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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항해의 끝, 인생은 시작된다

긴 항해의 끝, 인생은 시작된다

By:  온빛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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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이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아기를 안고 어르며 놀아 주었다. "아가야, 착하지? 나는 이모고, 이쪽은 삼촌이야." 곁에 서 있던 서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삼촌 아니야. 아빠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당기더니 다시 말했다. "내 아이야." "네 아버지 돌아가신 날, 나연이랑 밤새 잤어. 콘돔도 한 갑이나 썼고."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목이 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하지만 우리, 어제 혼인 신고했잖아." 서지훈은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달래듯 말했다. "걱정 마. 나랑 걔는 기껏해야 잠자리 상대야. 결혼할 거였으면 진작 했지." 말을 잇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짓궂은 악의를 담아 말했다. "나연이가 아직도 너한테 숨겼어? 우리 예전에 사귀었어. 걔 첫 남자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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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어떻게 병원을 나와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서지훈이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웨딩 사진을 바닥에 내던져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던 결혼 축하 장식은 모조리 찢어 버렸고, 신혼 침대까지 망가뜨렸다.

현관에 선 서지훈은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피웠다.

그러고는 다가와 내 손을 살폈다.

"다친 데 없어?"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가슴을 들끓던 분노를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

눈시울을 붉힌 채 따져 물었다.

"왜 그랬어?"

서지훈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너랑 결혼한 이유를 묻는 거야?"

그는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불쑥 웃었다.

"넌 꼼꼼하고 성격도 무던하잖아. 나를 위해 일까지 포기하고 배우 활동도 접은 채 집에 있어 줄 수 있으니 아내로는 딱이지."

"나연이는 철없고 제멋대로인 공주님이라 집안일은 기대도 못 하거든."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을수록 가슴은 더 지독하게 아팠다.

내 눈에 맺힌 눈물을 보자 서지훈은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만해. 말했잖아, 나랑 걔는 안 된다고."

"앞으로도 기껏해야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사이일 뿐이야."

나는 그를 세차게 밀어내며 울부짖었다.

"왜 나한테 이래? 걔랑 아이까지 낳아 놓고 왜 나랑 결혼했냐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 나를 철저히 속이고 바보로 만들었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헐떡였다.

서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사람 보듯 나를 바라봤다.

한참 뒤,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만 좀 해. 나연이가 내가 끓여 주는 닭고기 수프를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남자를 꼼짝도 않고 바라봤다.

능숙하게 불을 켜고, 재료를 썰고, 국물 위 거품을 걷어 내는 모습을.

함께한 삼 년 동안 그는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요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다.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그가 사실은 요리를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문득 예전에 정나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던 전 남자 친구가 자신의 편식을 고쳐 주겠다며 매일 부엌에서 요리를 연구했다고 했다.

한 번은 집 부엌을 날려 먹기까지 했다고.

나는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모든 것이 정나연에게 들었던 기억 속 세세한 이야기와 하나씩 포개졌다.

평소 애써 외면했던 수많은 순간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운전할 때면 정나연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선글라스를 서지훈 앞에 내밀었다.

같이 밥을 먹다가는 불쑥 말하곤 했다.

"지훈이는 파 안 먹어."

정나연이 넘어지면 서지훈은 늘 나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정나연이 아프면 회의실에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병원으로 달려갔다.

...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져 있었다.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지훈."

"우리 이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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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어떻게 병원을 나와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서지훈이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웨딩 사진을 바닥에 내던져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벽에 붙어 있던 결혼 축하 장식은 모조리 찢어 버렸고, 신혼 침대까지 망가뜨렸다.현관에 선 서지훈은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피웠다.그러고는 다가와 내 손을 살폈다."다친 데 없어?"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가슴을 들끓던 분노를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눈시울을 붉힌 채 따져 물었다."왜 그랬어?"서지훈이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너랑 결혼한 이유를 묻는 거야?"그는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불쑥 웃었다."넌 꼼꼼하고 성격도 무던하잖아. 나를 위해 일까지 포기하고 배우 활동도 접은 채 집에 있어 줄 수 있으니 아내로는 딱이지.""나연이는 철없고 제멋대로인 공주님이라 집안일은 기대도 못 하거든."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을수록 가슴은 더 지독하게 아팠다.내 눈에 맺힌 눈물을 보자 서지훈은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그만해. 말했잖아, 나랑 걔는 안 된다고.""앞으로도 기껏해야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사이일 뿐이야."나는 그를 세차게 밀어내며 울부짖었다."왜 나한테 이래? 걔랑 아이까지 낳아 놓고 왜 나랑 결혼했냐고!"한 사람은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두 사람은 오랜 세월 나를 철저히 속이고 바보로 만들었다.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헐떡였다.서지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 사람 보듯 나를 바라봤다.한참 뒤,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만 좀 해. 나연이가 내가 끓여 주는 닭고기 수프를 기다리고 있어."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남자를 꼼짝도 않고 바라봤다.능숙하게 불을 켜고, 재료를 썰고, 국물 위 거품을 걷어 내는 모습을.함께한 삼 년 동안 그는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요리한 적이 없었다. 그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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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제야 서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벨소리가 끼어들었다.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왜, 우리 공주님?""수프는 끓이고 있어. 심심하면 아기랑 놀고 있어."그러다 문득 말이 끊겼다.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상대에게 답했다."걔는 몰라. 걱정 마."통화를 끝낸 그가 나를 바라봤다."나연이는 내가 다 말한 줄 몰라.""모르는 척해 줘. 걔도 너랑 친구 사이가 깨지는 건 싫대."말을 마친 그는 수프를 보온 용기에 담았다.그러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나는 그를 불러 세우고 다시 말했다."이혼하자."그가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우리 혼인 신고한 지 하루밖에 안 됐잖아. 무슨 이혼이야?""남들 웃음거리 되려고 그래? 체면 좀 지키고 그만해."나는 손에 잡힌 꽃병을 집어 들어 그의 앞에 힘껏 내던졌다.나는 분노를 터뜨렸다."내가 유난을 떤다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있을 때, 둘이 뒹굴면서 내 체면은 생각했어?""애까지 낳아 놓고 나한테 무슨 낯으로 체면을 지키래?"하필 그 순간,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서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무심히 한마디만 던졌다."미쳤네."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며 정나연의 메시지가 쏟아졌다.[보민아,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갔네.][우리 아들 아직 못 봤지?][서지훈이랑 신혼여행은 언제 가?][지훈이도 진짜 너무해. 하필 내가 애 낳는 날 너랑 혼인 신고를 해서 네가 내 산후조리도 못 도와주잖아. ㅠㅠ]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그래도 내 걱정은 하지 마. 아기 아빠가 와서 돌봐 주고 있으니까.]뒤이어 사진 한 장이 전송됐다.사진 속에서는 남자의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젖병을 쥐고 있었다.약지에는 나와 똑같은 결혼반지까지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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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서지훈의 두 눈은 피처럼 붉었다. 마치 악귀라도 된 듯했다."강보민, 정나연이 자살을 시도했어.""네가 그 말을 해서."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뭐라고?"그가 격앙된 채 내게 소리쳤다."애 낳은 지 얼마 안 돼 감정도 불안정한 걸 뻔히 알면서 왜 자극했어?"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너도 걔랑 같은 희귀 혈액형이잖아. 걔를 살릴 수 있는 건 너뿐이야!"신호를 몇 번이나 무시하며 달린 그는 나를 병원 안으로 끌고 갔다."의사 선생님, 이 여자도 나연이와 혈액형이 같습니다. 헌혈할 수 있어요!"말하는 내내 그의 온몸이 떨렸다.그토록 초라하게 무너진 서지훈을 처음 봤다.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 멍하니 서 있었다.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그에게 이끌려 채혈실로 들어갔다.그가 거칠게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정나연 때문에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서지훈의 모습만 가득했다.그때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죄송하지만 이분은 임신 중이라 헌혈하기 어렵습니다."나는 멍하니 배를 매만졌다.바로 다음 순간, 서지훈의 고함이 터졌다."피를 뽑으라고! 아이는 필요 없어. 나한테는 정나연만 있으면 돼!"내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물은 아무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서지훈, 이 아이는 네 친자식이야."하지만 그는 계속 악을 쓰며 사람들에게 채혈 바늘을 내 팔에 꽂으라고 했다."서지훈...""서지훈!""내 아이를 해치게 둘 수 없어!"바늘을 뽑아 버리고 몸을 돌려 달렸다.한 걸음도 못 가 누군가에게 단단히 붙들렸다.서지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 같았다.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온몸이 떨릴 만큼 서늘했다."보민아, 가서 나연이한테 피 줘."보디가드 네 명이 나를 채혈실 침대에 눌러 붙들었다.피가 한 관씩 몸에서 빠져나가 정나연이 있는 응급실로 옮겨졌다.얼굴은 조금씩 핏기를 잃어 갔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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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연이랑 아이를 멀리 보내고, 걔와는 완전히 끝낼게.][몸이 회복되면 신혼여행 가자.]나는 차갑게 화면을 끄고 답하지 않았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자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원래도 혈육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까지 떠난 뒤에는 세상에 가족이라 부를 사람도 없었다.그래서 늘 나와 피가 이어진 아이를 갖는 꿈을 꾸었다.하지만 서지훈이 내 아이를 제 손으로 죽였다.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간호사를 불러 퇴원 수속을 부탁했다.그때 서지훈이 험악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들어 내 뺨을 후려쳤다.내 귀에서 윙 소리가 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입가에 비릿한 맛이 번지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그는 머리채를 움켜쥐고 내 얼굴을 휴대전화 화면에 들이밀었다.화면은 온통 폭발적으로 치솟은 실시간 검색어로 뒤덮여 있었다.[인기 가수 정나연, 혼외 출산. 과거 성폭행 피해 사진 유출]실검 아래에는 과거 정나연이 납치범들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할 때 찍힌 사진이 가득했다.그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강보민, 내가 여기까지 양보했는데도 왜 이런 짓을 했어?""이러면 나연이 인생이 망가진다는 걸 몰라?""십 년 동안 곁을 지키며 겨우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네가 전부 망쳤어!"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부인했다."내가 한 일 아니야."하지만 그는 설명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나를 억지로 방 안에 끌고 들어갔다.대낮처럼 환한 조명 아래, 옷을 벗은 남자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방 구석구석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가슴이 바닥까지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서지훈의 팔을 붙잡았다."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그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네가 이 바닥 사람인데도 모르겠어?""실검을 가장 빨리 묻는 방법은 더 큰 사건으로 덮는 거야."말을 이어 갈수록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짙어졌다."네가 톱 여배우잖아. 네가 성폭행당한 것처럼 꾸민 사진이 퍼지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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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서지훈이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가 시작된 뒤였다.흐느낌이 가득한 가운데 고개를 든 그는 영정을 보았다.무심코 눈을 비볐다.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서지훈은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봤다.그가 중얼거렸다."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죽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매니저 윤서영은 눈시울을 붉힌 채 증오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여긴 왜 온 거예요?""나가요. 당장 나가라고요!""언니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서 나가요!"서지훈은 아직도 강보민의 사망 소식이 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한 줄기 희망을 붙잡은 눈으로 윤서영을 바라봤다."강보민 안 죽었지? 어디 숨겨 둔 거야?""당장 나오라고 해. 연기는 이제 그만하라고.""영상은 전부 지우게 했어. 나연이한테 한 짓도 더는 따지지 않을 테니까.""돌아오라고 해."뻔뻔하게 할 말을 늘어놓는 모습에 윤서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입 다물어요!""언니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당신이 언니를 죽여 놓고 죄까지 뒤집어씌웠잖아요!""정말 역겨운 인간이네요.""언니는 이미 떠나기로 했어요. 당신이 정나연 그년과 잘되라고 다 포기했는데 왜 끝까지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한 거예요?"서지훈은 또다시 멍해져 중얼거렸다."이미 떠나기로 했구나."그러더니 다시 되뇌었다."강보민 어디 있어? 나 만나러 나오라고 해."윤서영은 한가운데 놓인 유골함을 가리켰다.그러고는 사망 진단서를 서지훈의 가슴팍에 내리쳤다.목소리를 높였다."죽었어요. 언니는 이미 죽었다고요! 똑똑히 들어요. 바로 저기 있잖아요!"윤서영이 경비원들을 향해 소리쳤다."저 사람 끌어내요."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말렸다."윤 매니저님, 그만하세요. 보민 씨 남편이기도 하고 서원그룹 대표이사인데..."윤서영이 큰 소리로 말을 잘랐다."저 사람이 누구든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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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사람이 이제는 작은 유골함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순간 서지훈은 울음에 목이 메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그러나 이제 그의 말에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한밤중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 사람도 다시는 없었다.그는 위장을 휘감는 통증을 그대로 견뎠다.일부러 자신을 벌주려는 사람처럼.진통제가 침대 옆 협탁 위에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품속의 유골함이 다음 순간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그때 현관문 잠금장치가 돌아갔다.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대표님, 나연 씨가 찾아왔습니다."빛을 잃은 서지훈의 눈동자가 그제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가 쉰 목소리로 추궁했다."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비서는 조심스럽게 답했다."대, 대표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신 메일 때문입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서지훈이 벌떡 일어섰다.눈빛에 살기가 번뜩였다."내가 언제 그런 메일을 보냈어?"비서는 당황한 나머지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 사모님을 그 방에 데려가시기 직전입니다."서지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일함을 열었다.실제로 발송된 메일 한 통이 있었다.내용은 짧은 두 마디뿐이었다.[연기 말고 진짜로 해. 현장 생중계해.]휴대전화를 쥔 손이 떨렸다. 그는 그 메일을 보낸 적도, 그런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서지훈은 시선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곰곰이 짚어 나갔다.잠시 뒤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골함을 조심히 장 안에 넣고 문을 잠갔다.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그 무렵 줄곧 곁에 있었던 사람은 정나연뿐이었다.그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정나연뿐이었다.그의 휴대전화로 그 메일을 보낼 수 있었던 사람은 정나연밖에 없었다.서지훈은 분노를 안고 정나연의 병실로 향했다.그러나 문밖에서 정나연과 한 남자의 대화가 들려왔다."서지훈한테 아이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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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지훈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대전화에 남은 메일을 눈앞에 내밀었다.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뼛속까지 얼어붙는 냉기가 배어 있었다."이 메일, 네가 보낸 거지?"정나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분명 지웠는데, 어떻게..."서지훈은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이토록 허술한 속임수 하나 때문에 자기 손으로 아내를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가 갑자기 정나연의 목을 움켜쥐었다."왜 그랬어? 보민이는 네 가장 친한 친구였잖아. 왜 죽음으로 몰아넣었어?""보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어. 바람피우고 배신한 건 우리야. 우리가 잘못했다고!""너는 죽어 마땅해. 널 죽이고 보민이한테 사죄할 거야!"목이 졸린 정나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곧 숨이 넘어갈 듯했다.임범준이 힘껏 서지훈을 떼어 냈다.정나연을 제 뒤로 감쌌다.서지훈이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임범준도 그제야 겁을 먹었다."대표님, 사람을 죽이면 범죄예요."정신을 되찾은 서지훈이 갑자기 입꼬리를 비틀었다."네 말이 맞아.""너희를 쉽게 죽게 둘 수는 없지. 보민이가 겪은 고통을 한 치도 빠짐없이 전부 되돌려 주겠어!"정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지훈을 바라봤다.체면도 잊은 채 악을 썼다."서지훈, 너 미쳤어!""우리가 몇 년을 함께했는데? 감히 나한테 이래?""강보민은 이미 죽었어. 이제 와서 누구 보라고 사랑꾼 행세야?""나랑 잘 때는 강보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잖아.""강보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나 하나뿐인 줄 알아? 진짜 죽인 건 바로 너야, 서지훈.""강보민이랑 사귀면서도 나와 끊지 못했잖아. 그 여자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준 건 너야.""나는 그저 마지막으로 등을 떠밀어 완전히 마음을 접게 했을 뿐이야.""누가 그렇게 멍청하게 죽을 줄 알았겠어."말을 마친 그녀가 갑자기 웃었다."하긴, 강보민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대학 때부터 멍청했으니까.""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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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내보내 줘! 제발 내보내 줘! 여기 있기 싫어!"문이 굳게 닫혔다.서지훈은 옆방으로 들어갔다.임범준의 급소를 발로 걷어찼다.급히 만들어 온 DNA 친자 확인 결과서를 훑어봤다.다시 한번 차가운 헛웃음이 흘렀다."감히 둘이 짜고 나를 속여?"임범준은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대표님, 믿든 말든 나도 속았어요."서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몸을 돌려 나가며 한마디씩 또박또박 뱉었다."네 아이 데리고 꺼져."임범준이 뒤에서 물었다."그럼 저 여자는요?"서지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보민이한테 사죄하러 저승으로 내려가야지."서지훈은 그대로 문밖에 앉았다.방 안에서는 정나연의 욕설과 비명이 들려왔다."건드리지 마! 아악, 나한테 손대지 마!""서지훈, 내가 잘못했어! 제발 살려 줘!""누가 좀 살려 줘. 제발!"서지훈은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품에는 유골함이 안겨 있었다.손끝으로 몇 번이고 유골함을 쓸어내렸다."보민아, 네 복수는 해 줬어. 듣고 있어?""정나연이 낳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어."말을 잇던 그가 갑자기 낮게 웃었다."나는 그 여자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 때문에 우리 아이를 내 손으로 죽였어.""보민아, 내가 이렇게까지 크게 잘못했어.""이제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끝없이 말을 늘어놓았다.뒤에는 보디가드들이 한 줄로 서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남자들이 무리 지어 밖으로 나왔다.서지훈이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었다.남자들을 모조리 쏴 죽였다.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차갑게 웃었다."내 여자에게 손댄 놈은 다 죽어야 해."주변 사람들은 그가 말한 여자가 어느 쪽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서지훈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처참한 몰골로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정나연을 내려다봤다.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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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2년 뒤, 나는 미국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국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전 서원그룹 대표이사 서지훈은 성폭행 교사 및 고의 살인 혐의로 기소 당국에 기소됐습니다. 2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형 집행은 1년간 유예되고 정치적 권리는 종신 박탈됐습니다.]그 소식에 손에 든 커피잔이 살짝 흔들렸다.하지만 곧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등 뒤에서 폴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또 물건을 두고 갔어요."그가 내 가방을 건넸다."정말 같이 안 가도 돼요?"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우리 도보 여행팀은 전부 여자야. 그래도 따라오고 싶어?"폴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그는 원래 여자들이 떠들썩하게 몰려 있는 자리를 가장 귀찮아했다.온화하고 조용한 내 곁에서는 늘 편안해 보였지만, 시끄러운 여자들 틈에서는 늘 질린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거듭 당부했다."힘들거나 무슨 일 생기면 꼭 전화해요. 바로 데리러 갈게요."말을 하고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얼굴이었다."그냥 차로 뒤에서 따라가며 지켜 줄까요?"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정말 괜찮아. 그 코스는 아주 안전하고 벌써 다섯 번이나 가 봤어."그제야 폴은 더 말하지 않았다.짧게 깎은 머리를 쓸어 만졌다.한참 망설이다 손목시계 하나를 내밀었다."길에서 봤는데, 누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나는 웃으며 받아 손목에 정성껏 찼다.시계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흉터를 꼭 가려 주었다."고마워. 정말 예뻐! 계속 차고 다닐게."폴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마음에 들면 됐어요."그러고는 내 짐을 들어 셔틀버스에 실어 주었다.함께 가는 친구들이 웃으며 놀렸다."신디, 남자 친구야?"폴은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웃으며 바로잡았다."내 남동생이야."친구 하나가 폴의 푸른 눈을 가리키며 또 웃었다."거짓말. 딱 봐도 혼혈이잖아."그 말에 모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폴만 웃지 않았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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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폴이 나타나 나를 두들겨 패 준 덕분이지.""널 찾고도 바로 오지 못한 건..."그가 바짓단을 걷어 전자감독 장치를 드러냈다.체념한 듯 말했다."가장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해서 아주 오랫동안 법정 싸움을 벌였어.""그래서 형 집행을 일 년 유예받을 수 있었고.""이렇게 널 만나러 올 기회도 얻었어.""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네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그래도 한 번은 널 보고 싶었어.""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고.""미안해. 전부 내가 잘못했어.""사랑해, 보민아. 내 마음을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야.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신디, 빨리 와!"앞에서 팀원이 나를 불렀다.서지훈의 말은 끝맺지 못한 채 멈췄다.그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고 줄곧 나를 바라봤다.내 얼굴을 머릿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말 다 하셨어요? 전 이제 가 볼게요."서지훈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길을 비켜 주었다.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보민아."나는 걸음을 잠시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듯 떨리고 있었다."가능하다면 가끔 돌아와서 나를 봐 주면 안 될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대로 도보 여행팀 사이로 들어갔다.뒤편 개울물 소리 사이로 남자의 흐느낌이 희미하게 들렸다.팀원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저 동양인 남자는 누구야? 진짜 잘생겼네."나는 담담히 대답했다."예전에 알던 사람이야."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등산 스틱에 몸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고개를 들자 익숙한 두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폴과 윤서영이 내게 달려왔다.두 사람은 생일 케이크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팀원들도 함께 노래했다.모두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큰 소리로 축하했다."생일 축하해!"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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