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By:  유소휘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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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외모, 우수한 성적, 훌륭한 인품.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윤채원은 완벽한 인형 같은 여자였다. 그리고 오늘 밤, 완벽한 윤채원의 결혼 생활도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혼해요.” “누구 마음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취급하던 남편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그럴 계획이었다. 모든 게 다 완벽한 계획대로 사는 여자, 윤채원과 그런 그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남자, 강태건. 두 사람이 그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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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이혼해요

달리는 차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엔진 소리만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조수석에 앉아 태블릿을 확인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비게이션을 확인한 그가 백미러로 시선을 올렸다.

“곧 도착합니다.”

남자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뒷자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볼 필요도 없었다. 

이 관계에 개인적인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공통점을 찾아가는 일 따윈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가 작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지금은 상관없는데, 이따 기자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하셔야 합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서로 반대쪽만 바라본 채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작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에, 재벌들이란. 역시 돈 많은 것들은 상종을 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 * *

잠시 후 차가 속도를 줄이고 웨딩홀 앞에 멈춰 섰다.

“내리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뒷자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먼저 내렸다.

강태건. 대건 그룹의 장남이자 핵심 부서인 전략기획실의 본부장.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플래시에도 태건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치 오늘이 아무것도 아닌 날처럼, 그는 덤덤하게 보타이를 고쳐 잡았다.

“안 내려?”

먼저 내린 그가 뒤를 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앉아 있던 여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태건이 내렸을 때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

대건 그룹의 강태건이 파혼 후 곧바로 선택한 여자, 윤채원. 

대중 앞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사실상 이 결혼의 주인공은 태건 보다 그가 선택한 여자, 채원이 더 가까웠다.

“저 여자야? 그 소문의 정인 재단 딸?”

“맞지 않을까? 나도 몰라. 공식 석상에 나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잖아.”

터지는 플래시 소리 사이에서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기자들 모두 차에서 같이 내린 여자가 강태건의 신부가 될 윤채원이 맞는지에 대해 확인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관심과 의문 속에서 채원은 돌처럼 가만히 굳은 채 서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지도, 그렇다고 여유롭게 카메라를 바라볼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그야말로 백지가 된 기분이었다.

터지는 플래시 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이 점점 커지고 주변의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리던 그때였다.

“윤채원.”

앞서 내렸던 태건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채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만일 이 모습 그대로 식장에 들어간다면 이건 세기의 결혼식이 아니라 세기말의 결혼식이라고 오해받기 딱 좋았다.

태건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 보며 두 사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차에서 장 비서가 한 말 잊었어? 표정 관리 제대로 해야 한다니까.”

태건의 물음에 채원은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기억해요.”

“그럼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네 데뷔일인데. 이러고 있으면 기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들 네가 윤채원이 맞긴 한 건지 의문인 거 같은데.”

태건의 말에 채원은 고개를 돌려 기자들을 바라봤다.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수많은 카메라와 눈들이 번쩍거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한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태건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으면 말해. 두 번 파혼하는 것도 어렵진 않으니까.”

태건의 말에 채원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파혼이라니. 그건 그녀의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무조건 이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 그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결심한 듯 고른 숨을 내뱉은 그녀가 천천히 태건의 팔에 팔짱을 둘렀다.

“그럴 리가요.”

그녀가 태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울 앞에 홀로 서서 수천 번은 더 연습한 미소도 잊지 않았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에 수십 개의 플래시가 이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태건은 자신의 팔에 둘러진 채원의 손을 한 번, 그리고 채원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곤 말없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식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수십 명, 수백 명의 관심 속에서 강태건과 윤채원의 결혼식이 시작됐다.

모든 게 다 그녀의 계획 대로였다.

* * *

5년 후.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있던 채원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봤다.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강태건은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습관적으로 손톱 밑 여린 살을 뜯던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실수 없도록 잘 마무리해.]

간결하고 단호한 메시지였다.

채원은 잠시동안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숨을 들이켰다.

[네.]

무미건조한 답변에 아마 혀를 끌끌 차겠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좋은 답변은 없었다.

작게 숨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덮은 그녀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이 넓은 집에서 그를 이렇게 기다린 건 5년 전 결혼식이 있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홀로 식탁 앞에 앉아 애꿎은 시계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제 모습을 상상하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아마 명백한 비웃음이겠지.

띠띠띠-.

그때 도어락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울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빼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이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초조할 필요 없다. 윤채원은 강태건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 계획은 실패할 수가 없다.

때마침 피곤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던 태건이 채원을 바라봤다.

멈칫, 발걸음을 멈춘 그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 안 자고 있었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처럼 높낮이는 없었고 덤덤했지만 조금 피곤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채원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태건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건너편에 있는 빈자리를 바라봤다.

“앉아야 하는 건가?”

또 다시 끄덕, 하고 고개가 움직였다.

태건은 잠깐 빈자리를 바라보다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으며 피곤한 숨을 내뱉은 그가 고개를 들어 채원을 바라봤다.

“이 시간에 아직 안 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정확해요.”

마치 칭찬하는 것 같은 착각에 태건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을 뻔했다.

“말해봐. 할 말이 뭔지.”

태건이 피곤한 눈으로 채원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채원은 아주 잠시 짧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말고 내일 아침쯤에 다시 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짧은 고민은 짧은 고민에 불과했다. 계획에 어긋나는 일은 지금까지 있지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됐다.

“이혼해요.”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나왔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연습한 문장처럼, 채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망설임도 없었고 담백했다.

“필요한 서류는 다 준비 해놨어요.”

건너편에 있던 태건이 시선을 들었다.

“이유는?”

“결혼한 지 벌써 5년이 지났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

“아이도 없으니까, 어른들도 납득하실 거예요.”

이 정도면 됐다. 태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고, 이제 문제없이 이혼 서류만 제출하면 끝이다.

채원은 속으로 삼켰던 숨을 내뱉으며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들었던 대답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겨우 생각한 이유가 그거야?”

순간 물컵을 들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변수였다.

“이혼? 누구 마음대로.”

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라……. 그러면 아이부터 있으면 되겠네.”

“그게 무슨…….”

너무 당황한 탓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체 태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윤채원은 강태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강태건이 변수로 변해버린 것일까?

“뭐, 어떡해.”

“…….”

숨결이 느껴질 만큼 좁혀진 거리에 채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함부로 입을 열면 심장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차가운 눈으로 채원을 내려다보던 태건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차가운 말투와 다르게 뺨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은 따뜻했다. 그 대비감에 채원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한번 노력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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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혼해요
달리는 차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엔진 소리만 일정하게 울리고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얼마나 달렸을까, 조수석에 앉아 태블릿을 확인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비게이션을 확인한 그가 백미러로 시선을 올렸다.“곧 도착합니다.”남자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뒷자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볼 필요도 없었다. 이 관계에 개인적인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공통점을 찾아가는 일 따윈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남자가 작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지금은 상관없는데, 이따 기자들 앞에서는 표정 관리하셔야 합니다.”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서로 반대쪽만 바라본 채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그들을 바라보던 남자는 작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에, 재벌들이란. 역시 돈 많은 것들은 상종을 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 * * 잠시 후 차가 속도를 줄이고 웨딩홀 앞에 멈춰 섰다.“내리시죠.”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뒷자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먼저 내렸다.강태건. 대건 그룹의 장남이자 핵심 부서인 전략기획실의 본부장.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플래시에도 태건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마치 오늘이 아무것도 아닌 날처럼, 그는 덤덤하게 보타이를 고쳐 잡았다.“안 내려?”먼저 내린 그가 뒤를 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앉아 있던 여자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태건이 내렸을 때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대건 그룹의 강태건이 파혼 후 곧바로 선택한 여자, 윤채원. 대중 앞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사실상 이 결혼의 주인공은 태건 보다 그가 선택한 여자, 채원이 더 가까웠다.“저 여자야? 그 소문의 정인 재단 딸?” “맞지 않을까? 나도 몰라. 공식 석상에 나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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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발표
대건 그룹의 자선 행사 파티가 있던 날.채원은 발코니에 홀로 서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팔을 두른 채 몸을 살짝 웅크린 그녀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팔을 쓱쓱 문질렀다.이렇게 오래 서 있을 줄 알았으면 위에 걸칠 재킷이라도 하나 챙겨 올 걸 그랬다. 갑자기 뚝 떨어진 밤 기온은 얼어 죽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깨닫게 했다.그래도 움직일 순 없었다. 오늘, 이 시간, 여기서 윤채원은 강태건을 만나야 한다.남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발코니. 행사장과 가까운 것도 아니라 강태건이 몰래 쉬고 싶을 때 자주 이용한다는 곳이었다.그래도 대체 언제까지 있어야 하나 싶던 찰나였다. 등 뒤로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안으로 들어오려던 발이 멈칫하더니 짧은 탄식이 들렸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채원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어느새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고개를 돌리자, 발코니 문 근처에서 멈춰 있는 태건의 모습이 보였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주변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죄송합니다. 먼저 오신 분이 있는 줄 몰랐네요.”침묵을 먼저 깬 건 태건이었다.태건의 말에 채원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세요.”그러면서 그녀는 발을 옮겨 그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태건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문을 닫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남녀가 나란히 섰다.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을 실은 바람이 지나갔다.“…… 킁.”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태건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빨개진 콧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손등도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누구 기다리십니까?”시선을 올린 태건이 채원을 보며 물었다. 누군가와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게 아닌 이상, 홀로 추위를 감내하며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태건의 물음에 채원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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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족 모임(1)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화장대 앞에서 화장하던 채원의 손이 문득 멈췄다. 가만히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목덜미를 확인했다.목덜미에 찍힌 옅은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하진 않지만, 아예 안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화장품으로 최대한 가린다고 노력은 했지만, 아예 없는 것처럼 만들긴 쉽지 않았다.자국을 손으로 매만지던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전날 밤, 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냈던 그 순간.“이혼? 누구 마음대로.”낮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하며 다가온 태건은 순식간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차가운 시선과 대비되는 따뜻한 체온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뭐, 어떡해. 지금부터 한번 노력해볼래?”대체 무엇을 노력하자는 건지 되묻기도 전에 태건이 한발 빨랐다. 마치 대답은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채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순간 느껴지는 촉감과 온도에 채원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 다급하게 손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중을 더 실은 탓에 채원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 하자, 태건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엉겨 붙은 몸이 떨어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태건이 이를 세워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었다.“아……!”비명인지 교성인지 모를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순간 채원과 태건의 몸이 동시에 움찔거렸다.지분거리던 입술은 곧바로 떨어졌지만, 채원은 여전히 태건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채원은 아주 작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이후 태건이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어색한 침묵 속에서 채원은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감쌌다. 아직도 그의 입술의 촉감과 숨결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태건은 말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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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가족 모임(2)
호화스러운 화려한 주택 안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낡고 어두운 방 하나가 있었다. 아마 처음 집을 지었을 땐 작은 창고쯤으로 생각하고 만든 방이었겠지만, 그 시작이 무엇이었든 낡은 방은 한 아이의 거처였다.마치 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모두가 아이를 보며 ‘볼품없는 것’이라고 불렀다. 어쩌다 한 번 눈에 띄면 꼭 그렇게 불렀고, 아이가 없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불렀다.그렇기에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둡고 좁은 그곳은 볼품없는 아이에게 가장 적합하고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저택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아이마저도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어둡고 좁은 배경이 화려하게 바뀐 이후로도, 수많은 옷가지와 장신구 속에서도 아이는 여전히 볼품없는 존재였다. 신데렐라가 아무리 마법으로 호박 마차를 타고 화려한 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신어도, 그 내면은 누더기를 입은 신데렐라인 것처럼.윤채원이라는 이름으로 제아무리 잘난 옷을 입고 완벽한 인형 행세를 해도, 아이는 여전히 볼품없는 존재였다.‘아직도 이 짓거리를 계속하고 싶어?’좁은 방 안에 갇혀 있던 아이가 물었다.채원은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다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분명히 다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런 잡생각이 나오는 걸 보니 자신도 모르게 흔들린 모양이었다.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들리면 안 된다. 쓸데없는 의심도, 의문도, 망상도, 감정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거리였는지는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너는 그냥 거기 평생 있어.”너는 여기가 제일 잘 어울려.그렇게 말하며 채원은 문을 닫았다. 쓸데없는 생각이 다시는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김 기사의 목소리에 채원이 눈을 떴다.창문 너머로 드높은 담장과 굳게 닫힌 대문이 보였다. 사람 키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검은 철문은 대문이라기보단 성문에 가까웠다.차가 대문 앞에 멈추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잠시 기다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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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다이닝룸은 식사보단 연회장에 가까운 공간이었다.열 명이 앉아도 남을 정도로 긴 원목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는 잘 관리된 연못이 한눈에 보였다.아직 식사 준비가 다 끝나지 않은 탓에 테이블 위엔 개인 식기만 놓여있었다.가만히 테이블을 바라보던 채원은 천천히 통유리 쪽을 향해 걸어갔다.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기도 뭐하고, 유리창 너머 정원이나 구경하며 시간을 좀 때울 생각이었다.대건그룹의 저택은 아주 사소한 인테리어조차 화려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유일하게 선대 회장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 정원이었다.물론 화단이며 연못이며 없는 건 없었지만, 그래도 저택에 비하면 정원은 꽤 수수한 편이었고 그만큼 고요하고 조용한 곳이었다.처음 채원이 이 저택에 왔을 땐 이 드넓은 정원이 주택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언제 봐도 참 아름답죠?”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창밖을 바라보던 채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안녕하세요, 도련님.”채원의 인사에 맞춰 뒤에 있던 지훈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두 사람의 인사에 유건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에이, 두 분 다 볼 때마다 뭘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해요. 그냥 편하게 대하셔도 되는데.”유건의 말에 채원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느 상황에서나 말을 아끼는 게 좋지만, 특히나 유건의 앞에서는 더더욱 말을 아껴야 했다.공식적으로는 대건그룹의 둘째 아들 강유건. 하지만 실제론 선대 회장이 내연녀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좋든 싫든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강태건과 강유건은 형제이기 앞서 라이벌이었다.유건이 사생아라는 것이 폭로된 이후에도 회장 부부는 태건과 유건을 차별하지 않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태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유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유건은 존경하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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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선수(先手)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갔다.하나같이 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에 유건은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며 입맛을 다셨다. 신 여사는 그런 그의 옆에서 흐뭇해하며 웃었고, 채원은 별다른 말 없이 테이블 위만 바라봤다.태건과 강 회장은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마쳐졌을 때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채원이는 아까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너는 애를 혼자 두고 이제 오면 어떡하니?”준비가 다 끝나고 나서야 나타난 태건을 보며 신 여사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회사 일 때문에 할 얘기가 좀 있었어.”강 회장이 대신 나서 반론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당신도 똑같아요. 회사 일은 회사에서 얘기하면 되지, 뭣 하러 오늘 같은 날 애를 따로 불러요? 기다리는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고.”반박 한 번 했다가 도리어 더 화를 부르고 말았다.태건보다 자신을 향한 더 살벌한 눈빛에 강 회장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착석했다.“하하하! 아버지가 잘못 하셨네요.”유건은 그런 그를 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함께 나무랐다. 이렇게만 보면 화목한 가족 식사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함께 앉아 있는 태건과 채원의 얼굴엔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큼……. 음식 식겠다. 얼른 먹자.”민망함에 헛기침하던 강 회장의 말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식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다이닝룸 안에 울려 퍼졌다. 식사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사소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음식은 입에 맞는지, 오늘따라 더 맛이 좋다, 최근에 어딜 갔는데 거기가 너무 좋았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별거 아닌 사소한 대화였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대화도 아니었다. 대화는 주로 신 여사와 유건이 주고받았고, 채원은 이따금 가벼운 호응 정도만 했으며 태건과 강 회장은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식사가 이어지던 중이었다.“아, 참. 저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유건이 싱긋 웃으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 여사는 뭔데 그러냐며 고개를 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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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협박
조용했던 다이닝룸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저, 정말이냐? 정말로 임신했어?”“어머, 어떡해……. 나 눈물 날 것 같아.”“언제부터냐? 아니, 아니지. 얼마나 된 거야?”“왜 말을 안 했어!”강 회장과 신 여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채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얼마나 흥분한 건지 테이블을 넘어올 기세였다.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에 태건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길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처럼 보는 표정이었다.“그러다가 아예 위로 넘어오시겠네요.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으신 건지.”“넌 빠져라.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비아냥거리듯 말하는 태건에 강 회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임신 소식을 알린 건 태건이었는데, 강 회장은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서로 불꽃이 튀는 부자 사이에서, 채원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시 생각했다.‘채원이가 임신했어요.’꽤 담담하던 태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임신. 누가? 윤채원이? 내가?채원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배를 내려다봤다. 당연히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있을 리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결혼 후 5년 동안, 아니, 첫날부터 서로 각방을 썼던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임신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혹시나 강태건이 숨겨둔 내연녀가 임신했다면 모를까.“채원아?”그때 강 회장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아들인 태건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동시에 옆에서 태건이 작게 헛웃음을 짓는 소리도 들렸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원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왜 그러냐?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야?”강 회장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신 여사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어머! 어떡해? 병원이라도 갈까? 차 부를까?”두 사람의 말에 채원이 식겁하며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아, 아뇨! 괜찮아요!”병원이라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내뱉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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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이유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도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차가 많진 않았지만, 자칫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차선을 바꿔 사고를 면한 뒤차는 경고와 분노가 담긴 클락션을 계속해서 울려댔다. 어떤 차는 창문을 내리고 운전석을 향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얼마나 살벌한지 혹시나 싸움이라도 발생하는 건 아닐까, 채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그러나 그녀와 다르게 옆자리에 있는 태건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급정거할 때 앞으로 쏠리면서 구겨진 옷 주름을 펴고 있었다.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럴 수가 있나 한편으론 경이로운 수준이었다.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죠?”그가 태건이 아닌 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임신이라는 말도 웃기는데, 뭐? 이혼?틀림없이 제 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굳게 다물린 채원의 입술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어떻게 말해야 하나, 눈치만 보는 그녀의 옆에 있던 태건이 픽 웃으며 말했다.“왜 말을 못 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줄 알겠네.”비아냥거리는 그의 말투에 채원의 눈이 매섭게 그를 쏘아봤다.제 딴엔 매섭게 쏘아봤다고 생각했지만, 태건의 눈엔 그저 작은 새끼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운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사모님.”그때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얼렁뚱땅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진 않겠다는 눈빛이었다.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에, 어쩌면 그 이상의 사이에 어떠한 일이 오갔던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비를 하거나 수습을 할 수 있었다.침착하면서도 묵직한 한마디에 채원은 다시 꼬리를 내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남편은 저인데, 외간 남자 앞에서 눈치만 보면서 할 말도 못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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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소문
주말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의 대건 그룹은 평소보다 더 시끄러워졌다.블라인드에서도, 로비에서도 보이는 얼굴마다 서로 소문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놨는데 또 어디서 소문이 샌 건지.태건의 비서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긋하게 걸어본 적 없던 지훈은, 오늘도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미간을 찌푸렸다.“본부장님 아기 생겼다는 게 사실이에요?”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머릿속에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던 순간 옆에 있던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인사는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낯선 남자였다. 사실상 일면식도 없는 인간인데,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성격인가 보다.아침부터 귀찮게. 지훈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형식상 쓰는 안경을 고쳐 올렸다.“글쎄요. 제가 본부장님 사생활까지 간섭하진 않아서.”“장 비서님이 본부장님 사생활도 관리하지 않아요?”꽤 예리한 질문에 지훈은 가볍게 그를 노려봤다.그의 말이 맞긴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직원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대체 이 직원들이 그런 걸 알아서 뭐에 써먹는지 의문도 들었다.다들 주식이라도 하나씩 사뒀나?“아무리 비서여도 선이라는 게 있죠. 본부장님은 어디 가서 본인 얘기하고 다니는 걸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거 신경 쓰실 시간에 본인 업무나 챙기시는 게 더 나을 듯싶네요.”지훈은 냉정하게 답하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남자는 구석에 자리 잡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깟 거, 국가기밀 사항도 아니고 알려준다고 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유난 떨 건 또 뭐란 말인가.누가 강태건 본부장 비서 아니랄까 봐, 성격까지 빼다 박았다. 어디서 저런 똑같은 인간을 구해서 비서로 쓰고 있는 건지.뒤에서 느껴지는 눈총과 작게 들리는 볼멘소리가 은근히 지훈의 신경을 긁었다.다 들린다고 경고라도 날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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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대면
정인 재단 최상층, 이사장실.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탁 트인 통유리창이었다. 환한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창밖으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펼쳐졌다.깔끔함을 선호하는 방 주인의 취향에 맞춰 짙은 월넛 색상의 책장과 검은 대리석 바닥, 낮은 채도의 회색 벽이 공간을 채웠다. 벽 한쪽에는 국내외 대학과 기간에서 수여한 감사패와 공로패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정인 재단이 후원한 장학생들의 단체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 뒤로 ‘미래를 밝히는 올바른 인재 육성’이라는 정인 재단의 슬로건이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그러나 정작 이사장 명패가 빛나는 책상 위에는 그 어떤 따뜻함도 없었다.넓은 원목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만년필, 일정표가 놓여있었고, 한쪽에 자리 잡은 서류들은 단 한 장도 흐트러짐 없이 정렬되어 있었다.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백재연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들을 하나씩 확인했다.그녀의 손이 마지막 장을 다 넘겼을 때,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짧은 한마디가 울리고, 곧이어 보고서와 태블릿 PC를 손에 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그가 곧바로 책상 앞으로 다가와 보고서를 건넸다.“이번 장학생 후보 명단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의대생 비율은 2퍼센트 더 올려서 잡았습니다.”“거기 올려놔.”시선은 떼지 않은 채 그녀가 가볍게 턱짓하며 말했다.남 비서는 개의치 않은 듯 쌓여있는 서류 뭉치 위로 보고서를 올린 뒤 반듯하게 각을 맞췄다.익숙하게 보고서를 올린 그가 이번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태블릿 PC를 꺼냈다.“지난번 보고드렸던 작가 미팅은 수월하게 진행되어서, 이번 작품도 저희 미술관에서 독점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전시회는 4월 오픈 목표로 잡아놨고, VIP 대상으로 사전 오픈 진행할 예정입니다. 현재 홍보팀 통해서 언론 보도 일정 잡아 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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