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졸지에 장 본 봉투를 빼앗긴 사람이 급히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옆집 학생이 본인의 짐과 함께 거뜬하게 들어주고 있는 제 짐이 보였다.
“집으로 가시는 거죠?”
최근 자신의 일상에 함부로 침투하는 남학생이 302호 입장에선 사실상 반갑지 않았다. 무어라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서 다시 제 짐을 가지고 오려 하는데, 학생의 동작이 한 수 빨랐다. 짐을 향해 뻗은 손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제 손에 들린 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어차피 같이 가잖아요.”
“......”
서글서글 웃는 낯을 하는 학생에게 더는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아서 옆집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걸었다. 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많아지자, 그 사람이 눈에 띄게 경계하는 것을 느꼈다.
“지명수배라도 붙었어요?”
대꾸 없이 걸음을 멈추는 옆집을 내려다보며 그가 ‘아님, 잠복 중?’이라고 덧붙였다. 어떤 이유가 됐든 저하고는 관계가 없을 테지만, 왜 이다지도 숨을 죽이며 사는지 궁금하긴 했다.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 사람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해이의 눈빛이 무언가를 가늠해 보듯 전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누군가를 피해 도망 온 신세라면 지금 그 모습은 오히려 더 눈에 띄니 그만두는 게 좋아요.”
“......”
“온 힘을 다해 ‘내 얼굴 보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정곡이 찔린 사람처럼 고개가 더욱 밑으로 내려가는 옆집의 모자로 해이가 손을 뻗었다. 곧 사내의 손이 모자를 부드럽게 벗겨냈다. 그러자 미숙하게 잘라낸 짧은 머리와 그에 비해 긴 앞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얼굴을 내보이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
“남자 흉내도 그쯤하고.”
옆집의 얼굴이 드디어 바닥이 아닌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좀 더 고개를 올려 눈앞의 학생을 응시했다. 오랜만에 정면으로 맞닥뜨린 타인의 시선이었다.
해이는 시야를 가린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상대의 얼굴에서 나이를 가늠하려 애썼다. 저와 같은 학생이라 치기엔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재이.”
“성은요?”
한참 망설이던 옆집 사람이 ‘그냥 재이’라고 답했다.
“저랑 이름이 비슷하네요. 전 주해이에요.”
그렇게 통성명하게 된 뒤로 두 사람은 2주간 마주치는 일 없이 무난한 일상을 보냈다. 다시 만나게 된 건 해이가 야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는 새벽 시간이었다.
어두움이 내려앉은 고요한 골목길 모퉁이에 누군가 쭈그려 앉아 부스럭대는 것이 보였다. 해이는 그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그릇에 머리를 박고 우유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이 없는 길고양이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시선을 돌리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찌는듯한 더위에도 검은 옷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알고 있는 한, 한 사람뿐이었다.
“재이?”
상대가 흠칫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해이는 옆집 사람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경계심이 많던 새끼 고양이는 웬일로 얌전했다.
“왜 항상 새벽에 마주치는지 모르겠네요. 야행성이에요?”
무르팍에 올려둔 팔에 제 얼굴을 기대며 그가 재이를 응시했다. 사내의 시선은 끈질기게 상대의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조금 정돈한 머리 스타일을 한 번에 알아차린 것도 남다른 관찰력 때문이었다.
“머리, 훨씬 낫네요.”
재이는 잠시 상대와 시선을 맞추다가 새끼 고양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는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연신 핥아대고 있었다. 그간 배를 곯았던 모양이었다.
“잘 안 보이길래 잡힌 줄 알았어요.”
재이는 남 일에 관심이 많은 학생을 잠시 바라봤다. 긴 앞머리에 가려 사내의 얼굴에도 빗금이 처졌다. 음울한 그림자가 쳐지지 않은 깨끗한 얼굴. 그가 하는 질문에 나쁜 의도가 없다는 것쯤은 재이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엔 저가 처한 상황을 이미 알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해서 감출 수 없는 경계심이 드러났다.
“...안 잡혀요.”
“그래요. 이왕 도망친 거 잡히면 안 되죠.”
무엇에 도망을 쳤다는 건 사실인 모양인지 옆집 사람은 해이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이내 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양이도 볼일이 끝났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전 체육학과 2학년이에요. 지금은 아르바이트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고.”
학생은 자연스럽게 재이 곁에 서서 함께 걸음을 맞춰 걸었다. 집 방향이 같으니 당연했지만, 누군가 제 곁을 맴도는 게 재이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슬쩍 거리를 만들자, 그가 금세 옆으로 다시 붙어왔다.
“제 의도는 아니었지만, 재이가 도망자 신세라는 걸 알았으니, 저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게 공평한 것 같아서요.”
기껏 이야기했더니 상대는 그저 덤덤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해이는 옆집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하지 않아도 그냥 들어요.”
“......”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당신을 만나면 이상하게 말이 많아지네요.”
본인도 의아하다는 듯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실없는 말을 내뱉는 사이 원룸 건물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무렵 위층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입주민이 내려오는 모양인지 사람의 걸음에 따라 센서 등이 켜지자, 재이가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그는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은근슬쩍 자신의 덩치로 작은 몸체를 가려주자 2층을 향해 내려오던 사람이 해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낯선 사내가 말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에 재이는 온몸이 얼어붙었고, 그녀를 대신해 해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네?”
“여기 사세요?”
낯선 사내의 시선이 은근히 여자에게만 꽂혀 있었다. 해이는 제 뒤편으로 숨은 재이의 손을 능숙하게 깍지 껴 잡으며 미소 지었다.
“네, 그런데요?”
“...그분도요?”
턱짓으로 해이의 뒤편을 가리킨 남잔 기묘하게 날이 선 시선으로 해이를 응시했다. 그가 하는 거짓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여자 친구는 여기 안 살아요.”
겁을 먹긴커녕 제 여자 친구를 지키는 듯한 불쾌한 시선이 낯선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이내 센서 등이 꺼진 공간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무심결에 계속 잡고 있었던 옆집 사람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302호 앞에 다다랐음에도 옆집은 한동안 우둑하니 서 있기만 했다. 해이가 시선을 내려 살펴보자,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는 불빛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재이. 괜찮아요?”
“......”
물음에도 답이 없더니 별안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도어락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어두운 복도 한편에 버려진 듯 서 있던 해이는 어이가 없어 헛숨을 삼켰다.
“뭐야. 기껏 도와줬더니.”
그러나 곧 공포에 질려있던 재이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닫힌 302호 현관을 응시했다.
계단에서 마주쳤던 낯선 사람에게서 풍기던 위화감과 위협.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섬뜩하게 재이를 훑어대던 시선까지도.
해이는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야, 주해이 너 집에 꿀 발라 놨냐?”“뭐가”도원은 요새 들어 술자리를 마다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가는 제 친구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너 솔직하게 말해. 여자 친구 생겼지? 집에 여자 친구 감춰 놨지?”“또 이상한 소리 한다.”“뭐야? 주해이 여자 친구 생겼어?”“진짜? 누군데? 저번에 이도원이 소개해 준다던 그 애?”도원의 목소리가 거의 확성기 수준이라 함께 체력 훈련을 받던 학생들이라면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고된 훈련으로 지쳐 있었던 찰나에 도파민 도는 연애사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해이와 도원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야, 어떻게 생겼는데? 좀 보여줘 봐.”“뭔 소리야. 여자 친구 없어. 이도원이 괜히 설레발친 거야.”“뭘 또 감추냐.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졸지에 여자 친구가 생긴 뒤로 친구와 술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 의리 없고 꼴사나운 사내가 되었다. 결국엔 도원의 손에 이끌려 과 동기 모임에 참석하게 된 그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제 친구를 아니꼽게 응시했다.“뭘 또 그렇게 쳐다봐. 내가 오해하긴 했지만, 그동안 네가 우리랑 안 놀아준 건 사실이잖아.”“군 입소는 언제 한다고?”“이 자식이 가장 아픈 곳을!&rdq
졸지에 장 본 봉투를 빼앗긴 사람이 급히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옆집 학생이 본인의 짐과 함께 거뜬하게 들어주고 있는 제 짐이 보였다.“집으로 가시는 거죠?”최근 자신의 일상에 함부로 침투하는 남학생이 302호 입장에선 사실상 반갑지 않았다. 무어라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서 다시 제 짐을 가지고 오려 하는데, 학생의 동작이 한 수 빨랐다. 짐을 향해 뻗은 손이 무색할 정도로 그가 제 손에 들린 짐을 등 뒤로 감추었다.“어차피 같이 가잖아요.”“......”서글서글 웃는 낯을 하는 학생에게 더는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아서 옆집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걸었다. 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많아지자, 그 사람이 눈에 띄게 경계하는 것을 느꼈다.“지명수배라도 붙었어요?”대꾸 없이 걸음을 멈추는 옆집을 내려다보며 그가 ‘아님, 잠복 중?’이라고 덧붙였다. 어떤 이유가 됐든 저하고는 관계가 없을 테지만, 왜 이다지도 숨을 죽이며 사는지 궁금하긴 했다.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 사람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해이의 눈빛이 무언가를 가늠해 보듯 전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만약 누군가를 피해 도망 온 신세라면 지금 그 모습은 오히려 더 눈에 띄니 그만두는 게 좋아요.”“......”“온 힘을 다해 ‘내
“야 진짜 괜찮은 애라니까. 한 번만 만나봐.”“글쎄 관심 없다니까.”점심 식사 후 몸풀기용으로 함께 농구 중이던 도원이 윗옷 끝단으로 땀을 닦는 해이에게, 끈질기게 제안했다. 줄곧 거절하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예쁘장한 외모에 교육학과인 데다 성격 또한 매우 좋은 학생이었다.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거절한다는 말인가.“자, 얼굴 봐봐. 예쁘지?”액정에 띄운 여러 개의 사진을 친히 넘겨주며 열성을 다하는 도원의 적극적인 태도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던 해이는 농구공을 튕기며 제 눈앞까지 드밀어진 핸드폰을 밀어냈다.“그만해라. 관심 없다고 하잖아. 야, 너 농구 안 할 거면 그만 가.”“아니, 얘가 진짜 이럴 애가 아닌데, 계속 나한테 부탁한단 말이야. 내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만나주라 응?”이번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친구를 내버려둔 채 그가 홀로 농구대를 향해 나아갔다. 큼지막한 걸음으로 다가선 골대 쪽으로 줄곧 들고 있던 공을 던졌다. 넓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공은 깔끔하게 그물망을 통과했다.바닥을 튕기며 떨어진 공을 다시 드리블하며 갖고 온 그가 다시 한번 공을 집어넣었다. 몇 차례 이어지는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던 도원은 제 친구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터덜터덜 그에게로 다가갔다.“나쁜 새끼. 그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 같이 해, 자식아!”도
“야! 주해이!”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갈 길을 멈춰 세운 해이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곧 그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내걸렸다.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매우 매력적인 남잔, 단숨에 제 친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뭐야. 어째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늙은 것 같다?”“죽을 맛이야 지금. 그나저나 제대한 거야?”“해병대 만기 전역했지, 인마.”입대 전보다 조금 피부가 그을린 친구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도원은 친근하게 어깨 위로 팔을 올리곤 평소 자주 찾는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야 어디 가? 나 학과실 가야 돼.”“제대했으면 형님들한테 먼저 보고를 해야지 자식이!”“됐어. 안 가.”귀찮다는 듯 제 어깨 위에 올려진 팔을 치워낸 그는 이내 도원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에도 도원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친구의 근육질 어깨 위에 매달리듯 제 팔을 감았다. 그 반동으로 휘청일 것 같았던 몸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그가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야, 군대에서 대체 뭘 했길래 몸이 더 커졌냐. 징그럽게.”“너도 미루지 말고, 빨리 갔다 와라.”“...우울한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먹으러 가자니까.”칭얼대며 우는소리를 하는 제 친구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