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
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 네, 알겠습니다.” “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
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
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
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
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
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혼자 방에 갇혀 겁을 먹은 그녀가 괜찮은지 살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그녀의 방에 밥을 가져다 놓기 위해 올라온 직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나서야 채원은 그동안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유연이 쓰러졌다고 했다.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이름조차 제대로 붙일 수 없는 희귀병이라는 것뿐이었다.
백재연은 매일 같이 사람을 불러 유연의 상태를 살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채원은 유연이 걱정됐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혼자 조용히 방에 있는데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누군가가 또 집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여러 명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채원은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연 건 백재연과 남 비서였다.
백재연은 인사도, 설명도 없었다. 차가운 눈으로 채원을 바라보더니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일어나.”
채원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재연은 채원의 턱을 움켜쥐었다. 얼굴을 왼쪽으로 돌렸다가 오른쪽으로 돌리고, 머리카락을 들춰 이마와 귀 뒤를 살폈다. 그다음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채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헐렁한 옷,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 마르고 굽은 어깨.
백재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키가 몇이지?”
채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잘…… 모르겠어요.”
“몸무게는?” “그것도…….”백재연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 있던 남 비서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씻기는 것부터 해요.”백재연이 채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머리도 정리하고, 피부 상태도 확인해요. 옷도 전부 새로 맞추고.”
“네.” “최대한 유연이 수준으로 꾸며 놔요.”유연의 이름이 나오자 채원이 백재연을 올려다봤다.
“언니는…….”
백재연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채원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줄였다.
“…… 언니는 괜찮아요?”
“…….”순간 백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채원은 자신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백재연은 그런 그녀를 내려보다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유연이가, 쓰러졌어.”
백재연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연이 쓰러졌다는 말에 채원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유연이 쓰러졌다는 건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습에 백재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너는 이제부터 유연이 몫을 해내야 해. 이제부터 유연이가 받던 교육을 네가 받고, 유연이가 원래 하려던 걸 네가 대신하는 거야.”
백재연은 마치 이미 결정된 일을 통보하듯 말을 이었다.
“공부부터 새로 시작해. 예절도 배우고, 걸음걸이와 말투도 고쳐.”
“…….”차갑게 채원을 바라보며 백재연은 남 비서를 향해 말했다.
“고등학교는 유연이가 가려던 곳으로 맞춰요. 거긴 입학시험 어려우니까 특히 신경 쓰고.”
“네, 알겠습니다.”백재연은 마치 상품을 평가하듯 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유연이 발끝도 미치지 못하는 애니까, 죽는다는 각오로 임하렴.”
채원의 손가락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백재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이 방을 나갈 수 있게 됐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언니처럼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나고, 언니는 언니인데?
머뭇거리던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왜…… 언니처럼 해야 해요? 저는 언니가 아닌…….”
찰싹.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채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너무 갑작스러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채원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손바닥이 거친 바닥을 긁고, 작은 몸이 바닥에 뒹굴었다.
뒤늦게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백재연은 쓰러진 채원을 내려다봤다.
분노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채원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유연이가 하던 걸 따라 한다고 해서 네가 유연이가 되는 게 아니란다. 네 주제를 잊지 마.”
“…….” “그리고 나는 너한테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채원의 입술이 떨렸다.
백재연은 시선을 거둬 남 비서를 돌아봤다.
“얘 성적은 어느 정도지?”
남 비서가 잠시 말을 고르다 대답했다.
“정확한 건 레벨 테스트를 해봐야 하지만, 기초부터 시작해야 할 듯싶습니다.”
백재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학교에도 보낸 적조차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백재연은 채원을 유연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들어갈 시간과 비용부터 계산했다.
잠시 생각하던 백재연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애를 데리고 유연이처럼 만들 수 있겠어요?”
남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요.”
“…… 시키신다면 준비하겠습니다.”백재연은 한동안 바닥에 쓰러진 채원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걱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쓸 수 있는 물건인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채원을 바라보던 그녀가 남 비서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쓸 수 있게 만들어요.”
“네.” “유연이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남들만큼 해서는 안 돼요. 자는 시간까지 줄여서 따라잡게 해요.” “알겠습니다.”백재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데려가서 준비해요.”
그 말을 끝으로 백재연은 방을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채원에게는 끝내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남 비서는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채원에게 시선을 내렸다.
“일어나세요.”
그의 말에 채원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남 비서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몸을 낮춰 그녀를 잡았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채원이 일어나자, 남 비서는 조용히 그녀를 살폈다.
뺨은 붉게 부어 있었고,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는 얕은 상처가 나 있었다.
“일단 씻고 나서, 약부터 발라야겠네요.”
상태를 살피던 남 비서가 시선을 돌려 채원을 바라봤다.
채원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 비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위로나 걱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유연이 쓰러지고 나서 극도로 예민해진 백재연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충고 정도는 해주는 게 낫겠지.’
남 비서는 잠시 고민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질문하시면 안 됩니다.”
채원이 남 비서를 바라봤다.
남 비서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구겨진 채원의 옷을 털어 주었다.
“절대 의문 갖지 마세요. 그냥 웬만하면 모든 감정을 다 죽이세요.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그게 서로에게 편합니다.”
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대답했다.
“네.”
그날부터 채원에게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씻는 법을 배웠다.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법과 옷을 흐트러짐 없이 입는 법도 익혔다. 식사할 때 숟가락을 드는 각도와 등을 세우는 자세를 고쳤다. 걸을 때는 보폭을 일정하게 맞춰야 했고, 고개를 너무 숙여서도 안 되었다.
말은 또렷하게 해야 했지만 너무 크게 말해서는 안 됐다. 누군가 시선을 주면 피하지 말고 웃어야 했다. 입술만 올려서는 안 됐다. 눈도 함께 웃어야 했다.
“다시.”
채원은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표정이 어둡습니다.”
다시 웃었다.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또 웃었다.
“다시.”
아침부터 밤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국어와 수학은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다. 영어 단어는 하루에 정해진 양을 외워야 했고, 틀린 문제는 맞힐 때까지 반복해서 풀었다. 처음 받아 든 시험지에는 붉은 빗금이 가득했다.
백재연은 결과를 보자마자 시험지를 채원의 얼굴에 던졌다.
“이 점수로 유연이를 따라잡겠다고?”
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제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벌을 받았다. 주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에 갇혀 하루 종일 굶거나, 어떤 날은 물리적인 형벌로 받았다.
아프고 괴로웠지만 채원은 티 내지 않았다. 고통과 감정을 죽이고 매 순간을 조용히 버텼다.
벌을 다 받고 나면 채원은 다시 공부하고 연습했다. 틀리면 다시 벌을 받고, 맞을 때까지 반복했다.
백재연이 원하는 것은 윤채원이 아니었다.
유연이 쓰러진 뒤 남겨진 자리를 빈틈없이 메울 무언가였다.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그 어떤 감정도 없는 것. 윤유연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완벽한 인형.
채원은 그렇게 조금씩 완벽한 인형이 되고 있었다.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