고 나랑 같이 돌아가서 쉬어요, 다른 일은 내일 다시 말하면 되잖아요.”진수현은
몇몇 삼촌뻘 원로들은 온다연에게 오아시스 그룹 대표를 좀 소개해달라며 유강후 더러 식사 자리를 마련하라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이 사람들은 진수현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비서들로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피땀을 흘려가며 대진 그룹을 성장시켰기에 온다연은 그저 그들의 말에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이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온다연이 유강후와의 일에 대해서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먼저 원로들과 저녁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식사 장소는 대진 그룹의 맞은편에 있는 호텔이었다.식사 자리에서 유강후가 원로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유강후는 오아시스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허세를 부리지도, 어린 나이라고 주눅이 들지도 않는 딱 적당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수년간 이 바닥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한 노련한 경력자들도 유강후를 감히 막 대하진 못했다.진중한 사람은 자연히 눈치라는 것을 챙길 줄 알지만 어린 사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 같았다.몇몇 고위간부들은 유강후의 초대를 받고 자신들의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하나는 온다연을 만남으로써 미래의 진씨 가문 후계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오아시스 인터내셔널에 방문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다만 온다연과 유강후가 워낙에 시선을 끄는 타입인지라 뺏겨서는 안 될 마음을 뺏긴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사람들의 마음을 유난히 잘 꿰뚫어 보았고 술자리가 후반으로 넘어갈 때쯤 태도가 변해 사람들은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서둘러 식사 자리를 끝냈다.다음 날 대진 그룹은 또 기자회견을 열어 온다연이 미래의 대진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렸다.저녁에는 당연하게도 연회가 열렸다.유강후는 어제 봤던 고위간부들의 자녀들과 또 마주치게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유강후가 아무리 온다연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고 한들 진씨 가문의 호텔에서 열린 연회였기에 온다연은 연회의 절반도 채 버티지
온다연의 눈은 흐릿했고 볼은 비정상적으로 빨갰다.마신 거라곤 과일주 두 잔이 전부였는데 이렇게까지 불편한 게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머리가 어지럽고 몸은 잔뜩 달아올랐으며 그 와중에 어딘가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머릿속에는 꿈에서 봤던 야한 장면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나타났다.게다가 유강후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도 향기로웠다.온다연은 계속해서 맡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온다연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본능에 따를 뿐이었다.온다연은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윽고 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기댄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강 대표님 진짜 향기롭네요...”그리고는 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의 두 손은 유강후의 셔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탄탄한 복근 위를 이리저리 누볐다.“이런 느낌이었군요...”“막 딱딱하진 않네요. 전 이 위에서 빨래라도 빨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네요...”어느새 온다연의 자유로운 손은 유강후의 허리에 다다랐고 당장이라도 바지를 내려버릴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숨을 들이쉬고는 제멋대로인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몸 좋은 남자들 영상을 얼마나 본 거예요?”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비비며 여전히 이곳저곳을 만지며 대답했다.“그,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닌데요. 그냥 가끔 좋아요나 누르고...”역시 솔직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얇은 허리를 자기 몸쪽으로 끌어다 딱 붙이고는 속삭였다.“그럼 다른 사람의 복근을 만져본 적은 있어요?”유강후는 말하면서 온다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만약 온다연이 염지훈의 것을 만져봤다고 하면 오늘 밤 이 허리를 놔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온다연은 그 순간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몸속의 끓어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짐을 느꼈다.온다연은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편안해지는지를 알 수 없었다.그런 와중에 유강후의 몸은 차가웠
유강후는 바로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뚜껑을 열어서 온다연의 입에 대주었다.그러는 동시에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아, 건물 아래에 깔린 진씨 가문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오늘 밤 유나 씨한테 술을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찾아, 내일 아침에는 누군지 반드시 알아야겠으니까!”말을 마친 유강후는 전화를 끊고 계속해서 온다연에게 물을 먹였다.찬물을 마신 온다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시원한 감각이 드는 것 같았다.하지만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속이 끓는 듯한 홧홧한 열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오직 눈앞의 이 남자만 차가웠다. 게다가 좋은 향기까지 나니 그에게 가까이 붙지 않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찰싹 붙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향기로워...”이미 제어할 수 없는 두 손은 여전히 유강후의 허리춤을 매만지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는 유강후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게 만들었다.곧이어 온다연은 아예 유강후에게 달라붙어 매달리기까지 했다. 온다연은 까치발을 들어 유강후의 목을 감쌌고 부드러운 입술로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너무 좋아, 향기로워... 강 대표님, 저 좀 이상해요...”유강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온다연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어떤 놈이 유나 씨한테 이딴 걸 먹인 거죠?”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고개를 숙여 정처 없이 방황하는 작은 입술을 감쳐 물었다.온다연의 입안에 남아있던 달달한 과일주의 향은 최음제라도 되는 것처럼 유강후의 봉인되었던 3년간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제일 흠뻑 빠져 살던 시점에 온다연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눈처럼 유강후의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리고 유강후가 온다연에 대한 절절한 사랑도 그때 그 순간에 영원히 봉인되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온다연이 다시 유강후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유강후의 죽어가던 욕망도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온다연의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입안의 달달한
온다연은 흥분감이 참을 수 없이 몰려왔다.“못 참겠어요, 터져버릴 것만 같아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얹어주며 말했다.“만져봐요, 엄청 뜨거워요...”손에 들어차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유강후도 참을 수 없이 흥분감이 몰려왔고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금방 괜찮아지게 해줄게요. 유나 씨가 원하는 걸 말해줄래요?”온다연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본능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모르겠어요, 이상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으로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짚어주었다.“여기, 그리고 여기, 다 이상해요...”그리고 눈 깜빡할 새에 온다연은 유강후에 의해 푹신한 침대로 던져졌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건장한 덩치에 다 가려지고도 남았다.두 사람 모두 이성을 잃어갈 때 유강후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온다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이건 유나 씨가 먼저 원한 거예요, 맞나요?”온다연은 온몸을 지배한 열감에 당장이라도 타버릴 것만 같아 이성적인 사고 따위는 불가능했다.“맞아요, 도와줘요...”유강후는 온다연의 하얀 귓불을 깨물고는 말했다.“그럼 오늘 이 일이 벌어지고 나서도 날 책임지겠다고 약속해줘요.”온다연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아 색색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책임질게요, 강 대표님이 원하는 건 모두 다 들어줄게요...”쫘악!온다연의 몸을 감고 있던 마지막 천 쪼가리가 그렇게 찢어졌다. 유강후는 눈에 안광이 돌았다.“분명 유나 씨가 말한 거예요!”서로를 완전히 가졌다는 그 느낌이 주는 전율은 감히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이 짜릿했다.3년의 공백이 마침내 메꿔지는 순간이었고 잃어버렸던 갈비뼈를 찾아 다시금 완전한 몸이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3년이라는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둘은 매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몸과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날아가 버린 이성 속에서 남은 한 줄기 본능에 의해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다.밤에 시작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타오르다 못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아, 아니에요, 제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전 그냥 과일주를 마셨을 뿐인데 어떻게...”유강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바지를 올리는 걸 보니 인정하기 싫은가 봐요? 유나 씨 이런 행동이 날 먹고 버리는 거랑 뭐가 다르죠?”그리고는 일어나 앉아서 온다연을 등지고 말했다.“그럼 그냥 가요. 전 그냥 유나 씨 어장관리에 걸려든 물고기였나 보죠. 유나 씨라면 다를 줄 알았는데 바로 다음 날이 되니 시치미를 뗄 줄은 생각 못 했어요. 어젯밤에 분명 책임진다고 해놓고 아침에는 발뺌하네요. 제가 아무리 증거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가도 돼요.”온다연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가 잘못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결국 온다연은 망설인 끝에 사과했다.“미, 미안해요!”유강후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미안해도 무슨 소용이 있나요. 전 생각보다 더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미 유나 씨한테 그렇게 놀아난 이상 앞으로의 인생과 감정에 대한 흥미를 제대로 잃었는걸요. 처음부터 유나 씨처럼 무책임한 사람을 만났으니 앞으로는 어떤 사람도 만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온다연은 다소 놀랐다.“강 대표님, 처음이에요?”유강후는 퉁명스레 대답했다.“그럼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여자라면 다 좋다고 달려들어 잠자리를 가질 것 같았나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전, 전 어젯밤에 취한 상태였는걸요...”유강후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대답했다.“다 큰 성인이 술을 마셨다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나요? 그럼 음주운전도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생긴 사고니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겠네요? 술에 취했다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치면 이 세상에 모든 범죄는 모두 음주라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겠네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논리에 말문이 제대로 막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 전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유강후는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박씨 가문의 박현욱인가요?”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대답했다.“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 사람과도 안 되겠네요...”유강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단지 결혼을 약속한 것이지 약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결혼은 더구나 하지 않았고요. 오직 말로 오고 간 약속일 뿐이네요. 이런 일은 두 집안이 의논해서 그쪽 집안에 적당한 보상을 해주면 돼요. 그 보상은 제가 할게요. 박씨 가문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해도 제가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유나 씨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전 지금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요. 이 일은 제가 돌아가서 다시 잘 생각해볼게요. 책임은 무조건 질 거에요, 단지 지금 덥석 강 대표님의 제안을 수락하기 힘들어서 그래요...”유강후가 얼른 물었다.“생각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요? 열흘, 보름? 아니면 반년, 일 년?”온다연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기껏해서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돼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쳤다.“참 오래도 생각하네요. 책임지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요. 그렇게 오래 끌 필요 없어요.”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나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어젯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그러고는 옷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처참히 찢어져 바닥을 뒹구는 드레스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제가 입을 옷이 없어서 그런데 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을 안아다 드레스룸으로 데려다주었다.넓디넓은 드레스룸에는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스타일의 옷들이 꽤 많이 걸려있었다.온다연은 기분이 약간 가라앉아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여자 옷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여기에 다른 여자도 살고 있나?’유강후는 상앗빛 원피스 하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뭐가 됐든 나만 손해잖아?’‘짜증 나.’온다연은 화가 난 나머지 욕조를 내리쳤다.“나쁜 자식. 생각할수록 열받네?”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 아팠고 너무 지쳤다.뜨거운 물에 몸까지 담그고 있으니 점점 더 피곤함이 밀려왔다.결국 욕조에서 나와 침대로 걸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도우미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바라봤다. 곧이어 시선은 그녀의 목에 난 붉은 자국에 향했고 할 말이 있는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전하실지도 모르니, 옷부터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곧이어 도우미는 온다연의 목을 가리켰다.“여기도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마지못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그러다가 자신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어깨는 물론이고 밖으로 드러난 팔뚝까지 보는 사람을 무안하게 할 자국이 가득했다.온다연은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러나 미처 가리기도 전에 안심이 들어왔다.안심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보고선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고개를 숙였다.“엄마, 그게... 어젯밤은...”안심은 한숨을 내쉬었다.“알고 있어. 강 대표가 찾아왔거든. 지금 거실에 있어.”온다연은 초조함이 밀려왔다.“어떤 얘기를 하든가요?”안심이 입을 열었다.“결혼 얘기. 네 아빠는 아직도 허락할 생각이 없나 봐.”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서로 만나는 중이니?”온다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솔직히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반응에 안심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강 대표가 강요했니?”온다연이 답을 하기도 전에 도우미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사모님,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이 총을 들고 강 대표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얼른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