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순식간에 이사장실 내부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백재연은 비릿하게 웃으며 건너편에 앉아 있는 태건을 바라봤다.
“강 본부장이 이렇게 예의가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백재연의 말에 태건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굳이 번거롭게 비서를 통해서 따로 약속을 잡아야 하나 싶어서요. 그게 더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수상해 보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보네.”백재연의 말에 태건은 말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아 있던 그가 시선을 올려 백재연의 뒤에 있는 남 비서를 바라봤다. 그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까부터 굳은 얼굴에 아니꼬운 눈으로 태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글쎄요. 저는 그저 사위 노릇 한 번 제대로 하려고 온 건데요.”태건의 말에 백재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기엔 너무 빈손인데.”
백재연의 말에 태건은 시선을 내려 자기 손바닥을 바라봤다.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손바닥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미소 지으며 다시 백재연을 바라봤다.
“과일 바구니 같은 거라도 들고 올 걸 그랬나요?”
“그러면 확실하게 수상해 보였겠지.”백재연이 한쪽 팔을 세워 턱을 괴며 말했다.
“반대로 나는 좋아했을 거고.”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태건은 그녀를 따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겉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여유롭지는 못했다.
확실히 백재연은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완벽하게 자신의 속내를 감췄다. 아니, 감추다 못해 아예 없앴다. 감추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백재연은 자신의 속마음을 읽으려고 애쓰는 태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단둘이 대면한 적은 처음이었다. 사전 연락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이기에 조금은 기대했다만, 기대가 무색하게 태건은 아직 애송이였다. 다른 이들에겐 ‘소문의 그 강태건’일지 모르겠지만, 백재연에게는 급이 맞지 않았다.
“사위 노릇은 다음에 제대로 하는 게 어때? 오늘은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턱을 괴던 팔을 빼며 그녀가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온 정확한 용건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무례를 눈감아주며 상대할 마음이 없어졌다.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태건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제부터 제대로 좀 해보려고요.”
순간 멈칫한 그녀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자신감의 미소가 그려졌다.
언짢은 자신감에 백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앞으로 뭘 한다는 걸까?”
“글쎄요. 안 그래도 제가 요 며칠 동안 공부를 좀 했거든요. 처가댁에 사랑받는 방법을 좀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어르신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손주더라고요?” “…… 뭐?”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천천히 일직선을 그렸다.
백재연은 순간적으로 재빠르게 표정을 고쳤지만, 태건은 찰나의 순간 굳어졌던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뒤에 있던 남 비서도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이사장실 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저울이 조금씩 태건 쪽으로 기울기 직전이었다.
“손주라……. 갑작스러운 말이네.”
“그런가요? 보통은 좋아하시던데.” “그건 보통의 경우고. 강 본부장이랑 우리 채원이 사이를 보통의 부부라고 부를 순 없으니까?”자세를 고쳐 앉은 백재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단시간 내 여유를 되찾은 모습에 태건은 조용히 손깍지를 꼈다. 한 방 먹이긴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보통은 아니었다.
굳은 얼굴로 미소 짓는 얼굴을 바라보던 태건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아무래도 앞으로 제가 더 많이 노력해야겠네요.”
“혼인신고 했으면 이미 부부고, 사위인데. 무슨 노력이 필요할까?” “이왕이면 서류상 사위 말고 진짜 사위가 되면 좋으니까요.”태건의 말에 백재연은 말없이 피식 미소만 지었다.
태건도 그녀를 따라 작게 미소 짓다가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까부터 저를 너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네요.”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백재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몸인데, 얼른 가봐야지. 여기서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종종 오겠습니다.”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 비서는 마치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와 뭐든지 뚫어버리는 창의 대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 태건이 몸을 돌렸다.
백재연은 미소를 유지하며 방을 나서려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녀의 눈은 사냥감이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포식자의 눈과 닮았었다.
문 앞에 선 태건의 손이 손잡이를 쥐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내려가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태건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참.”
“……?” “가장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네요.”문을 열다 말고 멈춘 그가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끼고 미소를 유지한 백재연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여유를 잃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며, 태건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채원이, 당분간 연락 안 되니까 그만하셔도 됩니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순간의 당황은 표정 유지도, 순간적인 변화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얼굴을 보며 반대로 태건의 입꼬리는 더 부드럽게 올라갔다.
“제가 부셨거든요.”
“…….” “그리고 다음에는 커피 부탁드리겠습니다.”그대로 굳어버린 백재연을 보며 싱긋 눈웃음까지 날리고 난 뒤,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 그가 문을 열고 이사장실을 나갔다.
열렸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당황한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남 비서가 뒤늦게 백재연을 살폈다.
“…… 이사장님.”
웃음을 잃은 굳은 얼굴의 백재연을 보며 남 비서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백재연은 말이 없었다.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말없이 태건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강태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가 이를 바득 갈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팔뚝이 패일 정도로 손가락에 꽉 힘을 주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남 비서.”
“…… 네, 이사장님.”잔뜩 구겨진 미간을 보던 남 비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윤채원 데리고 와. 연락하든, 사람 붙이든, 어떻게든!”
귀가 찢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사장실에 울려 퍼졌다.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백재연의 모습을 보는 건, 가히 17년 만이었다.
* * * 오른쪽으로 한 번, 위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다시 위로 한 번, 그다음 오른쪽으로 한 번.마치 인간 시계가 된 것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건조해지는 느낌에 채원은 빠르게 포기하고 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어디서 눈에 좋은 운동이라고 봤던 것 같은데 잘못 봤던 걸까. 뻐근해진 두 눈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다 슬쩍 손을 떼고 벽시계를 확인했다.
분명 혼자서 꽤 많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곗바늘은 겨우 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뱉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있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켜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 가벼운 벽돌이 되고 말았다.
무료한 얼굴로 핸드폰을 연신 툭툭 두드리던 그녀가 다시 습관처럼 벽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겨우 1분이 지나 2시 16분이었다.
이 넓은 집에, 조용한 집에 혼자 있는 채원은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오전에 방문했던 가정부는 집안일을 말끔하게 해치우고 오후 반차라며 빠르게 퇴근했고, TV를 봐도 소음만 채워질 뿐 무료하긴 마찬가지였다.
핸드폰도 먹통이 되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그녀가 무료함에 한숨을 터트렸다.
“대체 강태건은…….”
혼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태건이 괜히 미워졌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전날 아침이었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분명히 식탁 위에 올려놨다고 생각한 핸드폰이 사라졌다. 방에서 아예 안 들고 온 건가 싶어서 다시 방까지 갔다 왔지만 그 어디에도 채원의 핸드폰은 없었다.가정부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그 누구도 건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곳저곳 찾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 태건이 나타났다.
“뭐 해?”
이제 막 나서려는 듯 정장 차림을 한 그가 채원을 보며 물었다.
가족 모임이 있고 나서 채원은 태건이 조금 불편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일부러 태건이 출근했을 시간에 맞춰 방에서 나온 거였는데,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은 몰랐다.
당황한 채원이 한 발짝 뒷걸음질을 치며 태건과 거리를 유지했다.
“아……. 아직 출근 안 했네요.”
“응. 근데 뭐 찾아?”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던 채원이 태건의 물음에 그를 바라봤다.
물어본다고 그가 알까, 평소처럼 ‘몰라’ 이 짧은 말만 남기고 쌩 가버리지 않을까.
고민하는 듯한 얼굴에 태건이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뭐 찾아?”
그의 물음에 채원은 결국 작게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 핸드폰이요. 아까 식탁에 놔뒀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출근 준비하는 사람이 핸드폰의 행방을 알 리가.
말하면서도 채원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른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출근하고 집을 나서길 바랄 뿐이었다.
그때 태건이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핸드폰.”
“…… 봤어요?”태건의 반응에 채원이 혹시,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태건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대답에 채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어? 어디서요?”
채원의 물음에 태건이 조용히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곧이어 그토록 찾아다니던 채원의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의 핸드폰에 반가움도 잠시. 대체 이게 왜 거기서 나와? 채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기 시작했다.
“근데 왜…….”
“미안.”왜 네가 가지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태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5년 만에 들어보는 낯선 단어에 할 말을 잃은 채원이 두 눈만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단어 자체도 낯설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치고 태건의 표정은 너무도 평온했다. 아니,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단어에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태건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망가뜨렸어.”
“…… 뭐?”채원은 이때 알았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의지와 상관없이 반말이 툭 튀어나온다는 걸.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