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은의 안내하에 두 사람은 예약해둔 자리에 도착했다. 어준휘는 아직이었다.운지은과 곽정희는 각각 음료 한 잔씩 시켜 조용히 기다렸다.그로부터 몇 분 뒤, 여준휘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화려한 옷차림을 한 그는 마치 건달 같았다.“윤지은, 오랜만이야. 점점 더 예뻐지네.”윤지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곽정희를 바라봤다.여준휘는 곽정희를 알아보지 못했다.실시간으로 어두워진 곽정희의 안색을 보며 윤지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봐 봐.”여준휘는 껄렁껄렁한 얼굴로 곽정희를 바라봤다.“왜 이렇게 낯이 익지? 하지만 어디서 만났던지 생각이 안 나.”곽정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리고 윤지은은 버럭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이 사람 곽정희라고 해. 네 약혼녀. 그런데 알아보지 못하네?”그 말을 들은 여준휘의 안색은 단숨에 어두워졌다.‘곽정희! 정말 곽정희잖아?’‘그런데 어떻게 윤지은과 함께 있지?’여준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두 사람, 어떻게 같이 있어?”윤지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얌전히 앉기나 해.”윤지은은 곽정희를 바라봤다.“정희 언니,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곽정희는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고는 여준휘를 바라봤다.몇 년 만에 만난 여준휘는 변화가 무척 컸다. 너무 커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하지만 그동안 곽정희가 여준휘에 대한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그녀는 매일 여준휘가 성공해서 돌아와 자신과 결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건 여준휘의 매정한 배신이었다.곽정희는 슬픔을 숨길 수 없었다.“여준휘, 너 정말 나를 버린 거야?”“버린 게 아니라,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 나랑 너를 봐 봐. 우리가 어울리기나 해?”여준휘는 귀찮은 듯 말했다.결국 곽정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그럼 왜 말하지 않은 건데? 미리 말했으면 너한테 매달리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
윤지은의 눈에는 슬픔 대신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자기가 애초에 왜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을 좋아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곽정희는 아직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지은 씨, 미안해요.”“나한테 미안할 거 뭐 있어요? 잘못한 건 그 인간인데. 사과해도 그 인간이 해야지. 언니도 피해자예요.”곽정희는 그 말에 더 슬피 울었다.윤지은은 다급히 휴지를 꺼내 곽정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됐어요. 울지 마요. 그런 쓰레기 때문에 울 가치가 없어요. 언니가 울다가 죽거나, 눈이 멀어도 그 인간은 모를 거예요.”“두 사람 말이 맞아요.”곽정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물을 닦았다.그러다 한참 뒤 뜬금없이 말했다.“지은 씨, 수호 씨, 두 사람은 혹시 여준휘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혹은 연락처라도 알아요?”나는 문뜩 곽정희의 의도가 궁금했다.“설마 찾아가려고 그래요?”“찾아가려는 건 맞지만, 매달리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만나서 직접 물어봐야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윤지은은 나를 바라봤고, 나 역시 윤지은을 바라봤다.우리는 곽정희가 여준휘를 만나게 해도 될지 망설였다.그러다 윤지은은 끝내 곽정희의 결정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내가 두 사람 만나게 해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 인간은 잡을 가치가 없다는 걸 알아둬요.”“네. 알아요.”윤지은은 결국 여준휘에게 전화했다.“여보세요.”[이게 누구야? LC그룹 공주님 아니야? 오늘 어떻게 나한테 전화를 다 했어?]여준휘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무례가 섞여 있었다.윤지은 역시 그런 여준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우리 만나. 만나서 할 말이 있어.”[오호. 좋아. 바라던 바야.]탁!윤지은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여준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 윤지은은 한순간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뒤 윤지은은 여준휘에게 주소를 보냈다.“됐어요. 약속은 잡아 뒀으니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 나는 여준휘가 그동안 했던 짓을 곽정희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그걸 들은 곽정희는 눈이 휘둥그레서 침대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준휘 씨가... 어쩌다가 그렇게 됐지?”곽정희는 자기 귀를 의심했고, 내가 한 말을 믿지 못했다.그녀의 기억 속에 약혼자는 약간 어리숙하지만 그녀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한 여준휘는 낯설다 못해 그동안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결국 나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했다.“정희 누나, 사람은 누구나 변해요. 특히 남자는 더더욱 그렇고요. 여준휘 같은 남자 때문에 속상해할 필요 없어요. 그 자식은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에요.”“솔직히 말하면, 그날 밤 같이 식사할 때 여준휘를 만났어요. 그 자식은 또 다른 여자한테 찝쩍대고 있더라고요.”“내가 누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포기할 땐 지은 씨처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예요.”곽정희는 얼굴을 꼭 감쌌지만 여전히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슬퍼요. 너무 괴로워요.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주체가 안 돼요.”“알아요. 나도 누나 마음 이해해요. 울고 싶으면 울어요.”슬피 우는 곽정희를 보니 내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그때 곽정희는 내 품에 안기더니 끝내 침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그 울음소리에 다가온 윤지은은 내가 곽정희한테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노려봤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이번에는 저랑 상관없어요. 하... 정희 누나가 마음을 추스르면 그때 설명할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 품에서 곽정희를 빼앗아 갔다.“나가!”결국 나는 윤지은에게 쫓겨났다.윤지은이 나와 곽정희가 스킨십을 하는 걸 꺼린다는 걸 알기에 나는 순순히 방에서 빠져나왔다.‘하.’‘역시 영원한 비밀은 없다니까.’곽정희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니 문뜩 유미 사모님도 이랬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 네.”나는 곽정희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곽정희는 침대에 앉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 모습에 놀란 나는 어쩔 줄 몰라 물었다.“정희 누나,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수호 씨, 아무리 찾아봐도 약혼자를 찾지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내가 버림받았나 봐요.”곽정희는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뜨렸다.가슴 미어지도록 유는 곽정희를 보니 너무 마음 아파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정희 누나, 누나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앞으로 분명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여준휘 그 개자식은 그렇게 잘해줄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곽정희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안 찾을래요. 찾기 싫어졌어요. 다시 산으로 돌아갈래요.”“그럼 혼자 평생 산속에서 살 거예요? 정희 누나, 혹시 산에서 나와 도시에서 발전할 생각은 없어요?”산속에서 사는 게 여유롭고 마음 편하겠지만, 혼자 그곳에서 지내는 건 분명 심심하고 외로울 거다.게다가 곽정희도 이제는 어린 나이가 아니라 그런 곳에서 청춘을 낭비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하지만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곽정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저었다.“아니요. 도시에 오는 건 싫어요. 도시에는 유혹이 너무 많아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하하. 혹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 넘는 짓을 할까 봐 그래요? 정희 누나, 사실 유혹도 사람 가려요. 어떤 사람은 상대가 유혹하지 않아도 실수하거든요.”“하지만, 누나는 아무리 유혹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같아요. 산속에서 지내는 게 불편하고 위험한 것 같아서 그래요. 오랫동안 서로 대화할 사람도 없이 그런 곳에서 혼자 지내면 얼마나 심심해요.”“됐어요. 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여기 남아서 뭐 해요?”곽정희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지, 내가 제안하는 것마다 머리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러다 얼마 뒤,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수호 씨, 사실 내가 마음속에 계속
윤지은은 겉으로는 싫은 티를 냈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를 걱정했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 물을 따르는 윤지은을 바라봤다. 하지만 윤지은은 그 물컵을 나에게 건넸다.“저한테 주는 거예요?”나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그러자 윤지은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투덜거렸다.“마실 거야 말 거야? 안 마시면 됐어.”“마실게요. 마셔요. 하지만 손이 불편해서 그러는데 먹여줄 수 있어요?”내가 싱긋 웃으며 묻자 윤지은은 얼른 물컵을 들어 내 입가에 건넸다.나는 윤지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은 채 물을 마셨다.그 사이 윤지은의 얼굴은 발그스름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상 나를 받아준 거나 다름없다.나도 그 덕에 드디어 윤지은의 진심을 알아차렸다.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는 게 틀림없다.그걸 확인하고 나니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입안으로 삼킨 물이 달게 느껴졌다.물 한 잔을 다 비우자 윤지은은 컵을 내려놨다.“됐어. 이제 가.”“어디로 가라는 거예요?”“네 형수한테 가.”“가기 싫어졌어요.”“왜?”“여기 있고 싶어요. 여기가 더 널찍하거든요.”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그 순간 윤지은의 눈에 웃음기가 언뜻 지나갔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네 형수가 기분 나빠하면 어쩌려고? 얼른 가.”“형수한테는 잘 설명할 거예요. 제발 내쫓지 마요.”윤지은은 실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제발이라고 한 거야?’“다음부턴 그러지 마. 안 그러면 서나연더러 너를 내다 버리라고 할 거야.”“그렇다는 건 동의한다는 거죠? 제가 지금 당장 형수한테 전화할게요.”말을 마친 나는 윤지은이 거절하기도 전에 형수에게 전화해 며칠 동안 출장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다.형수는 나를 믿기에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형수와의 통화가 끝난 뒤 나는 다시 윤지은의 옆으로 다가갔다.“오늘 밤 저는 어디서 자요?”“난 아직 남아도 된다고 동의하지 않았거든.”“네? 형수한
“뭘 걱정해?”백연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백연우는 걱정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걱정됐다.방금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려 아직 나한테 화나 있을 텐데, 이곳에서 나와 백연우가 이러는 걸 들키면 아마 처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지은 씨가 저를 잡아먹을까 봐 그래요. 됐어요. 얼른 가요. 저 정말 괜찮아요.”“그럼 뽀뽀해 줘.”백연우는 내 팔을 잡은 채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백연우는 자기가 원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다.그걸 알기에 나는 결국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뽀뽀했다.그 시각 유미 사모님도 옆에 서 있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내가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사모님은 오히려 내가 아직도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때문에 나는 이제 변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대범하게 행동했다.내 뽀뽀를 받은 백연우는 만족스러운 듯 유미 사모님을 데리고 떠나갔다.거실에 나와 봤더니 윤지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나는 얼른 헤실 웃으며 윤지은 옆에 다가가 그녀에게 과일을 건넸다.“사과 먹고 화 풀어요.”“안 먹어.”“이것 봐요. 저 지금 다친 손목으로 사과를 가져다준 거예요. 제 사정을 봐서 먹어 줘요.”나는 일부러 불쌍한 척 윤지은의 동정심을 유발했다.하지만 윤지은은 오히려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꺼져!”“싫어요. 사과 먹고 화 풀면 꺼질게요.”“안 먹어!”“그럼 먹여 줄게요.”“꺼지라, 싫어!”“안 꺼질 건데요. 싫은데요...”나는 일부러 얄밉게 말했다.내 말투에 화가 풀린 윤지은은 어이없는 듯 되물었다.“정수호, 넌 체면도 없어?”“없어요.”“너...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졌어?윤지은은 또다시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지은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지은 씨 말대로 제 목숨은 지은 씨 거예요. 지은 씨가 저를 욕하는 건 당연해요.”“방금 제가 말실수했다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잖아요. 만약 용서하지 않으면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