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우는 내 말에 이내 헤헤 웃었다.“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내가 왜 그런 데로 돌아가냐? 싫어.”“그럼 소파에서 자. 앞으로 나랑 잘 생각도 하지 마. 젠장. 뭔 꿈을 그렇게 살벌하게 꿔? 그것도 모자라 몸은 왜 더듬는 건데? 변태처럼. 대학 다닐 때는 너한테 이런 취미 있는 줄 몰랐는데?”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더니 스트레스 쌓였나 봐.”“쌤통이다. 그날 호텔에서 왜 아무 짓도 안 했는데?”“누구는 뭐 싫어서 안 한 줄 알아? 무서워서 그랬지.”“무서운 것도 많다. 그래서 여태껏 총각 딱지도 못 덴 거야. 저리 가. 화장실 가서 직접 해결해.”민우의 그곳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만약 상대가 여자라면 눈이 즐겁기라도 할 텐데, 남자라 아무 감각도 없는 건 물론 심지어 안구 테러까지 당한 것 같았다.민우도 괴로웠는지 얼른 대답했다.“그래. 너 먼저 자.”말을 마친 민우는 얼른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했다.겨우 침대를 혼자 독차지한 나는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하, 민우 그 자식은 왜 데려와서 생고생인지. 후회돼 죽겠네.’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전에 돗자리를 샀던 게 생각나 얼른 트렁크를 뒤졌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다가 겨우 돗자리르 찾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이부자리도 펴주었다. 이따가 민우가 돌아오면 그 위에서 자게 할 생각으로.몇 분 뒤, 민우는 돌아왔다.“수호, 너 이게 무슨 뜻이야?”나는 민우를 흘긋 봤다.“네가 만지는 게 싫어서 그래. 바닥에서 자. 아니면 거실에서 자든가. 네가 선택해.”민우는 화도 내지 않고 혼잣말로 툴툴거렸다.“여기 여자애도 같이 사는 거 아니야? 내가 거실에서 자면 그 애가 불편해서 어떡해? 됐어. 바닥에서 잘게. 여기서 자는 것도 내가 살던 곳보다는 나으니까.”민우는 말을 마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나 역시 겨우 편히 잠들 수 있었다.다음 날, 우리는 함께 출근했다.요즘 직원들은 유독 마음이 잘 맞아 모두 사장님 대
모든 사람이 일제히 기척이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 자리에는 꽥꽥 소리 지르는 한은솔이 서 있었다. 이제는 아예 숨기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머리를 알록달록 염색하고 불량소녀처럼 차려입고 말이다.한은솔은 모태진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왜 내 전화 안 받았어? 무슨 뜻이야?”모태진은 얼른 다가가 말했다.“내가 문자 보냈잖아.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찾아오지 말라고 하면 내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나랑 자고 이제 와서 꽁무니 빼시겠다?”한은솔은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들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키웠다.그 순간 모태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언제 너랑 잤다고 그래? 너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한은솔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그 말 당신 당신 동료들은 믿어?”모태진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내가 두려울 게 뭐 있어? 하지도 않은 일은 절대 인정 못 해.”“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러면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어? 가게 사람들 모두 봤을 거잖아. 나한테 특별하게 대해주고, 나를 위해 와이프랑 싸우기까지 했으면서. 돌아가면서 물어봐. 내 몸을 노린 게 아니면 왜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 왜 아내한테 밉보이면서 내 편을 들어줬을까?”한은솔의 말에 모태진은 말문이 막혀 미간만 찌푸릴 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모태진도 한은솔에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한은솔을 건드린 적은 없다. 그도 호감과 사랑이 다르다는 걸 아니까.상대를 건드리는 순간, 모태진의 가정은 분명 깨질 거다. 때문에 그는 늘 마지막 선은 지켜 왔다.하지만 모태진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누가 믿을까? 그가 한은솔을 얼마나 특별하게 대했는지 모두가 봤는데. 심지어 한은솔 때문에 아내와 크게 싸우기까지 했다.더욱이 남녀가 한 방에서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건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한은솔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모태진을 휘둘렀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한
일이 이 지경이 되자 한은솔은 끝내 자기 진짜 목적을 말했다. 모태진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둘째치고, 그녀의 진짜 목적은 화인당을 물 먹이려는 거였다.사람들이 쑥덕쑥덕 얘기하자 나는 결국 한은솔에게 다가가 말했다.“그 노랑머리 자식이 이러라고 했어? 아니면 네가 자발적으로 그 자식을 도운 거야?”내 말에 한은솔은 눈알을 굴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네.”나는 더 이상 한은솔을 뭐라 하지 않고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도덕의 잣대로 너한테 강요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길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 자식이 너를 때리고 욕할 때 누가 널 지켜줬는지.”“태진 선배가 나서주지 않았으면 넌 그동안 계속 그 자식한테 시달렸을 거야. 태진 선배가 너한테 넘어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모함하고, 남의 인생 망치면 안 되지.”한은솔은 내 말에 펄쩍 뛰었다.“내가 언제 모함했다고 그래? 헛소리 지껄이지 마. 아하, 이제 알겠네. 같은 화인당 사람이라고 저 쓰레기를 감싸주려는 거지?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어. 사람들한테 누가 잘못했는지 시비를 가리라고 해보자고.”한은솔은 말하면서 바로 문밖으로 나가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모태진이 얼른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좋아. 배상할게. 이제부터 난 화인당 직원이 아니야. 여기 사직서도 있거든.”“수호 씨가 사장님 대신 가게 봐주고 있으니 이 사직서는 수호 씨한테 줄게요.”“불만 있으면 나한테 풀어.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모태진은 가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직서를 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나는 그 사직서를 받고 싶지 않았다.“사직서는 도로 가져가요. 이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사장님이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요.”난 솔직히 모태진이 일을 그만두길 바라지 않는다. 물론 그가 한은솔의 일을 잘못 처리한 건 맞지만, 그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건 모태진한테 너무 불공평하다.하지만 모태진은 기어코 사직서를 내 손에 밀어 넣었다
민우는 이내 대답하고 두 사람을 따라 나섰다.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자 나는 얼른 직원들더러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직원들은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 제 할 일을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태진의 일을 수군대고 있었다.그걸 모니 내 마음이 무거워 났다.한편, 모태진은 한은솔을 데리고 조용한 곳에 가더니 간곡히 말했다.“난 네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 네가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너 이러는 거 자신을 망치는 것밖에는 안 돼.”한은솔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 나를 위한다면서 왜 정수호 한마디에 나를 버렸어요?”“정수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불가능해. 난 가정이 있고, 아내가 있고 아이도 있어. 난 그저 너를 동생으로 생각했지, 다른 마음 품은 적 없어.”짝!한은솔은 모태진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윽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다른 마음 품은 적 없다고? 그럴 거면 나한테 왜 잘해줬는데? 동생? 누가 동생 하고 싶대? 나 예쁘잖아, 당신 그 호랑이 같은 와이프보다 낫잖아.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런 여자 때문에 나한테 흔들리지 않는 건데?”모태진은 혀끝으로 맞은 볼기짝을 꾹 밀더니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뭐가 됐든 내 아내는 나를 위해 아이도 낳아줬고, 엄청 고생했어. 그동안 내 뒷바라지하느라 쉽지 않았을 거야. 내 마음은 여전해, 너한테 품지 말아야 할 마음 품은 적 없어.”한은솔은 결국 화가 치밀어 모태진에게 달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그때 노랑머리 놈이 깡마른 남자 한 명을 데리고 걸어왔다. 두 사람을 보는 순간 한은솔은 이내 전전긍긍했다.“해진 오빠.”주해진, 그는 김진호의 사촌 형인데, 이 바닥에서 유명한 깡패다. 게다가 겉모습도 딱 신분만치 불량하다.김진호는 본인이 다친 뒤 곧바로 사촌형 주해진한테 전화해 복수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안명훈더러 그를 도우라고 했다.안명훈도 주해진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 이 기회에 잘 보일 심산이었다. 때문에 먼저 자기 여자 친구를 내세워 가게에게 가서 소란
곧이어 안명훈은 모태진에게 달려가 그의 바지를 벗기려 했다. 모태진은 그걸 박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둥댔다.그때 안명훈이 부하 녀석들에게 소리쳤다.“다들 뭣 하고 있어? 얼른 와서 도와주지 않고!”똘마니들 몇 명이 그 말에 다급히 달려가 모태진을 바닥에 내리누르더니 사람들 앞에서 그의 바지를 벗겼다.그때 주해진이 냉소를 띤 채 한은솔에게 말했다.“가서 위에 앉아.”한은솔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전전긍긍했다.“해진 오빠, 사람도 많은데...”짝!주해진은 귀찮다는 듯 한은솔의 뺨을 내리쳤다.“가라면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한은솔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찍소리도 못한 채 모태진에게 다가갔다.모태진은 놈들에게 강제로 벗겨진 채 아무런 존엄도 없이 잡혀버렸다. 그 순간 한은솔은 선량하기만 하던 그의 눈에 분노와 굴욕이 서려 있는 걸 발견했다.한은솔은 알고 있었다. 모태진이 이렇게 된 게 모두 자기 때문이란 걸. 때문에 너무 미안해 모태진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뭘 꾸물거려? 서둘러.”안명훈은 옆에서 재촉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녹화까지 했다.한은솔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난 네 여자 친구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네까짓 게 여자 친구? 굴려질 대로 굴려진 걸레 주제에, 누가 널 신경이나 쓸 줄 알아? 네가 나한테 매달렸잖아. 그러니 쓸모 있는 짓이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내 앞에서 꺼지던가.”한은솔은 절망에 빠졌다.그때 모태진한테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문자를 받은 한은솔은 홧김에 다시 안명훈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안명훈은 그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예전보다 더 모욕했다.이 순간이 되어서야 한은솔은 그때 그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가 소용 있나?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그녀의 선택이고,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었는걸.만약 지금 안명훈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안명훈은 한은솔이 더 싫어하는 일을 시킬 게 뻔하다. 그때가 되면 한은솔의 자존심은 더 바닥으로 처박힐 거다.결국 한은솔은 마지못해
민우는 모태진을 데리고 가게로 돌아가려 했지만, 모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우를 밀쳐내고는 도망쳤다.민우는 모태진을 쫓아가려 했으나 결국 따라잡지 못해 다시 터덜터덜 가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나를 잡아끌더니 모태진이 겪은 일을 설명해 줬다.그걸 듣는 내내 나는 마음이 무겁고 화가 치밀었다.평소 그렇게 성실하던 사람인데, 그런 모욕을 당하고 자존심이 짓밟혔으니 분명 괴로울 거다.나는 얼른 모태진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상대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 순간 모태진한테 무슨 일이라도 났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에 나는 마음이 더 착잡했다.“젠장.”나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무엇보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사장님이 나한테 화인당을 맡겼는데, 나는 반드시 정신을 곤두세우고 안민혁과 주해진이 또 소란 피우는 걸 막아야 했다.“지금부터 우리 둘이 가게를 계속 지키자. 만약 놈들이 또 와서 소란 피우면 그땐 나도 목숨 걸고 싸울 거야!”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나는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일을 크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하지만 이번에 놈들이 모태진을 그렇게 모욕한 건 정 사장님을 모욕하고, 화인당을 모욕한 거나 다름없다.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울 거다.그때 민우가 귀띔해 줬다.“아니면 먼저 소여정 씨한테 전화하는 건 어때? 소여정 씨가 나서 주면 더 가망 있잖아.사실 나도 그럴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여정에게 직접적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이든 소여정한테 부탁하면 정태곤이 나를 의심할 거다. 게다가 계속 남한테 의지하면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때문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아직은 아니야.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그때 얘기하자.”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나도 너랑 같이 지키고 있을게. 누가 또 소란 피우러 찾아오면 그땐 얼굴을 박살 낼 거야.”우리는 오후 내내 가게에서 지키
사실 처음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심지어 한은솔이 나이 든 오연화보다 낫다고 여겼다.하지만 많은 일을 겪고 난 뒤에야 사람은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한은솔은 젊고 예쁘지만 목적이 너무 분명하고, 일이 터지면 자기밖에 모른다.그에 반해 모태진과 함께 고난을 겪은 조강지처는 바로 눈앞의 오연화다.게다가 모태진이 왜 한은솔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끝끝내 아내를 배신하는 일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문 닫을 시간이 되었지만 모태진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었다.“형수님, 우선 돌아가세요. 집에 아이도 있잖아요. 태진 선배한테서 연락이 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오연화는 끝까지 돌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방법이 없어 모태진의 연락을 받으면 꼭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나갔다.가게 직원들도 하나둘 떠나갔지만 나와 민우만은 가게에 남아 있었다.그때 민우가 물었다.“오늘 밤 안 돌아갈 생가이야?”“모르겠어. 우리가 떠난 뒤 그 자식들이 와서 소란 피울까 봐 걱정돼.”평소 담배를 별로 입에 대지 않던 나는 결국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민우에게 담배 한 대를 요구했다.그러자 민우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길목마다 CCTV가 있는데, 그 자식들이 설마 함부로 하겠어? 얼른 돌아가 휴식해. 그 자식들이 할 짓이라고는 기껏해야 가게 이름에 먹칠하는 것뿐일 텐데, 뒤에서 허튼 짓 하지 못할 거야.”나는 서둘러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담배를 태웠다.그러다 담배 한 대를 거의 대 피웠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됐어. 너 먼저 돌아가. 난 여기서 지키고 있을게.”물론 놈들이 지금 와서 소란 피울 가능성은 작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무엇보다 사장님 내외가 화인당을 나한테 부탁했는데, 무조건 잘 관리해야 한다.그때 민우가 말했다.“내가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 너도 안 돌아가는데, 내가 가서 뭐 해? 나도 같이 남을게. 위층에서 이부자리 가
[열나기 시작하더니 계속 고열이 내리지 않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감염이래요. 상황이 꽤 심각해요. 그래서 B시 병원으로 옮기려고요.]나는 문자를 받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그 정도로 심각하다고?’‘그날 병원에 다녀갔을 때 안색이 많이 좋아져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갑자기 커다란 돌멩이가 내 가슴께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이 상황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결국 위로의 말을 남겼다.[사장님은 좋은 분이니 분명 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대신 기도할게요.][고마워요.]우리는 더 이상 문자를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님한테서 받은 문자를 보면 볼수록 마음이 점점 무거웠다.정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간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상황이 점점 악화하고 있다니?간암 말기가 되면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예전에 시골에 있을 때, 마을 어르신 중에 간암을 앓고 있는 분이 계셨는데, 말기가 되니 매일 아파서 소리 질렀던 기억이 난다. 분명 우리 두 집 사이에 몇 집이 더 있었는데, 그 멀리에서도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난 사장님도 그런 고통을 겪는 게 싫었다.나는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 의서를 뒤졌다. 간암이 퍼지는 속도를 늦추거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적힌 고적이라도 있나 하고.그러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나는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는 것도 잊고 의서를 계속 뒤적였다. 그러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끝내 피곤을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다음 날 아침, 나는 민우의 소리에 깨어났다.민우는 나를 깨우더니 왜 위층에 왔냐고 물었다.“어제 사모님한테서 들었는데 사장님 상태가 악화되어 B시 병원으로 옮긴대. 의서에 무슨 방법이라도 적혀 있나 해서 도움이라도 되려고 찾았어.”민우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이건 다 사장님이 모아둔 책들인데,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면 사장님이 진작 발견하
“서 사장님, 괜찮습니까?”“서 사장님...”룸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잇달아 서윤기를 부축했다.서윤기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지만 코에서 이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젠장. 누군데 서 사장님을 때려?”사람들은 나를 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서윤기가 손을 뻗자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서윤기는 휴지로 피를 닦더니 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정수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이렇게 큰 Y시에서 다 만나고.”나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정 사장님이 여기로 인도해 주셨어. 네놈이 여기 있는 줄 알고 너 처리하라고 여기로 이끌어 주셨어.”서윤기는 그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정호섭 말이야?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호섭이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신통하다면 왜 자기 죽음도 못 막았겠어?”정 사장님이 불상사를 당한 뒤 모든 사람이 비통했는데, 서윤기는 오히려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울화가 치밀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막아섰다.그때 이동민이 굳은 얼굴로 나에게 걸어왔다.“젠장. 감히 내 앞에서 서 사장님께 폭력을 써?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이동민은 키가 크고 덩치가 산만 했다. 듣기로 이동민은 예전에 백정이라서 아주 포악했었다는 말도 있다.나 역시 그의 몸에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도살업자는 설령 그 일을 그만두더라도 피부와 핏속까지 스며든 피비린내를 지우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동민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커다란 주먹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나와 이동민의 표정은 동시에 일그러졌다.이동민은 내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 걸 몰랐는지, 아니면 내가 자기 주먹을 받아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했다.나 역시 꽤 센 이동민의 주먹에 흠칫 놀랐다.싸움을 배운 뒤로 나는 이 정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주먹끼리 부딪힌 뒤 한동안 팔이 저리더니 잠
버섯전골은 Y시 명물이라 다른 곳에서는 먹을 수 없다. 어느새 냄비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방안 전체에 퍼져 버섯 냄새가 가득했다.윤지은은 사모님한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유미야, 너 요즘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많이 먹어.”“그만 집어 줘. 내가 직접 먹을 수 있어. 두 사람도 먹어.”우리는 묵묵히 전골을 먹었다.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했지만 사모님이 별 반응이 없고, 윤지은도 협조하지 않아 혼자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어 포기했다.“차 마시고 싶어...”사모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제가 물어볼게요.”무엇보다 나는 어렵게 말을 꺼낸 사모님의 요구를 얼른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얼른 밖으로 나가 큰 방을 지나다가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봤다.그랬더니 내 눈에 익숙한 실루엣, 서윤기가 들어왔다.‘서윤기가 Y시에 왔다고?’나는 얼른 몸을 숨긴 채 안대성에게 전화했다.“서윤기를 감사하라고 했잖아. Y시에 온 건 왜 말 안 했어?”[네? 서윤기가 Y시에 갔다고요? 몰랐는데요? 형님, 제가 부하들한테 서윤기 잘 감시하라고 시켰는데...]안대성은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나는 당장 놈을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룸 안을 훔쳐봤다.룸 안에는 서윤기 외에 Y시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성은 왠지 낯이 익었다.나는 몰래 중년 남자의 사진을 찍어 판자촌 노랑머리에게 보냈다.[이 사람 알아요?]노랑머리는 곧바로 답장했다.[그 사람은 이연화의 아버지 판자촌 터줏대감 이동민이에요.]‘젠장.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이연화와 닮았잖아.’‘이동민이 여기 나타난 데다 서윤기와 웃고 떠드는 걸 보니 설마 정 사장님 교통사고가 서윤기 짓인가?’나는 그럴 가능성이 무척 크다고 생각했다.서윤기가 강북 시장
“한 번에 천만 원? 여기가 뭔 금은방인 줄 알아요?”나도 이제는 돈 좀 있지만 한 번에 음식점에 천만 원을 충전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북에서 최고급 호텔 멤버십에 가입하는 것도 고작 몇백만 원인데, 길가에 널리고 널린 버섯전골 집이 멤버십 카드만 천만 원이라니?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돈 없으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나가요.”“잠깐!”나는 언성을 높였다.그러자 매니저가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왜요? 또 무슨 일이죠?”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난 이 가게가 악의적으로 손님들에게 소비를 강요한다고 의심되거든. 그래서 지금 신고할 생각이야.”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에 매니저는 얼굴색이 싹 바뀌더니 나를 삿대질하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당신 미쳤어? 본인이 밥 먹을 돈 없으면서 왜 남의 가게를 신고해?”“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더니, 왜? 내가 신고할까 봐 두려워? 불법 경영한 거 걸릴까 봐 걱정돼? 그렇다면 더 신고해야겠네. 이렇게 부도덕한 가게는 문 닫아야 하니까.”윤지은은 네 행동을 지지했다. 심지어 사모님 역시 이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나는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매니저의 태도가 너무 괘씸해 밥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분을 풀 생각이었다.내가 정말 전화하자 매니저는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렸다.“알았어요. 오늘 일은 저희 측 책임이니 사과드리죠. 지금 당장 자리 내어드릴게요. 됐죠?”“어디? 홀? 아니면 구석?”내가 따져 물었다.그러자 매니저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당연히 룸을 내드려야죠. 하지만 큰 룸은 이미 손님이 꽉 차 작은 룸밖에 남지 않았어요. 비용은 사과하는 의미에서 받지 않겠습니다.”나는 손을 뻗어 매니저의 말을 잘랐다.“됐어. 값은 원래대로 받아요. 안 그러면 음식에 또 뭔 짓 할지도 모르니까.”매니저는 내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매니저가 비열한 소인배라고 공개 처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윤지은과
결국 어쩔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내려가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Y시에 버섯전골 맛집은 꽤 많았다. 하지만 사모님 기분이 안 좋은 지금 작은 가게를 가면 보는 눈이 많고 시끄러워 기분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때문에 나는 한적한 가게를 찾으려고 한참을 더 걸었다. 다행히 그런 가게를 찾는데 겨우 성공했다.“안녕하세요. 프라이빗룸 하나 예약하게요.”이 가게는 환경도 좋고 손님도 많은 걸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시었다.“큰 룸 하나가 남아 있는데 괜찮으신가요?”“큰 룸은 얼마인데요?”“큰 룸은 기본 소비가 60만 원 이상입니다.”“좋아요. 그걸로 주세요.”60만 원이면 괜찮았다.룸을 예약한 뒤 나는 또 운전해서 윤지은과 사모님을 픽업하러 호텔로 돌아갔다.두 사람은 어느새 현지 특색이 담겨 있는 꽃무늬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절세 미녀들이라 그런지 뭘 입어도 예뻤다.물론 나는 칭찬의 말을 아꼈다. 지금 장소와 분위기에 그런 칭찬은 맞지 않았으니까.잘못했다가 또 윤지은의 욕지거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나는 일부러 맞을 짓을 골라 할 이유가 없었다.30분 뒤, 우리는 버섯전골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하테 큰 룸 예약을 도와줬던 종업원이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손님, 죄송하지만 큰 룸은 이미 다른 분이 예약하셨습니다.”“방금 분명 내가 먼저 예약했잖아요. 왜 남의 방을 함부로 다른 손님한테 내줘요?”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하지만 종업원은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인터넷 오류가 났는지 그 방은 이미 예약한 분이 있어요.”이미 이곳에 왔는데 그대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그럼 작은 방이라도 줘요.”“죄송하지만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룸은 이미 예약돼서 남은 룸이 없어요. 괜찮으시면 홀에 있는 자리를 내어줄게요. 동남쪽에 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요.”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당신들 장사 이따위로 할 거야? 내가 예약한 자리가
요즘 겪은 일이 너무 많은 탓인지 나도 가끔 감회가 새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특히 사장님처럼 좋은 분이 유골이 된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우리는 한동안 돌아갈 수 없기에 사모님은 부모님을 불러 사장님의 유골함을 강북으로 가져가 매장했다.두 어르신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순식간에 더 늙어진 것 같았다. 항상 친아들처럼 생각했던 사위가 그렇게 됐으니. 간암인 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믿기 어려웠는데 또 이런 불상사를 겪었으니 당연히 충격이 컸을 거다.하지만 임민수는 딸이 더 걱정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미야, 너 정말 강북에 안 돌아갈 거니?”사모님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진실을 파헤치기 전에 절대 안 돌아가요. 엄마, 아빠, 호섭 씨는 두 분께 맡길게요.”사모님은 무척 아쉬워하며 사장님의 유골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그 순간 사모님의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아쉬움과 슬픔, 괴로움 그리고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도 한데 섞여 있었다.나는 절친한 사람을 잃어본 적 없어 사모님의 심정을 깊이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고 있었다.나와 윤지은은 사모님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사모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아무 말도 하지 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니까.”사모님은 매우 침착했고 엉엉 울지도 않았다.그런 사모님의 모습이 나와 윤지은은 모두 걱정되었다.하지만 사모님이 말했다.“걱정할 거 없어. 내 상태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비록 슬프고 안타깝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지 않을 거야. 호섭 씨도 내가 이러는 모습 원하지 않을 거야.”“유미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윤지은은 감개무량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이내 나를 째려봤다.‘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무엇보다 난 아직도 내가 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윤지은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묵묵히 두 사람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
우리는 희망을 이연화에게 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때문에 그 백수들이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우리는 호텔에서 기다리기만 했다.하지만 윤지은은 호텔에 갇혀만 있으면 사모님이 답답해할까 봐 한가할 때면 사모님과 함께 산책하곤 했다.사모님이 자기 컨디션을 끌어 올리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동력과 희망이 없는 탓에 사모님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Y시에 온 지 사흘 만에 강한나는 다시 강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떠나기 전 우리와 함께 시사 자리를 가졌다.“정말 여기 남아서 조사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강한나가 말했다.“알았어. 나도 도와줄 건 없으니 성공하길 빌게.”나와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이 화장실 간 틈에 강한나는 얼른 우리에게 말했다.“호섭 씨 시신 어느 때 화장할 거야?”나와 윤지은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몰라. 유미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어.”그 말에 강한나가 말했다.“시체를 화장하지 않아도 시체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어려울 거야. 난 고인 편히 쉬게 해주는 게 좋다고 봐.”“하. 그런데 문제는 유미가...”사모님이 아쉬워하는 게 문제다.화장하지 않으면 그래도 보러 갈 수 있지만 화장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사실 나도 강한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도 그 말 이해해요. 사모님은 저희가 설득해 볼게요.”식사를 마친 뒤 강한나는 그 길로 떠났다.나와 윤지은은 호텔로 돌아가는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두 사람 먼저 돌아가. 난 장례식장에 가볼 거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사모님이 또 사장님 보러 간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장례식장도 규정이 있는데, 아무 때나 들여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그건 다른 것도 아닌 시신이니까.그때 윤지은이 입을 열었다.“유미야, 이번에 보고 난 뒤 호섭 씨 편히 자게 해주자.”“안 돼!”사모
“왕정민 이 파렴치한 놈. 어떻게 이럴 수 있지?”분명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애교 누나한테 집착하다니.“애교 누나는 그럼 어떻게 처리했어요? 신고는 했어요?”[애교가 예전보다 많이 강해졌더라고요. 그걸 다시 왕정민한테 보냈어요. 심지어 안에 뭔갈 더 추가해서.]“네? 하하. 애교 누나가 정말 변했네요.”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그것도 다 왕정민 때문에 할 수 없이 변한 거긴 하지만요. 애교가 만만한 줄 알고 애교만 괴롭히다니. 그렇게 대단하면 그 여자를 그렇게 괴롭히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걸요.][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여자들은 뭐 드세고 화를 자주 내는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되겠어요? 다 남자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기어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한 거죠.][특히 우리 여자들은 가끔 독해질 필요가 있어요. 독하지 않으면 남들이 괴롭혀도 되는 줄 알아요...]나는 형수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애교 누나가 이토록 강해졌다니 나는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형수도 마찬가지고.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마음 놓고 할 일을 할 수 있다.형수와 한참 얘기한 뒤 나는 곧바로 애교 누나에게 전화했다.“누나, 왕정민 일은 왜 말 안 했어요?”애교 누나 목소리는 여전히 간질거리고 듣기 좋았다.[수호 씨가 Y시에 있는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수호 씨 가 나 때문에 와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나 이제 많이 변했어요. 다른 사람의 보호만 받으면서 살 수는 없어요.][그동안 아빠한테 반항하면서 독립적인 여자가 될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지금껏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어요.][예전에 결혼에 묶여 나를 잃었고, 행복한 결혼만 있으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았어요. 여자는 자기 마음이 강해져야 진짜 강한 거예요.]애교 누나의 말을 들으니 나는 순간 누나를 다시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 사람이 아직도 내가 알던 나약하기만 하고, 무
“내가 방 하나 더 잡을게요.”나는 말하면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사모님 목소리가 들렸다.“수호 씨, 먼저 내 침대에서 눈 붙여요.”고개를 돌아보니 사모님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누울 공간을 내주었다.나는 속으로 거절했다.비록 사모님이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나를 휴식하라고 호의를 베푸는 거라는 걸 알지만,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사모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됐다.게다가 윤지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내가 동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결국 거절했다.“아니에요. 가서 다른 방 구하면 돼요.”나는 다급히 방을 나가 프런트 데스크로 달려갔다.처음 온 날 우리는 사실 싱글룸 세 개를 잡았다. 하지만 나중에 사모님 상태가 걱정되어 나와 윤지은이 사모님 방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나머지 싱글룸 두 개를 취소했다.확인 결과 더블룸 하나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얼른 그 방을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과 윤지은이 더블룸에서 함께 지내고 내가 싱글룸에서 지내면 되니까.나는 카드키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조용한 데다 환경도 좋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내가 침대에 눕기 바쁘게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전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형수였다.요즘 사장님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달려 다니느라 형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때문에 마침 조용한 틈을 타 나는 형수와 얘기하려고 여상 통화를 받았다.형수는 사모님 상태를 걱정하며 일의 진전을 물어봤다.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쉽지 않아요. 조사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요.”[수호 씨 사장님 내외가 수호 씨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번 기회에 유미 씨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형수가 말했다.그 말에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네, 저도 알아요. 형수는 요즘 어때요?”[좋아요. 잘 먹고 잘 자고 이제 천천히 걸을 수도 있어요.]“진짜예요? 사진 찍어 보내 봐요.”나는 너무 기뻐 흥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