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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3화

Author: 임서아
침대 옆에서 이불을 정리하던 허아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주현우를 한참 바라보던 허아연이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일 없어요. 할아버지는 선을 아시는 분이니 정말로 끝을 보실 생각은 없으셨을 거예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한 허아연을 보며 주현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대로 돌아가 다시 누웠다.

다만…… 오늘 매를 괜히 맞은 것 같았다.

……

저녁 7시, 허아연은 아래층에서 저녁을 먹고 주현우에게 죽을 가져다주었지만 주현우는 너무 심심해서 입맛이 없다고 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주현우가 노트북을 꺼내 일하는 걸 보며 허아연은 감탄했다.

사람의 잠재력은 정말 무한했다.

주현우는 쇠로 만든 몸일까?

손에 죽을 들고 주현우를 한참 보던 허아연은 여전히 먹을 생각이 없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앞으로 보름은 담백한 것만 먹어야 해요. 안 그러면 상처 회복에 안 좋아요."

침대에 앉아 등을 기대지도 못한 채 주현우는 두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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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80화

    허아연의 표정을 보니 주현우를 별로 반기지 않는 듯했다.문 앞에 선 채 허아연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주현우는 집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이사 왔어?"허아연의 언짢은 표정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현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주현우의 인사에 허아연은 자연스레 문을 열어주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네, 오전에 막 왔어요.""서진 씨와 유환 씨가 요리하고 있어요, 들어와서 앉아요."이미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예의상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오라는 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도 사양하지 않았다.거실에서 게임하던 주민경은 주현우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며 물었다."현우 오빠는 여기 왜 왔어?"주현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민경이 쏘아붙였다."서진 오빠가 부른 거지? 진짜 눈치 없다, 아연이가 오빠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굳이 불러서 분위기 망치네."주민경의 말이 끝나자 주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굳은 얼굴로 입 좀 다물라며 발로 툭 찼다. 허아연은 옆에서 남매의 실랑이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발을 거두던 주현우의 시선이 옆에 있는 소파에 닿는 순간 문득 옛 기억이 밀려왔다.전에 허아연을 보러 왔을 때 두 사람은 이 소파에서 꽤 다정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만 해도 허아연은 여전히 주현우를 소중히 여겼고 기회도 줬었다.기회를 잡지 못한 건 주현우 자신이었다.소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현우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허아연도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올랐다.주현우와 몇 번 없었던 다정한 순간들이 떠올랐다.끝까지 간 건 아니지만 꽤 묘하고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었다. 민망해진 허아연은 시선을 피했다.살짝 발그레해진 허아연의 귓불을 본 주현우는 두 사람이 같은 기억을 떠올렸다는 걸 알고 웃음이 났다. 허아연에게서 시선을 거둔 주현우는 주방으로 가서 전서진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전서진이 주현우를 보며 말했다."현우야, 우리도 할 만큼 했어. 너와 아연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이제 네가 하기 나름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79화

    주현우만 쏙 빼놓는 건 주민경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그때 심유환이 발코니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통화를 마친 심유환이 방으로 들어와 두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전서진이 도와달라며 다시 주방으로 불렀다. 셋 중에서 진짜 요리를 할 줄 아는 건 심유환뿐이었고 나머지 둘은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다.심유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들어가고 세 남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허아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어릴 때도 이렇게 어울려 시끌벅적하게 놀던 기억이 났다.그 시절 허아연이 매년 가장 기다린 건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었다. 유서희가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면 모두 한데 모여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고 뭐든 함께했다.밤낮없이 몰려다니며 마음껏 뛰어놀던 시절이었다.주방을 바라보던 허아연은 역시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현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주현우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예전과 같은 사이일지도 몰랐다.한참 주방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린 허아연은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안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서진 씨와 심유환 씨와 아파트에 왔어요. 오빠도 이따 와서 밥 먹어요."허아연의 초대에 안서준이 물었다."주현우도 왔어?"그 중에서도 안서준이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은 언제나 주현우였다.안서준의 물음에 허아연이 답했다."민경이가 안 불렀어요. 지금은 전서진 씨네만 와 있어요."그 말을 듣고서야 안서준이 말했다."나 지금 근처 도시 가는 길이라 이따 좀 늦게 들를게."주현우가 와 있다면 아마 차를 돌려서라도 갔을 것이다.허아연이 흔쾌히 답했다."그래요, 그럼 일 끝나고 와요."안서준이 당부의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그때 주방에 있던 전서진은 주현우에게 전화해 태연히 말했다."현우야, 나와 유환이, 준서 지금 아연이네 집에 있어. 유환이가 요리하고 있으니까 너도 이따 와서 밥 먹어."주현우는 전서진의 전화를 받고서야 허아연이 오늘 호텔에서 아파트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전서진 일행에게는 이사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78화

    정성이 가득한 환영식이었다.문을 열고 주민경이 아늑하고 정성스럽게 꾸며 놓은 집을 본 순간, 허아연은 감동이 밀려왔다.금세 눈시울까지 붉어졌다.그때 주민경이 방 안에서 허아연을 향해 색종이 폭죽을 터뜨리며 외쳤다."아연아,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정성스러운 준비에 허아연은 캐리어를 내려놓고 주민경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꼭 안았다."민경아, 고마워."예전에도 지금도 주민경은 허아연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허아연을 안은 주민경이 해맑게 웃었다."바보같이,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왜 필요해?"주민경은 허아연의 어깨에 턱을 얹고 등을 토닥이며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연아, 나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어. 꼭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지난 2년 넘는 시간 동안 주민경은 허아연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 리 없다는 믿음만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기다리던 허아연이 돌아왔다.허아연도 뭉클해하며 말했다."민경아,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주민경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당연하지, 이 세상에 나만큼 좋은 사람 없을걸."허아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두 사람이 짐을 정리하고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하려는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주민경이 채소를 썰고 있었기에 허아연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열러 갔다.인터넷 택배가 온 줄 알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전서진과 심유환, 하준서가 저마다 손에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아연아, 집에 돌아온 거 환영해.""아연아, 집에 돌아온 거 환영해.""아연아, 이사하는 중요한 일은 미리 말을 해줘야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보자 허아연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십중팔구 주민경이 무심코 말을 흘린 게 뻔했다. 주민경은 어릴 때부터 워낙 해맑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곤 했다. 그것도 여유로운 주씨 가문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굳이 남의 눈치를 보거나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어서일 것이다.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던 허아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77화

    말을 마친 안서준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태연하게 우쭐거리던 주현우의 얼굴을 떠올리자 더욱 못마땅했다.허아연과 만나는 것도 싫었고 주현우가 의기양양해하는 꼴은 더더욱 보기 싫었다.전화를 끊은 안서준은 굳은 얼굴로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돌아가려던 허아연은 안서준의 방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다가왔다."오빠."통유리창 앞에 서 있던 안서준은 허아연의 목소리에 바로 돌아서서 인사했다."왔어?""네, 왔어요."허아연이 들어오자 안서준이 말했다."경주 그룹, 스타라이트 테크와 진행하는 협력 사업은 아마 며칠 안으로 계약할 것 같아. 기술 연구 개발에는 네가 참여해야 할 거야.""좋아요. 결정에 따를게요. 연구 개발은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최대한 빨리 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업무 얘기가 나오자 허아연은 눈에 띄게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이 원격 제어 시스템이 완성되면 나중에 군 부대와 협력할 가능성도 커요. 스타라이트 테크가 쭉 협력해왔거든요."세 회사는 모두 우세를 지니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연구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익은 기술 발전을 앞당겨 새로운 시스템을 더 빨리 선보이고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각 지역 정부가 세 회사에 조속한 협력과 새 소프트웨어 시스템 개발을 재촉하며 압박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두 지역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고 여러모로 이로운 일이었다.허아연의 분석을 들은 안서준이 말했다."세 회사가 협력하면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 요즘 연구에는 시간도 중요하니까."허아연은 안서준의 말에 동의하며 업무 얘기를 좀 더 나누다가 문득 물었다."참, 오빠. 지난번에 집 산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일단 전에 살던 아파트로 돌아가서 지낼까 해요. 새 사옥과 스타라이트 테크까지 훨씬 가깝거든요." "언제 집 보러 갈 거예요? 내가 같이 가줄게요."허아연이 아파트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안서준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76화

    지금 주현우는 사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허아연에게 잘해주고 챙겨주고 싶을 뿐이었다.주현우의 호의에 허아연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주 대표님 마음은 감사하지만 나도 동승 그룹 근처에 아파트가 있어요. 고마워요, 주 대표님."주현우의 집을 받을 생각은 당연히 없었기에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거절한 것이었다.그 말을 듣고서야 주현우는 허아연 명의로 된 아파트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난 2년 동안 주민경이 대신 관리해온 집이었다.허아연의 말에 주현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럼 됐어.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감정 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먼저 호의를 보이며 자세를 낮추고 나름의 화해의 손짓을 보낸 셈이었다.여전히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서 있던 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연락할게요, 주 대표님."허아연은 호텔 안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말했다."그럼 먼저 올라갈게요."예의를 갖추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주현우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멀어지는 허아연의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현우는 오늘 이용당한 일과 오늘 밤 분위기가 날이 서지 않았던 것, 권승준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별안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제법 기분이 좋았다.습관처럼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주현우는 한참 동안 호텔을 바라보다가 허아연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돌아가 차를 몰고 떠났다.앞으로 만날 때마다 오늘처럼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주현우는 진작부터 허아연이 갈수록 독립적이고 자신감 넘치며 매력적으로 변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예전에는 없던 여유로운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더 마음이 끌렸다. ……호텔 객실.안서준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허아연이 외출해서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안서준은 문을 닫고 쉬는 법이 없이 늘 불을 켜둔 채 돌아오기를 기다

  • 버린 건 나였지만, 무너진 건 너였다   제475화

    주현우는 전서진과 주민경을 불러 2차 술자리를 이어갈까 했지만 허아연이 쳐다보지도 않자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같이 가자고 해도 거절할 게 뻔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호텔 야외 주차장에 멈췄고 허아연이 내리자 주현우도 배웅하려 따라 내렸다.어깨에 가방을 메고 가볍게 팔짱을 낀 허아연은 배웅하려 내린 주현우에게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요, 주 대표님."오늘 밤 주현우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었다.그 모습을 본 주현우가 물었다."나 아직 쓸 만했어?"허아연이 권승준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놓고 물은 것이었다.주현우의 물음에 허아연이 웃으며 답했다."괜찮았어요."그 말에 웃던 주현우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괜찮았다면 다음에도 필요할 때 언제든 불러."주현우가 자존심을 굽히자 허아연이 말했다."그래요. 미리 감사 인사 해둘게요, 주 대표님."허아연은 몸을 돌려 호텔 로비를 한번 바라보고 말했다."늦었네요, 먼저 올라갈게요."말을 마친 허아연이 막 돌아서려는데 주현우가 갑자기 다시 불러 세웠다."아연아."허아연의 정체를 알고부터 주현우는 대부분 이렇게 불렀다.아연이라고 부르는 주현우의 목소리에 허아연이 돌아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주 대표님, 더 할 말 있어요?"허아연의 그윽한 눈을 마주한 순간 주현우는 마음이 흔들렸다.다가가서 안아주고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방금 보인 태도와 이제 속마음 한마디조차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이내 생각을 접었다.적어도 지금은 이런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주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예전 일들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방금 허아연이 빈정거리며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주현우를 사랑할 때 허아연은 자기 자신을 정말이지 한없이 낮췄다. 주현우의 사과에 허아연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아까 한 말도 조금은 일부러 한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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