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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제구
소름이 끼쳤다!

그건 그가 피 구덩이 속에서 목숨이 꺼져가며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다른게 있다면 그때는 빛처럼 서현우가 등장하여 놀라운 의술로 그를 살렸지만 이번에는 지옥 같은 엄동설한의 싸늘함이 서현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전장을 누비며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적들을 물리치던 남강의 총사령관이 동생을 위해 충동적으로 용의 훈장을 벗어던졌다.

이천용은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크게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일대의 실수를 말이다!

어찌 되었든 서현우의 동생을 건드려서는 안 됐다.

이와 동시에 이천용의 분노의 크기 역시 커졌다.

그는 눈앞의 남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용국을 위해, 남강을 위해, 수억의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서현우는 너무도 많은 것을 희생했다.

타지에서 목숨을 바치며 가족까지 등지고 살아온 대가가 이런 거라니!

만약 서현우의 의술이 대단하지 않았다면 병상에 누워있는 여자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분노와 원한이 극치에 달했다.

이천용은 입장을 바꿔 자신의 가족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그는 서현우만큼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우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천용은 눈앞에 피바다가 연상이 되었다.

“안 돼요!”

이천용은 급히 일어나 서현우의 손목을 잡았다.

“넌 날 막지 못해. 알잖아.”

서현우의 말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그 뒤에는 하늘을 뒤흔들 살기가 숨겨져 있었다.

이천용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관님, 침착하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그의 말에 서현우가 고개를 돌려 놀라운 눈빛으로 물었다.

“네가 날 도와?”

“네. 제가 돕겠습니다!”

이천용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 남강에서는 사령관님을 막을 사람이 없겠지만 중연시는 다릅니다. 어떤 일은 사령관님께서 접근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사령관님을 돕겠습니다. 연루된 모든 사람을 잡겠습니다.”

서현우가 지긋이 이천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완전히 미쳐버릴까 걱정되는 거야?”

이천용은 답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였다.

서현우를 돕는 건 국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반드시 문책을 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돕지 않으면 서현우가 스스로 움직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연시는 피로 물들 것이다.

그의 책임은 줄어들겠지만 서현우는...

“좋아, 날 돕게 할게.”

서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물었다.

“나의 책임감을 상실한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거의 죽어가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이천용이 멈칫하더니 답했다.

“노래방에 있습니다.”

서현우는 실소를 터뜨렸다.

주먹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눈에 담긴 분노가 더욱 짙어져 실체를 띨 것만 같았다.

‘정말 대단한 아버지야. 딸이 사경을 헤매는데 노래방에서 놀고 자빠졌어?’

...

태양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번화한 중연시는 네온사인과 함께 밤의 시작을 알렸다.

삼중문은 노래방의 이름이다.

중연시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만큼 유명한 주점이었다.

삼중문의 관리자가 바로 이천용이 말한 유혜린의 아버지 유상혁이었다.

그는 중연시 지하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삼중문의 룸 안에서.

서태훈은 히죽거리며 술이 담긴 잔을 들고 배가 나온 중년 남자를 향해 말했다.

“성 대표님,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너무 영광입니다! 제가 술 한 잔 따르겠습니다!”

성 대표는 서태훈을 힐끔 보더니 역겨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마지못해 술잔을 들고는 서태훈이 술을 따르고 잔을 마주치기도 전에 잔 속의 술을 서태훈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서태훈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화를 내기는커녕 흥분해서 말했다.

“성 대표님! 영광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 대표님!”

“하하하...”

룸에는 성 대표의 부하들의 비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태훈은 씁쓸함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들어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마시고는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내 스스로도 역겨운 미소를 띠며 성 대표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성 대표님, 이건 제가 마련할 수 있는 모든 돈입니다. 많지는 않아요. 정확하게 4억입니다. 옛정을 봐서... 아악!”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 대표는 다리를 들어 서태훈을 걷어찼다.

서태훈의 이마가 벽에 부딪치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붉은색의 피가 조명을 받으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모습은 괴이했다.

“옛정? 서씨 가문이 잘 나갈 때도 난 오늘과 같이 널 대했어. 하지만 너는? 감히 나한테 콩고물이나 줘?”

성 대표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서태훈, 난 오늘만을 기다렸어! 알아? 그때 당신 얼굴에 걸린 미소가 얼마나 역겨웠는 줄 아냐고! 하지만 고마워. 당시에 준 콩고물이 없었다면 내가 자본을 모을 수 없었겠지. 유상혁 씨와 알게 될 일도 없었을 테고. 네가 내 앞에 이렇게 꿇고 있을 일도 없었겠지! 하하하! 이리 기어서 와!”

성 대표는 비싼 양주를 바닥에 부어버리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깨끗하게 핥아.”

“저...”

서태훈은 착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피는 아직도 그의 얼굴을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었다.

중연시 4대 가문과 견줄 수준이던 서씨 가문의 가주가 오늘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딸은 어떡한단 말인가.

아들은 6년 동안 실종되어 없는 셈 친다지만 딸 역시 잃을 수는 없었다.

고통스럽게 눈을 감은 서태훈은 피로 물든 바닥에 두 손을 받치고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에서 비통함을 발견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딸을 위해 모든 수모를 참았다. 머리를 밟혀도 웃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만 딸을 구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기는 법이다.

눈을 감은 서태훈은 왼쪽 무릎을 꿇기도 전에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것을 느꼈다.

“성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개처럼 기어갈 수 있어요.”

서태훈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개처럼? 그럼 나는 뭔데요? 개새낀가?”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고 서태훈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흐른 피가 그의 시야를 가렸고 룸의 조명이 어두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훈은 군복을 입은 젊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6년 동안 실종되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기뻐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아들에게 못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서태훈은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서 도련님? 그래! 맞아! 서 도련님이야!”

성 대표는 서현우를 알아보았다.

6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에겐 억겁의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찰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리 와!”

성 대표는 변태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도련님! 너도 기어! 어서!”

서현우가 고개를 들어 웃으며 말했다.

“6년 동안... 내가 남강에서 지킨 게 이런 쓰레기들이었단 말이야?”

미소는 사라졌다.

서현우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6년을 헛살았어.”

이때 홍성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살기는 룸을 가득 채웠다.

이런 쓰레기들은 적국의 병사들보다도 더욱 역겨웠다.

그들에겐 죽음이 가장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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