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야, 주해이 너 집에 꿀 발라 놨냐?”
“뭐가”
도원은 요새 들어 술자리를 마다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가는 제 친구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너 솔직하게 말해. 여자 친구 생겼지? 집에 여자 친구 감춰 놨지?”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뭐야? 주해이 여자 친구 생겼어?”
“진짜? 누군데? 저번에 이도원이 소개해 준다던 그 애?”
도원의 목소리가 거의 확성기 수준이라 함께 체력 훈련을 받던 학생들이라면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고된 훈련으로 지쳐 있었던 찰나에 도파민 도는 연애사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해이와 도원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야, 어떻게 생겼는데? 좀 보여줘 봐.”
“뭔 소리야. 여자 친구 없어. 이도원이 괜히 설레발친 거야.”
“뭘 또 감추냐. 그러니까 더 궁금하잖아.”
졸지에 여자 친구가 생긴 뒤로 친구와 술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 의리 없고 꼴사나운 사내가 되었다. 결국엔 도원의 손에 이끌려 과 동기 모임에 참석하게 된 그는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며 제 친구를 아니꼽게 응시했다.
“뭘 또 그렇게 쳐다봐. 내가 오해하긴 했지만, 그동안 네가 우리랑 안 놀아준 건 사실이잖아.”
“군 입소는 언제 한다고?”
“이 자식이 가장 아픈 곳을!”
내일모레면 떠나는 친구를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해이가 우는 척을 하는 도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의 말을 속삭였다.
“남자가 돼서 와라.”
우는 척을 했던 도원의 눈가에 정말로 눈물이 고이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원은 제 앞에 놓인 소주를 말은 500리터의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온 남잔, 곧장 땀에 전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욕실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몸을 씻어내던 그가 당황한 얼굴이 되어 다시 화장실 바깥으로 나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거품이 그대로 묻어있는 머리를 한 채로 대강 아래 바지만 주섬주섬 챙겨 입은 해이는 그대로 집을 나와 302호 집 앞에 섰다. 지금이 몇 시인지, 제 옷 상태가 어떠한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초인종을 여러 차례 눌러도 반응이 없으니, 그가 이내 쾅쾅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302호는 화들짝 놀라 문 쪽을 응시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상대의 태도에 여자의 눈이 불안감으로 매우 흔들렸다.
“계세요? 늦게,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해서요. 저 옆집에 사는 학생이에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잡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 순간 안도감과 불편함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이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혹여나 학생이 또 문을 무지막지하게 열어젖힐까 봐 급히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하의만 간신히 걸쳐 입은 옆집 학생이 한쪽 눈만 떠올린 채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정말 죄송해요.”
그의 머리에서부터 차마 헹구지 못한 하얀 거품이 이마를 따라 눈 안쪽까지 흐르기 직전이었다.
“악. 따가워. 제발 화장실 좀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갑자기 물이 안 나와서요.”
어안이 벙벙했지만, 도와줄 수밖에 없는 몰골이었다. 옆집 사람은 버티고 서있던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학생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거품이 눈에 들어간 여파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두 손을 휘저으며 조금씩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버벅대며 신발을 벗고 나선 곧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몸에 묻은 거품들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다 씻고 거울을 확인하니 아직도 따끔거리는 오른쪽 눈이 조금 붉어진 게 보였다.
‘이건 뭐지?’
화장실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아내던 중, 미처 닫히지 않은 선반 틈새로 갈색 종이봉투가 보였다. 무심결에 그것을 꺼내 든 학생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정돈되지 않은 많은 양의 현금이 봉투 안에 쑤셔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표정을 꾸며냈다.
몇 분이 지나 멀끔한 모습의 그가 하의만 덜렁 입은 채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재이는 거실 테이블 위, 작은 조명만 켜놓은 채 텔레비전을 보다가 학생을 발견하곤 엉거주춤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물이 안 나와서 당황했거든요.”
“...네.”
학생은 그녀가 정말 말수가 없는 여자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웃통을 벗은 상태의 남자를 보고도 옆집 사람은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았다.
“혹시나 당신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요. 새벽이라도 괜찮아요.”
너스레를 떨며 시원하게 미소를 짓던 남잔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찾아 신고 제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니, 화장실 문 앞에 대강 벗어놨던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세탁기에 던져 넣으면서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거액의 돈을 대강 화장실 선반 안에 넣어놓고 사는 걸까. 어째서 수상한 남자가 집 앞을 어슬렁거리고, 환한 낮엔 좀처럼 나오질 못하는 것일까. 이리 숨죽여 살 정도로 몹쓸 짓을 저지른 걸까.
그는 돌연 옆집 사람이 몹시도 궁금해졌다.
“...평소엔 눈도 못 마주치더니, 오늘따라 사람 눈을 빤히 봐.”
그러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는 자신의 말에 빤히 눈을 들여다보던 여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순간, 상황을 구분 못 하고 뛰어대는 제 심장에 그가 당황한 듯 손으로 가슴 부위를 꾹 눌렀다.
“...뭐지. 왜 그렇게 쳐다봤지?”
그 시선은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정말 옆집 학생이 저를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대를 걸어보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그런 기묘한 눈빛이었다.
...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교 근처 공원을 뛰며 최근 복잡했던 머릿속을 정리했던 그는 가뿐한 발걸음으로 집 계단을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깨끗하게 몸을 씻고 집 안 한편에 쌓여있는 분리수거 감과 쓰레기를 한 뭉텅이 가지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분리수거대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일순 난처한 표정이 됐다. 요 며칠간 제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주인공이었다. 사내는 앞머리를 축 내리고 음울한 표정의 옆집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인사하는데도 상대는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제 발끝만 응시하는 꼴이 여전히 사회성이 없는 태도였다.
‘하여튼 음울해.’
속으론 그리 생각하면서도 학생이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그제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여잔 기웃기웃 무언가를 찾는가 싶더니 이내 골목 어귀 끄트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새끼 고양이에게 데운 우유가 든 그릇을 내밀었다.
“옆집에 사는데 마주치면 인사 정돈해요. 이웃사촌이잖아요.”
한 번도 저를 먼저 아는 척해주지 않는 옆집 사람에게 기분이 나빴다면 그냥 저도 모른 척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해이는 굳이 고양이에게 먹어를 주는 옆집 사람에게 다가가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다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커튼은 다 쳐놓고 고양이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매번 나와요?”
어느새 제 곁에 함께 앉아 있는 학생을 잠시 응시하던 재이가 손가락으로 제 원룸 거실 창을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린 그가 이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블라인드가 아주 살짝 걷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아마도 새끼 고양이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서로 비밀 하나씩 공유할까요?”
학생의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재이가 그를 응시했다. 긴 앞머리 틈새로 여자의 까만 동공이 보였다. 해이는 그 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상대도 굳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시선은 그렇게 제법 긴 시간 동안 얽혀있었다.
“...좋아요.”
거절할 것 같았던 상대에게선 의외로 긍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은근히 긴장했던 모양인지 여자의 대꾸가 나오자, 해이의 막힌 숨이 작게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302호로 함께 들어갔다. 옆집 사람의 거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마치 불건전한 무언가를 행하기 전처럼 배덕감이 몰려들어서 해이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가 괜스레 집 안을 둘러보며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옆집 여자는 그사이 주전자에 우유를 데웠다. 데운 우유를 잔 두 개에 나눠서 따른 뒤 그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학생 맞은편에 앉으며 컵 하나를 내밀자, 그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난 버려진 고양이가 아닌데요?’라고 말을 하려다가 문득 302호 문을 처음 두드렸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에 미세하게 맡았던 우유 냄새를. 아마도 우유를 좋아하는 여자인 듯했다.
그렇다곤 해도 한여름에 데운 우유라니. 특이하네.
“우유를 좋아하세요?”
“......그런가 봐요.”
질문을 통해서 제 취향을 안 사람처럼 재이의 대답은 매우 느리게 나왔다.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가 다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옆집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간의 음울하고 냉랭했던 여자의 태도를 생각하면 놀랄만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게 뭐예요?”
“...좋아하는 거?”
살면서 처음 듣는 질문인 듯 재이의 입에서 이렇다 할 대답이 내뱉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운동장을 가로질러 중앙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3학년 반이 있는 2층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랑의 할머니가 보였다. 아이는 제 할머니를 목청껏 불렀고, 할머니는 그런 손녀를 매우 부끄러워하며 검지를 재빨리 제 입술 위에 얹었다.제발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저것이 목청만 커서는. 아이고 선생님, 여기까지 죄송해요.”“아니에요. 저도 이제 막 퇴근하던 차여서 같이 나왔어요.”제 손녀가 선생님 곁에 꼭 붙어있으니, 괜스레 죄송스러워서 얼른 아이를 건네받으려고 했지만, 이랑이 그것을 눈치채곤 할머니 손을 피해 좀 더 선생님 품을 파고들었다. 때마침 친구들과 계단을 내려오는 이랑의 오빠, 이현이 보였다. 아이는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내려오다가 할머니와 제 동생을 발견하곤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할머니, 안 데리러 와도 된다고 했잖아!”“이놈이. 너 혼자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와? 할머니랑 버스 타고 가야지.”“아, 오늘은 이혁이네서 논다고 오지 말랬잖아.”왁자지껄 이어지던 아이들의 대화는 이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인해 어색하게 끊겼다. 남매의 할머니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재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이현에게 다정히 웃으며 물었다.“이현이, 친구네서 놀다가 집에 혼자 찾아올 수 있어? 다 컸네.”“그럼요! 저 길 잘 알아요!”우쭐거리듯 턱을 치
남잔 제 아내가 자신의 약점을 틀어쥐고 저를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동안에도 희망의 회로를 멈추지 않았다. 겉으론 저렇게 자신을 향한 복수심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제 남편을 불구덩이 속으로 내몰진 않을 거라고.고작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낸 학생과 나눈 애틋한 사랑이, 자신과 함께한 긴 세월의 결혼 생활과 대적할 만큼의 애정은 아닐 거라고. 끝내는 자신을 저버리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그런 자만을 했었다. 아내를 향한 자신의 애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그렇지만 이제야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았으니까.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자신에게 있는 단 하나의 가족. 자신의 가정. 그 중심엔 늘 그녀 혼자 덜렁, 서 있었다. 그 공간 안에 재이 외엔 그 누구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둘만의 가정을 지켜나가고 있었거늘.근데, 그래왔는데 발칙하게도 아내는 자신을 찌르고 도망이나 가고, 종국엔 머저리 대학생과 사랑에 빠져 저를 내버릴 시도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치졸하고 야만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남자는 이미 저의 치명적인 잘못을 알고 있었다. 시작점부터가 어긋나 버렸음을. 그리도 소중한 존재를 저 스스로 망가뜨리고 회복할 기회마저 놓쳐버렸다는 걸.‘내가 나락으로 가는 게 너의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드려야지. 그간 내 아내로 살아준 답례로.’“당신이 원하는 이혼 서류는 서재 책상 2번째 서랍 안에 있어.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알 테고.”남자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자기 아내를 제법 시간을 들여
전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재이는 모처럼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남잔 재이의 작별을 마치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어영부영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회사로 발길을 돌렸고, 늦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이른 아침.그녀는 말끔하게 씻은 후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러자 DR 제약회사의 비리에 관한 속보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국내에서 오랜 기간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며 선행 기업으로 불려 온 DR 제약회사가 후원 보육원 아동들을 대상으로 불법 약물 실험을 했다는 의혹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사실 이 의혹은 과거에도 몇 차례 제기됐지만, 당시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됐습니다. 그런데 오늘 익명의 제보자가 새로운 증거가 담긴 USB를 언론사에 보내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사회부 기자 연결합니다.”앵커의 마무리 말에 화면은 사회부 기자로 연결됐다.“오늘 오전, 사회부 이한혁 기자 앞으로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택배 한 개가 도착했습니다. 봉투 안에는 USB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몇 주 전에도 다른 익명의 제보자가 위와 같이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했고, 제보자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아 수사와 언론 보도 모두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사건은 사실상 종결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전달된 USB에는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가 담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내부 연구보고서와 약물 투여 기록, 실험 대상 명단과 실험으로 인한 사망자 명단은 물론, 사건 은폐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청장과 DR 제약회사 이사회 관계자들의 명단 및 내부 연락 기록으로 보이는 자료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습니
“처음엔 당신의 후원이 날 안도하게 했기 때문일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호의였어요. 날 좋은 감정으로 바라본 유일한 사람.”천천히 곱씹듯이 이어지던 재이의 말이 점점 힘을 잃어갔다. 무언가 좌절한 사람처럼 표정마저 어두워진 그녀의 낯에 남자의 얼굴도 생기가 사라져갔다.“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하면서 난, 늘 당신을 생각했어요. 종종 날 만나러 와주는 당신을 기다리기도 했죠.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서도 만남이 지속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언젠가 당신이 내게 베풀어준 온정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면서.”남자는 귀를 기울였다.아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다.“그러던 중에 당신이 내게 청혼했어요. 나는 당연하게도 그러겠다고 답했고요. 당신에게 내가 가당키나 할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 무척이나 소중했어요”“나한테도 그래. 넌, 내게 단 하나뿐인 가족이야. 나한테 가족은 너뿐이야. 그래서 아이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고. 그런데 네가 자꾸 아기, 아기 노래를 부르니….”네가 나 외에 자꾸 다른 가족을 만들려고 하니까 심통이 나서 그런 행동을 했던 거라고.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되려 그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고작 그런 치졸한 질투심 때문이었다니.“왜 그랬어요?” 
그 뒤 재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주변을 살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해이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잊고 있었던 도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야, 무슨 일이야?”걱정스러운 음성의 친구를 잠시 그렇게 방치했다. 아무런 대꾸도 없으니 전화 건너에서 이내 답답함에 심통이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정신 차려! 뭔데 그래?”“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짙은 한숨과 함께 도원이 저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전화를 끊었다. 해이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다시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골목을 지나치던 사람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힐끗거렸다.다 큰 남자가 길에 서서 울고 있으니, 초면인데도 제가 다 멋쩍어졌다. 무슨 일이기에 저리도 서글프게 우는지, 얼굴이 온통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다. 그런데도 저는 지가 우는지도 모르는지 표정이 묘하게도 넋이 나가 있다.그러다 곧,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혹여 남자가 민망해할까 봐 자연스럽게 지나치긴 했지만, 뒤에서 줄곧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니, 행인은 손수건이라도 챙겨줄까 싶었다.그는 같은 남자로서 눈물이라도 닦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뻘쭘하게 울고 있는 학생 곁에 섰다. 제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건네자,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꾸벅
나란히 앉아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우습게도 똑바로 마주한 아내의 시선 한 자락에 마음이 동했다.“...내가 그간의 일을 사과한다면 풀어질 마음인가?”그를 알고 지낸 13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이토록이나 후회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럼에도 갈등하기에 아내를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제 곁에 붙여놓고 싶어 하는, 매우 설명하기 벅찬 감정이었다.한동안 대답이 없는 아내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게도 먹먹한 고통이 뒤따랐다.“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재이는 그를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 바라봤다. 먼저 시선을 내린 쪽은 그였다. 남잔, 아내의 새까만 동공에서 치욕을 경험하는 자신이 아닌, 모든 걸 잃어버리고 남루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늦어도 어쩔 수 없어.”믿을 수 없게도 내가 널, 놔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붙들고 있을 생각이거든.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하듯 읊조리던 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재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약을 발라준 목 부위가 따끔거렸다.‘이걸 어디에 보관해 둬야 할까.’재이는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USB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서재에서 발견한 자료를 USB에 옮겨 담았다. 어디에 숨겨놓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남편이 굳이 자신의 물건을 뒤질 일은 없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