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백지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얼굴에 미안함과 난처함이 공존했다.“아버님, 어머님. 이렇게 갑자기 떠나신다고요? 혹시 제가 며칠 동안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거나, 뭔가 잘못해서 두 분을 불편하게 한 건가요? 그렇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바로 고칠게요.”자책하는 백지유의 사려 깊은 모습을 본 고여진은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백지유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걱정하지 마. 너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 네가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살뜰하게 챙겨 줬는데. 덕분에 우리도 아주 편하게 지냈어.”백지유가 괜히 마음을 쓰게 될까 염려한 고여진은 경매 이야기를 꺼냈다.백지유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그래서 어머님께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군요.”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여진이 무려 삼십 년 동안 찾아 헤맸던 희귀한 물건이 하필 지금 이 시점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니.과연 우연일까?백지유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심성빈이 치밀하게 짜 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고 해도 겉으로는 감히 내색할 수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온순하고 단아한 모습을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고여진을 설득할 뿐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성빈 씨는 지금 출장을 갔잖아요. 이렇게 서둘러 돌아가신다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을까요? 성빈 씨가 돌아온 다음에 출발하시는 건 어떠세요? 직접 얼굴 보고 작별 인사를 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아니, 됐어. 그럴 여유가 없어서 말이야.”고여진은 연신 손을 내저으며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이번 경매는 아주 특별해.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나랑 우리 남편은 오늘 밤 출발하는 항공권을 이미 예매했어.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어. 성빈이한테는 내가 직접 전화해서 얘기하면 돼.”백지유는 고여진이 확실히 마음먹은 것 같자 일부러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다가 순순히
심성빈은 테라스에 서서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을 바라보며 차분한 눈빛으로 대책을 강구했다.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끝에 이내 완벽한 계획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 완성되었다.심성빈은 차분한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군더더기 없이 단호한 말투로 본론을 꺼냈다.“부탁 하나 하지. 경매 좀 추진해 줘.”“네? 갑자기 웬 경매에요, 대표님?”심성빈은 아주 간결하게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이에 상대방은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런 최상급 규모의 경매라면 단기간에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절차며 섭외, 자격 심사까지 챙길 게 한둘이 아니거든요. 난도가 너무 높아요.”“알아. 아니까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심성빈은 담담한 어조로 충분히 매력적인 카드를 내밀었다.“이번 일 확실하게 마무리해주면 다음에 귀국할 때, 내 개인 소장품 보관실을 전부 개방할 테니 마음껏 골라.”그 제안에 상대는 즉시 흥미를 느끼며 흔쾌히 승낙했다.“대표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당장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속전속결로 진행하겠습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준비해 놓죠!”그날 오후.별장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고여진은 경매장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확인했다.곧이어 경매장 관계자의 전화까지 걸려와 이번 경매에 참석해달라는 정중한 초청이 이어졌다.평소라면 흔한 경매 따위엔 눈길조차 주지 않을 그녀였지만 이번 경매의 마지막을 장식할 하이라이트가 근세 시대의 친필 서한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그 서첩의 저자는 다름 아닌 고여진의 친조부, 근세 시대 문단을 호령했던 당대 최고의 거장이었다.그 시절, 혼란스러운 정세와 끊이지 않는 전란 속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진품과 수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불타거나 유실되었다.그나마 남은 유일한 진품은 오래전 해외로 흘러 들어갔고 어느 개인 수집가가 거액을 들여 소장한 이후로 꼬박 삼십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그것은 심씨 가문의
집사는 송하나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을 보자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물을 한 잔 따라 들고 돌아오던 길, 그녀는 심성빈의 방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서 낮고 차분한 남자의 통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심성빈이 쉴 틈 없이 전화를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그 소리를 듣는 송하나의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어젯밤, 고열에 시달리는 자신을 곁에서 지키느라 한숨도 못 잤을 텐데 지금은 제대로 쉬기는커녕 쉼 없이 업무를 처리하며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으니까.그녀는 더 이상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점심때가 되자 리조트 직원이 담백한 영양식을 가져다주었다.식탁 위에는 영양 균형을 맞춘 속 편한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병을 앓고 난 뒤라 입맛이 없던 차였는데 하나같이 딱 먹기 좋은 것들이었다.송하나와 심성빈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남자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손길로 그녀를 위해 따뜻한 쌀죽을 떠주고 이어서 담백하고 부드러운 반찬 몇 가지를 앞접시에 세심하게 덜어주었다. 제스처마다 송하나를 위한 다정함과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가에 피로가 짙게 드리운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고르더니 마침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성빈 씨, 회사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 많이 남았죠?”그녀는 맑고 진지한 눈빛으로 심성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물었다.“저 이제 열도 내렸고 몸도 괜찮아졌으니 계속 곁에 붙어 있을 필요 없어요. 괜히 저 때문에 업무 그르치지 말고 급한 일 있으면 우선 회사 다녀와요.”혹시라도 자신을 혼자 이곳에 두고 가는 것에 대한 남자의 불안감을 덜어주려는 듯 그녀가 부드럽게 덧붙였다.“만약 제가 혼자 이곳에 있는 게 걱정된다면 짐 싸서 같이 돌아갈게요.”심성빈은 숟가락을 쥔 손끝에 힘을 주었다.그녀가 자신을 배려하고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지금 상황에서 회사로 데리고 가는 것은 절대 불가
다행히 비서실장 공수현은 노련했다. 백지유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심용군과 고여진을 계속해서 안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마침내 한 사무실 앞에 멈춰 서자 백지유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마치 오랫동안 이 사무실을 드나든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아버님, 어머님, 안으로 모실게요.”심용군과 고여진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며 실내를 둘러보았다.사무실은 우아하고 포근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심성빈의 차갑고 간결한 대표이사실과는 전혀 딴판인 영락없는 여자의 공간이었다.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는 아기자기한 캐릭터 컵과 화분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백지유의 사진까지 액자에 담겨 있었다.그녀 혼자 찍은 사진과 심성빈과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까지!백지유는 곁눈질로 사진들을 훑다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했다.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전혀 없으니 보나 마나 비서실장이 급하게 합성해 둔 것이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심성빈의 팀이 보여준 이 비현실적인 업무 처리 속도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불과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무실을 싹 비우고 새롭게 꾸며낸 것도 모자라 사진과 소품까지 완벽하게 배치해 오랜 시간 이곳을 쓴 듯한 분위기를 조성해 놨으니까. 흠잡을 데라곤 한 점도 없었다.잠시 후, 공수현이 과일과 차를 내왔다.“방금 대표님께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번 다국적 프로젝트는 심사 절차가 워낙 까다롭고 파트너사들의 확인 절차까지 겹쳐 있어서 아무리 빨라도 내일은 되어야 돌아오실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심용군과 고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심용군이 먼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럼 우리도 이만 돌아가야겠어. 계속 회사에 머무르면 괜히 업무에 방해되잖아.”고여진도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공수현에게 건넸다.“이거 성빈이 주려고 싸 온 건데 애가 없으니 도로 가져가기도 그렇고. 괜찮다면 공 비서가 나눠 먹어 줄래?”공수현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도시락을
백지유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서재에서 차 키를 챙긴 그녀는 심용군, 고여진과 함께 차고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세단을 골라 탄 뒤, 서둘러 별장을 빠져나왔다.가는 길 내내 백지유는 미리 외워둔 경로를 되새기며 조심스레 핸들을 잡았다. 머릿속으로는 심성빈이 보내준 주요 표지판을 끊임없이 복기했다.신호등 세 번을 지나 왼쪽으로 꺾고, 도로변의 대형 은행을 끼고 우회전하자 곧 심하 그룹의 거대한 사옥이 나타났다.차가 회사 정문 앞에 멈춰 서기 무섭게 마침 아래층에서 서류를 챙기던 비서실장이 빠르게 다가왔다.“백지유 씨, 며칠 전에 대표님께 여행 다녀오신다고 들었는데 벌써 돌아오셨네요?”백지유는 차에서 내려 여유롭고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행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마침 아버님, 어머님께서 국내에서 오셔서 모시고 구경이나 시켜드릴까 해서요.”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심용군과 고여진이 차에서 내렸다.심성빈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비서실장은 두 어르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놀란 기색과 동시에 예우를 갖추며 깍듯하게 인사했다.“회장님, 사모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언제 오셨어요?”고여진은 인자한 눈매를 접으며 다정하게 대꾸했다.“며칠 전에 왔어. 그동안 성빈이 곁에서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이 많아.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비서실장은 서둘러 대답하며 몸을 낮췄다. 그 태도에는 깊은 존경심과 겸손함이 묻어났다.“대표님을 모시는 건 제게 큰 영광입니다. 고생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그는 곧장 옆으로 비켜서며 공손히 길을 안내했다.“회장님,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일행이 로비로 들어서자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하나둘 멈춰 서서 백지유에게 인사를 건넸다.“백지유 씨, 안녕하세요.”“지유 씨, 좋은 아침이에요.”주고받는 인사는 예의 바르면서도 능숙했다. 마치 백지유가 이곳의 일상이 된 사람처럼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고여
집사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송하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심성빈이 사람이라도 바뀐 듯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한편 심성빈은 집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머릿속에는 조금 전 송하나의 모습이 끊임없이 재생되었고 그 바람에 가슴에는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같은 시각, 별장.심용군과 고여진, 그리고 백지유가 아침 식사 자리에 함께 앉아 있었다.고여진은 틈만 나면 현관 쪽을 내다보며 심성빈을 걱정했다.어제 그가 나간 뒤로 마음이 쓰여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던 터였다.고여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성빈이 일은 다 처리했나 모르겠네. 밤새 그림자도 안 보이니.”그때 백지유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태연하게 받아쳤다.“일이 꽤 까다로운가 봐요.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들어올 겁니다.”고여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어젯밤 두 사람을 한 방에 머물게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그렇게 밤낮없이 일에만 몰두하다가는 몸이 축나기에 십상일 텐데...“성빈이 저 애는 일만 시작했다 하면 목숨이라도 거는 사람처럼 굴어서 도통 제 몸을 돌볼 줄 몰라. 아마 지금껏 아침도 못 먹었을 거야.”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고여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서 간단히 아침이라도 챙겨야겠어. 지유야, 나랑 같이 회사 좀 다녀오자. 성빈이 얼굴 한번 보게.”백지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네?”애써 유지하던 미소가 무너질 뻔했다.이곳에 처음 온 그녀로서는 심성빈의 회사가 어디 있는지, 길은 어떻게 가는지 전혀 알 리가 없었다.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걸까?별안간 고여진이 당황해하는 백지유를 알아채곤 의아한 듯 물었다.“왜 그러니? 지유야, 혹시 어디 불편해?”“아뇨! 그럴 리가요.”백지유는 서둘러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이미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