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은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원경릉의 뒷모습을 보며 ‘왕비가 또 무슨 일로 왕야를 화나게 한거지’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반면 탕양은 그 일은 나랑 상관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호의 미간에는 피가 올라와 있었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나있었다. “서일. 가루 좀 가져다주시지오.”탕양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일이 한걸음에 달려와 그의 뺨을 보았다. “감히 왕야에게 손찌검을 하다니!”탕양은 다급하게 서일에게 말했다. “일단 가루약을 가져오시라구요!”다급한 그들과는 다르게 우문호는 담담하게 “필요없어.” 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일은 가루약을 가져왔다. “괜찮다. 원경릉이 이미 약을 발라주었어.” 우문호는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서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왕야, 저 여자가 왕야에게 뺨까지 올려부쳤는데, 아직도 저 여자가 가져온 약을 쓰십니까? 저 여자가 날이 갈수록 왕야를 우습게 보고 있습니다!”우문호는 서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탕양에게 “어서 원경릉을 찾아 약을 주거라. 아마 자금탕의 효력이 사라졌을거야. 방금 원경릉이 귀신 어쩌고…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어.” 라고 말했다.“그녀가 헛것이라도 본다는 말입니까? 왕비가 헛것을 보고 오해해 왕에게 손찌검 한 것 입니까?” 탕양은 염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는 무슨. 나는 그저 그녀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 이상해서 정신차리라고 뺨 한대를 친것 뿐이다. 이 상처들만 회복하면, 내가 저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서일은 옆에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양은 그런 서일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탕양은 원경릉을 찾으러 가기 위해 일어섰다.“서일. 여기서 왕야를 잘 돌보고 있으세요. 제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서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원경릉은 씩씩거리며 봉의각으로 들어갔다. 탁자를 닦던 녹주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달려왔다. “왕비님. 왕야를 돌보셔야 하는거 아
단약을 먹고 나니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숨 쉬는게 편해지면 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해지고 자연스레 환각이 보이지 않는 원리. 원경릉은 문득 이 약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소월각에 도착했을 때, 탕양과 서일이 원경릉을 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눈은 원경릉이 무슨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으로 가득차있었다. 우문호는 들어오는 그녀를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원경릉은 그의 미간에 고여있는 피를 보며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저 묵묵히 그의 상처를 치료할 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아프지 않나?” 우문호가 갑자기 원경릉에게 말을 걸었다. 적막을 깨는 그의 목소리에 원경릉은 깜짝 놀라 “전혀!”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미안해”라고 말했다.원경릉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안하다고?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그녀는 그와 화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는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됐어요. 이미 지난일이니까.”라고 흐지부지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우문호의 눈에서 웃음기가 보였다. “본왕은 사과한겁니다.”원경릉은 이런 우문호의 모습이 얄미워 상처를 힘주어 눌렀다. 그러자 웃음기 있던 그의 얼굴에 한순간에 분노가 일었다. “어머 내가 모르고 건들였네. 고의는 아닙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서일이 못참겠다는 듯 달려왔다. “왕비님! 조심 좀 하십시오!”“그럼 당신이 하던가!” 원경릉이 서일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서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왕비님께서 계속 하시지오……”우문호는 서일과 탕양을 번갈아 보더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가보거라. 오늘 밤은 왕비가 내 곁을 지킬것이다.” 라고 말했다. 탕양과 서일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물러났다. 원경릉은 침상 옆에 꿇어 앉아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저들이 당신 걱정을 엄청하네요.”“본왕이 그들이 먹고 자게 해주니까.”원경릉은 고개
원경릉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보았다. “무슨 뜻이죠?” 우문호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는 왜 기왕이 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원경릉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직감” 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직감을 그리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황실 안에 흐르는 기운과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데이터에 근거하면 기왕이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이 됐다. 우문호는 그녀를 훑어보더니 “직감은 무슨 얼어죽을. 그냥 말하거라.”라고 했다. “진짜 직감이 그렇다는 건데.”원경릉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그녀는 우문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 하는 것을 보고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주워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봤자 그녀에게 득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우문호가 원경릉이 이런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웠다. 역사책을 많이 본 사람의 입장에서 지금 이 시국은 굉장히 복잡하고 예민하다. 기왕의 장자이며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황제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기왕은 이 기세를 몰아 조신(朝臣)들을 회유해 태자의 직위를 반드시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기왕의 세력으로는 우문호를 쉼게 제거할 수는 없다. 다른 친왕들도 태자가 되려는 야심은 갖고 있지만, 기왕이 무서워 우문호를 방패삼아 멀리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우문호는 원경릉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으로 그녀가 기왕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신경쓰였다. 우문호는 정후부(静候府)에서 시국 논의가 적지 않게 일어나겠구나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정후부에 대한 혐오감이 짙어졌다. 원경릉은 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최근에 많은 일들을 겪은 그녀는 머리가 땅에 붙기만 하면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얽혀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추녀!” 침상 위에 우문호가 소리쳤다.저런 예의없는 사람하고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원경릉은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머리 위로 베개가 떨어졌다.
올해 서른 다섯인 탕양은 젊었을 때 풍월장(风月场)에서 이름을 날렸고, 이후로는 우문호를 따라 전쟁터를 다니며 함께 생사를 넘나든 사람이다. 이 건장한 청년이 지금 작은 여인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다. ‘거기라니……? 왕비는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인건가?’“그렇지?” 원경릉은 그의 벙찐 얼굴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탕양! 이 자식이 뭔 헛소리를 하는거야!” 안에서 우문호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기와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탕양은 요강을 들고 달아났다. 원경릉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우문호의 얼굴은 물감을 짜둔 팔레트처럼 파랗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코 언저리는 희끗희끗 했다.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차 당장이라도 원경릉을 집어 삼킬것 같았다. 원경릉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탕양이 당신에게 치료 못한 상처가 있다고 했는데.”“걔가 헛소리를 한거야!” 우문호가 이를 악 물고 말했다. 원경릉은 이런 그를 볼수록 탕양의 말에 확신이 생겼다. 원경릉이 의사생활을 할 때 자신의 병을 숨기려고 하는 환자들을 종종 본적이 있었다. “의사에게 아픈 곳을 숨길 이유가 없어요.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상처가 점점 심해지며 다른 곳으로 감염되거나 고열로 이어질 수도 있고 위독할 시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어요.”원경릉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우문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원경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말 뜻은 치료하지 못한 상처가 확실히 있다는 소리네요?”“본왕이 너를 죽여버릴거야!” 우문호는 원경릉의 교활함에 치를 떨며 고함을 질렀다. “나를 죽이기 전에 일단 회복부터 하시죠.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지 봅시다.”“까불고 있어!”“까분김에 실컷 까불겠습니다. 탕양이 말하길 상처에 이미 고름이 잡혔다고 했어요. 만약 상처가 감염되면 정말 죽을수도 있다구요.”“꺼져!”“한번 보고 꺼질게요.”“본왕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원경릉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보고싶어서 보는거야? 나도 싫어!’하지만 탕양의 말대로 감염이 심해 그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녀도 태상황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의 상처는 다행히 대퇴부의 동맥을 피해 스쳤기에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처의 깊이가 깊어서 지혈이 필요해 보였다. 상처 부위에 끈적한 분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문호 스스로 지혈가루를 부은 것 같았다. 그녀는 슬쩍 우문호를 쳐다보았다. 우문호는 부끄러움에 주먹을 휘둘렀고, 그녀는 재빠르게 머리를 뒤로 젖혔다. 우문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봉합해야해요!” 원경릉은 소독을 마친 원경릉이 말했다.“안돼!” 우문호는 완강히 거부했다. 우문호는 ‘봉합’이라는 두 글자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좋아 그렇다면” 원경릉이 약상자를 집어들고 마취연고를 찾아내더니 말했다. 그럼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지혈약을 바를게요. “잽싸게 해라!” 우문호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마취연고를 바른 원경릉은 고개를 들고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안 아프죠?”원경릉이 약을 바른 뒤로는 확실히 전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호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누가 안아프대? 넌 네가 마법이라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원경릉은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바로 바늘을 꺼내들었다.“마취했으니까 한번 볼게요.” 원경릉은 바늘에 실을 꿰면서 우문호에게 말했다. “원경릉!” 우문호는 분노했다. 지혈 약이라더니! 이 미친여자가 나를 또 속여? 그는 봉합을 하는 동안 어찌나 이를 꽉 물었는지 잇몸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다 됐다. 다 봉합해서 꿰맬 필요 없을 것 같고, 안에 고름만 뽑아내면 될 것 같네요.”원경릉이 말했다. 우문호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를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사실 더 이상 봉합이 끝났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원경릉은 마취약을 바른김에 빨리 손을 써야 했다. “쾅!” 갑자기 문이 열렸다. 커튼이 회오리처럼 나부꼈고, 그 곳에는
원경릉은 엎드린채 잠이 들었다. 그녀는 칼을 든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살기 위해 몸을 숨겼다. 꿈 속에서 그녀는 쫓기다 못해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었고, 그녀가 돌아보자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 목 아래로 느껴졌다. 그녀는 질끈 감을 눈을 떴고 그 앞에는 흉악한 얼굴의 우문호가 보였다. 우문호가 칼을 들자 얼굴에 피가 튀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잠에서 깨었다. 잠에서 깨고 보니 원경릉의 얼굴이 축축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니 온통 물이 묻어 있었다. 잠에서 깬 그녀 앞에는 물병을 들고 있는 우문호가 보였다. 물병에 주둥이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목이 마르면 마시라고 둔 물병을 나에게 붓다니.’그녀는 성심성의껏 그를 치료해주고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올라오는 화를 꾹 누르며 연민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타깝네요. 다른 친왕들은 대장부처럼 전장에서 무수히 적들을 섬멸하셨는데, 당신은 고작 나같은 여인에게 물이나 붓는걸 보복이란답시고 하다니.”우문호는 화가난 눈빛으로 물병을 던졌다. 그 물병은 원경릉 쪽이 아닌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병이 미끄럽기도 했고, 아픈 우문호가 무슨 힘이 남아서 물병을 던졌겠나. 물병이 콧등을 내리치자 우문호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원경릉은 씰룩거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물병을 집어들어 밖으로 나왔다. “하하하하!” 문밖으로 나온 원경릉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안쪽에서는 우문호가 콧등을 감싸고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아오! 열받아!” 밖으로 나오니 주홍빛 구름 사이로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문 밖을 지켰던 서일은 문 옆 구석에 쪼그리고 잠이 들어있었다. 원경릉의 웃음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왕비님…… 괜찮으십니까?” 어찌나 웃었던지 원경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서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원경릉이 탕양을 따라 본관으로 갔다. 가는길에 탕양은 그녀에게 목여태감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녀가 제멋대로 태상황의 병을 치료한 사실을 알게 된 황제가 노하여 목여태감을 시켜 사람을 데리고 원경릉을 찾아가라고 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궁안에 규칙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속으로 당황스러웠다. 사실 궁 안에서 그녀의 신분은 초왕비일뿐, 어관도 어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목여태감은 엄숙하게 본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서며 담담히 말했다. “초왕비, 황제님이 궁에 들라하셨습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태상황께서는 어떠신가요?” 라고 물었다.“태상황께서 중독증상이 있으셔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목여태감은 낮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떨구었다. ‘병세가 나빠지셨구나.’ 이렇게 될줄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황제가 그녀를 불러 책임을 묻겠는가. 만약 원경릉이 태상황을 치료한 후, 태상황의 병이 호전됐다면, 이렇게 책임을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중독이라니.목여태감을 따라 본관 밖으로 나오니 시위국의 구사도 그 곳에 있었다. “왕비님 마차에 오르시지오.” 마차를 타려고 보니 아래에 발 받침이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마차에 올라탔다. 불연듯 그녀의 뇌리 속에 우문호가 스쳤다. 그녀는 마차 안에 장막을 걷어 올리고 시위국 구사를 향해 소리쳤다. “탕양에게 할말이 있소!” 구사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왕비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게 좋소. 일단 궁으로 들어가시지오.”원경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쓸데없는 일? 그게 무슨 뜻이죠?”“자기의 사리를 채우기 위해 왕야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오.”구사가 말했다. 원경릉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르신께서 탕양에게 왕야가 열이 나는지 잘 확인하고, 만약 열이 난다면 왕야의 침상 머리 맡에 놓은 약을 한알 먹이면 나을 것이라고 전해주시지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장막을 확 내렸다. 그녀는 이 곳은 시기와
원경릉은 부인할 수 없었다. 명원제가 묻는데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것 같았다. “부황의 물음에 답을 드리자면, 맞습니다.”“어디서 의술을 배운 것이냐?”명원제가 물었다. 원경릉은 명원제가 이 질문은 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궁에서 호출이 있었을 때부터 생각을 해둔 대답이 있었다. “부황의 말씀에 대답을 하자면, 소인이 어릴적 강호(江湖)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여인이 소인을 매우 예뻐하여, 소인에게 의술을 알려주었습니다.”“얼마나 배웠느냐?”“일 년 정도 입니다..”“스승의 이름이 무엇이냐?” 명원제가 그녀에게 가까이 걸어와 캐물었다.“모르옵니다. 사부님께서 이름을 밝히신 적이 없습니다.”설득력이 전혀 없는 원경릉의 말에 황제는 화가 났다. “태상황의 병을 치료하라고 다섯째가 시킨게냐?”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왕야는 모르는 일입니다.”“아니란말야?” 명원제가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태상황님에게 처음으로 약을 드린게 다섯째와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인데, 그가 어찌 모를 수 있다는 말이냐?” 원경릉은 이 일에 우문호를 끌어드리고 싶지 않았다.“정말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소인이 태상황님께 드린 약은 크기도 작고 입안에 넣으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약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왕야는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사실 원경릉이 우문호가 시킨 일이라고 말을 했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자식인 우문호를 그리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경릉은 우문호를 끌어드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우문호가 못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공정한 처우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다. “이 약 맞지?” 명원제는 약 한 병을 꺼내놓고 원경릉에게 물었다. 원경릉이 고개를 들어 보니 설저환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 “이 약이 무엇에 쓰이는가? 누가 정제하고, 누가 너에게 준거냐?”“이 약은 빠른 효과를 내는 구심단(救心丹),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개혁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나라가 이미 망가진 뒤라, 보수파들은 북당이 더는 흔들림을 견딜 수 없다고 여겨, 더 이상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국공은 소복을 부상으로 임명했고, 소복은 부상이 된 후, 온갖 수단으로 보수파를 하나 하나씩 무너뜨렸다.그는 협박, 욕설, 생떼, 무례, 끈질긴 설득 등 다양한 방식으로 보수파를 공략했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돗자리를 말아, 상대의 대문 앞에 깔고는, 저녁엔 문 앞에서 잠을 청하고, 낮에는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북당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라고 비난까지 했다.그렇게 보수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휘 형과 형수가 대주에서 돌아왔다. 그는 드디어 애써 노력한 끝에, 그들에게 기대에 부응할 만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의 길은 여전히 멀었다. 가난 때문에 발생한 난장판은 아직도 평정되지 않았다.휘 형과 형수는 사실 그의 혼례를 치르기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그는 이제 황후를 책봉해야 할 시기였고, 황후 후보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바로 숙왕부에서 지낸 적 있는 소복의 딸이었다.소복의 딸이 원래 무슨 이름이었는지, 그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복이 부상 자리에 오른 뒤, 딸의 이름을 소봉으로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소복의 꿈은 언제나 직설적이었다. 소봉의 이름은 '소가에서 나온 봉황'이라는 단도직입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소봉은 아버지 소복과는 달리 성격이 반듯하고 강직했다. 당시 그는 온갖 일로 정신이 없어 남녀 간의 감정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모의 감정보다 그에게 나라가 더욱 중요했었다.하지만 황제로서, 그도 후사를 마련하는 것이 북당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그에게 사모의 정에 대해 조금 느낀 적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소가의 셋째 딸, 소낙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이다.다만 그도 그녀의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나중에야 소낙연이라고 자칭했던 여인이, 사실 그의 형수인 라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시절
그렇게 그들은 만취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침대 삼으며, 마치 처음 전장에 나섰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뿐을 느꼈다.그 시절에는 전쟁이 치열해, 종종 땅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곤 했다. 여섯째는 당시에 항상 설사를 했었다. 셋이 몰래 전장에 나가려 했기에, 선생과 형수를 속이기 위해, 스스로 배탈을 자초한 후, 돈을 조금 챙기고는 전장으로 향했었다. 전쟁터에서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들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가난을 제외하고,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적군이 승전가를 부르며 전우를 죽이고, 나라를 침탈할 때, 그들은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죽음에 관해 생각한다고 해도, 죽더라도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그들은 그렇게 잠에 들었고, 꿈속에서 막 즉위하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났다.숙왕부도 여전히 그대로였고, 적성루는 인파로 붐볐으며, 전쟁으로 인해 찢어지게 가난했다. 휘 형과 형수는 대주로 빚을 갚으러 갔다. 북막과의 전쟁을 위해 대주의 30만 대군을 빌려왔지만, 갚을 돈이 없어 휘 형을 인질로 넘겼다.휘 형이 떠난 후, 조정은 서출의 어린 새 황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그들은 조정에서 대신들과 첨예하게 대립해야 했고, 매번 언쟁 후에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어서방에 돌아가 주저앉곤 했다.즉위할 때 휘 형은 최선을 다하면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그래서 그도 그렇게 믿었지만, 막상 황위에 올라보니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있는 힘껏 버텨도 소용없었다.하지만 퇴로 또한 없었다. 휘 형이 말했듯이, 퇴로가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길이었다. 두 눈 질끈 감고 힘껏 돌진하다 보면, 결국 승리하게 된다.다행히 조정에 그들을 도와주는 이들도 있었다. 장 대인과 소복이 큰 도움을
그들은 사생활을 모조리 보여주는 것 같아, 팬들이 따라오는 것을 막았다.하지만 팬들은 놀랄 만큼 열렬한 애정을 보이며 기어코 그들 뒤를 따랐다.그 모습에 다들 처음엔 못마땅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이해하기로 했다. 모두 예전에 많은 사람이 따르고, 시중을 받으며 전성기를 가졌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했다.어쨌든, 그들은 지금 행복하게 차를 몰며 독고 도로를 달리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팬들도 그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다투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농담을 주고받고, 무술을 연습하는 모습 등, 그들의 사소한 순간들 모두 영상으로 편집되어 올라갔다 .그리고 곧 사람들은 퇴직 여행 계정에 한 명이 아닌, 세 명이 함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상에 등장한 사람은 '십팔매'라 불렸는데, 많은 네티즌이 그 이름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얼굴에 약간의 여드름 자국이 있고, 항상 무표정으로 자기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노인은 '여섯째'라 불렸다. 비록 엄숙해 보이지만, 실은 장난기가 많아 두 사람을 몰래 놀리고는 입을 막고 웃기도 했다.항상 핸드폰으로 독서하는 노인은 '주대'라고 불렸다. 박학다식하며, 말할 때마다 고사성어를 인용해, 십팔매와 여섯째가 싸울 때 몇 마디로 갈등을 풀어낼 정도로 인품이 뛰어났다.팬들은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어릴 때부터 함께해왔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함께 여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깊이 감동하였다.그렇게 어느 날 밤, 그들은 야외에서 술을 마시고 반쯤 취한 채, 바닥에 누운 채로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 장면 역시 팬들에게 촬영되었다.늘 털털한 십팔매는 두 손을 머리 뒤에 괴고 은하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정말 많이 늙었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까?"여섯째가 그의 머리를 한 대 가볍게 쳤다."길 위에서는 불길한 말 금지네."십팔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