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이후 나는 백연우를 다시 보지 못했다.나중에 허가희가 어느 곳을 지나다가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있는 백연우를 보았다고 했다.그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그래도 한때 부부였는데, 정말로 백연우를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나는 허가희에게 주소를 물었다.며칠 만에 다시 본 백연우는 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꼿꼿했던 등은 추위 때문인지 잔뜩 웅크려져 있었다.백연우는 얇은 옷차림으로 쓰레기통 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웅크린 채, 계속 입김을 불어내고 있었다.이 모습을 보고 나는 한숨을 쉬며 백연우에게 외투를 건넸다.백연우는 몸을 굳혔고, 외투를 받은 후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한참 후, 백연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내 초라한 모습, 많이 볼품없지? 미안해.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었는데.”나는 백연우를 흘겨보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왜 아직도 귀국 안 해?”백연우는 잠시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권을 잃어버렸고, 신분증이랑 휴대폰도 다 빼앗겼어. 프랑스어도 그다지 잘하지 못하고...”백연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나는 백연우를 호텔에 데려가 방을 잡아주고, 대사관에도 연락했다.잠시 쉬었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처리한 뒤 나는 호텔을 나왔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줬다.앞으로는 아마 평생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백연우가 귀국할 때까지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그동안 백연우는 매일 내 출퇴근을 챙겨주었다.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하지만 나와 백연우는 이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모든 것이 변했고, 사람도 변했다.우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백연우가 귀국하는 날, 나는 공항에 배웅 가지 않았다.저녁에 퇴근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탁자 위에서 반지 하나를 보았다.그건 예전에 내 생일에 백연우가 선물했던 ‘영원한 마음’이라는 이름의 반지였다.원래 한 쌍으로 된 반지였고,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의미
우리는 마음껏 술을 마시며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았고, 어느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에 사람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허가희는 이미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다.나는 허가희를 보고 조용히 이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준아, 우리 좀 데리러 와. 오늘 우리 둘 다 많이 마셨어.”전화기 너머 이성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이를 악물고 있는 게 느껴졌다.[알았어.]이성준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어서, 나는 룸을 나와 잠시 바람을 쐬었다.그때 한 흑인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그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고, 음탕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었다.“어디서 온 예쁜 아가씨야? 처음 보는 얼굴이네.”“이리 와서 한번 뽀뽀해보자. 다른 여자들이랑 맛이 같은지 볼까?”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내게 다가오려 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발밑에 있는 빈 술병을 집어 들었다.해외에 온 뒤로 나는 호신술을 조금 배웠다.하지만 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 흑인 남자는 마른 그림자에 의해 바닥에 걷어차였다.그 남자는 미친 듯이 상대를 두들겨 팼고, 주먹이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처음에는 살려달라는 소리가 계속 나왔지만, 결국 그 남자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얻어맞았다.하지만 그 위에 올라타서 흑인 남자를 때리는 남자의 손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혹시라도 사람이 죽을까 봐 나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저기... 방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 사람은 이미 기절했어요.”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백연우의 초췌한 얼굴이 순간 내 눈에 들어왔다.어쩐지 뒷모습이 익숙하다 싶었다.백연우라는 걸 알고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어쨌든 방금 백연우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나는 백연우에게 손수건을 건넸다.“닦아. 손에 피 묻었어.”백연우는 묵묵히 받아 들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복잡하고 망설이는 듯했다.나는 백연우가 무언가 말하려다 만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물
백연우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말했다.“나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우리가 함께한 15년을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버릴 수 있어?”“우리는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그렇게 많은 고비를 넘긴 끝에야 함께 할 수 있었어. 지금 정말 나와 완전히 끝내려는 거야?”“우리가 아이도 갖고, 같이 여행도 가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서로에게 고백하자고 했잖아.”“우리는 앞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우리가 약속한 일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 너는 나를 떠나려는 거야?!”백연우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말했다.10년 동안 나는 백연우가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내 기억 속의 백연우는 언제나 온화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사람이나 사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온화하고 점잖았다. 나에게는 더욱 다정했으며,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사랑이 정말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전에 백연우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마음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나의 백연우에 대한 감정은 이미 다 닳아 없어졌다.나는 절망으로 물든 백연우의 눈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우리는 이미 끝났어. 끝났으니 좋게 헤어지자.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마.”“나는 어떤 형태의 변심도 용납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한결같은 사람이야.”“내가 너에게 한결같은 마음이었으니, 당연히 너도 나에게 그래 주길 바랐어. 네가 이전에 나에게 아무리 잘해줬어도, 네가 변심한 건 사실이고, 똑같은 호의를 나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 준 거야.”“네가 임서현을 사랑했든 아니든, 네 마음이 흔들린 그 순간 우리는 끝난 거야.”“너는 항상 나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임서현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야.”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백연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마침내 핏기가 싹 가셨다.백연우는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 속의 빛은 점점 사라졌다.나는 낙심한 백연우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이 말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거의 온 마음을 백연우에게 쏟아부었다.일과 공부를 다 놓은 채, 내 인생은 거기에서 그대로 멈춰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멈춰 있었으니, 이제는 다시 시작할 때였다.그 식사는 무척 즐거웠다.식사 내내 허가희는 내게 음식을 챙겨줬고, 그녀 덕분에 분위기는 한순간도 식을 줄 몰랐다.우리는 만나자마자 금세 친해졌다.식사를 마친 후, 나는 두 사람을 따라 회사로 가서 정식으로 sy의 주주가 되었다.이성준이 마련해준 사무실은 넓고 밝았고, 바로 옆방은 허가희의 사무실이었다.퇴근 후 우리는 자주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근처 바에서 가볍게 한잔했다.가끔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으면 근처 술집에 가서 실컷 놀기도 했다.하지만 십중팔구 가게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성준에게 붙잡혔다.그럴 때면 허가희는 늘 분통을 터뜨렸다.“연지가 나랑 같이 있는데 뭘 걱정해? 내가 다른 사람이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이성준은 한 손으로 허가희의 옷깃을 잡고, 다른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연신 톡톡 찔렀다.“거긴 별별 사람이 다 모이는 곳이야. 나 없이 너희 둘이서 다시는 가지 마!”두 사람의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두 사람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것이 확실했다.나와 백연우 사이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이렇게 평온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때, 백연우가 찾아왔다.그때는 내가 프랑스에 온 지 한 달이 지났고, 일도 점차 궤도에 올랐다.나는 평소처럼 허가희와 함께 회사 밖으로 나와 잠시 쉬려다가, 맞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마주쳤다.그 사람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달려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그 남자의 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고, 몸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나를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다시 찾은 사람 같았다.“연지야, 드디어 찾았어.”“내 말 좀 들어봐. 나와 임서현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나도 임서현과 한때 그런
나는 곧바로 휴대폰에서 유심을 빼내 꺾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이성준은 이미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이성준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손에 든 백합 다발을 흔들어 보였다.“연지야, 여기!”나는 이성준의 외침을 듣고 미소 지으며 그의 시선을 맞았다.오랜만에 만난 이성준은 예전보다 한층 성숙해져 있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이성준과 인사를 나눴다.이성준은 반갑게 내 짐을 받아 들었다.“우리 마지막으로 본 게 몇 년 만이지?”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하나둘 떠올랐다.나와 이성준은 원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 입시 후 전공이 둘 다 의상 디자인이었다.고등학교 때는 서로 도와주는 좋은 파트너였고, 대학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실력자였다.내 디자인에 담긴 모든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성준은 단번에 이해했고, 그의 디자인 철학 역시 나와 잘 맞았다.우리는 정말 뜻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그때 나와 이성준이 가까이 지내니, 친구들도 우리 둘 사이를 떠보곤 했다.하지만 그때 나는 온통 백연우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성준에 대한 감정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대학 졸업 후 우리는 각자 다른 곳으로 떠났다.이성준은 유학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어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었다.나중에는 자신만의 의류 회사도 차렸다.주로 컨템퍼러리 럭셔리 브랜드를 지향했고, 소비자층도 넓어 수익도 상당했다.이성준은 사업이 자리 잡은 뒤, 내게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우리는 항상 좋은 파트너였다.이성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마음이 흔들렸다.하지만 그때는 이미 백연우와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고, 남편은 내가 일 때문에 고생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며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백연우는 자기가 나 하나쯤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그래서 나는 그때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이성준의 제안을 거절했다.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정말 어리석었다.지난
우리 중 누구도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 않았다.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예전에 나와 백연우는 약속한 적이 있었다.같은 눈을 맞을 때마다, 서로에게 한 번씩 고백하기로.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 풍경을 혼자 감상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우리는 결국 함께 늙어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멀리서부터 무언가 굴러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내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솟구쳤다.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커다란 바위가 똑바로 나를 향해 빠르게 굴러떨어지고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쾅!순간 온몸이 트럭에 치인 듯한 충격이 덮쳐왔다.“아...”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연지야!”백연우는 놀란 나머지 목소리까지 갈라졌다.백연우의 눈가는 순식간에 붉어졌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괜찮아? 지금 바로 병원에 데려갈게!”나는 놀라서 일그러진 백연우의 얼굴을 보며 비웃듯 웃었다.방금 백연우는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백연우는 충분히 나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낼 시간이 있었다.하지만 백연우는 방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바위가 굴러오는 소리조차 무시했다.나는 백연우가 미처 화면을 끄지 못한 휴대폰을 흘낏 내려다보았다.채팅창 위의 저장된 이름이 보였다.‘우리 서현이.’정말 친근하게 부르는구나.백연우는 이미 구조대에게 연락하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대가 도착할 것이다.내 휴대폰에 갑자기 몇 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열어보니 임서현이 보낸 것이었다.[연우한테 들었어. 지금 두 사람이 첫사랑 고백한 곳에 다시 갔다며?][오늘이 연우의 생일이지? 지난번 네 생일 때 연우는 나랑 함께 있었어. 이번엔 네가 맞춰봐. 연우가 또 나 때문에 너를 버릴까?]나는 흘낏 보고는 휴대폰을 껐다.백연우가 지금 어떻게 되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내 새로운 삶이 곧 시작될 것이다.거기에는 백연우도, 임서현도, 나를 괴롭히는 어떤 일도 없을 것이다.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