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제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점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단신의는 짐이 아직 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지. 원래 태의들은 짐이 일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결과는 고작 반년이었다. 짐이 생각하기에, 의관들의 말이 짐에게 적용될 때 항상 반으로 줄여서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일 년 반, 어쩌면 그조차도 못 살지 모르지.”“황형,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그러자 숙청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짐의 말부터 먼저 들어보거라. 짐은 지금 머리가 매우 맑은 상태이며 혼란스럽지도 않다. 태자를 세우는 일도 서둘러야 하지만 누구를 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며, 신임황제가 집정을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다. 승상도 늙었으니 종사를 그 누구에게 맡겨도 안심이 되지 않는구나. 너 말고는 아무도.”사여묵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황형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이 모두 일정한 규칙 없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짐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으니, 적장자가 있어 국본 문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대황자는 너무나 평범하다. 평범하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는 게으르고 오만하며 이기적이지. 큰 뜻이 없고 귀가 얇아서 일곱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젖을 갓 뗀 아이 같으니. 그의 황조모와 태부가 열심히 가르치지만, 그를 억압하는 정도이지 바꿀 수는 없었다. 황후가 옆에서 조금만 귀여워해 주면, 그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심해지지.”“반면, 이황자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효심이 지극하고 덕이 깊다. 겨우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학당에 들어가자마자 글을 잘 짓기 시작했다더군. 덕비가 그를 많이 가르친 게 분명하다."“그리고 삼황자는 아직 너무 어려서, 겨우 세 살이라 품성을 알 수 없다.”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분명 대황자에게 매우 실망하고 있었지만, 아직 절망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숙청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대황자는
사여묵이 말했다.“그렇다면 황형께서는 지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숙청제가 대답했다.“만약 짐의 수명이 원래 생각했던 대로 석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짐은 대황자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너를 섭정왕으로 삼아 몇 명의 보좌 대신을 세우고, 이황자를 남강으로 분봉하여 보낸 후, 황후를 폐위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면 제씨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사여묵이 말했다.“그렇지만 신은 그 큰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가 섭정왕이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어떤 요구가 따를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식을 낳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가 제위를 찬탈한다 해도 나중에는 다시 되돌려주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숙청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네게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참 많구나. 짐은 네가 평생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하길 바랐다. 이기적인 걸 알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사여묵은 그의 뜻을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아이를 낳는 것은 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석석에게 있었다. 그에게 결정권이 없기에 약속을 할 수 없었으며, 맹세를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숙청제는 마치 그가 모르는 것처럼, 분명하게 말을 전했다.“너도 알다시피 이 말은 네가 살아있는 한, 제왕의 권력이 네게 있음을 의미한다. 네가 제위에 오른다 해도 아무도 너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원래 계획했던 것은 너를 대우하기 위한 것이다. 자식은 없지만 제왕의 권력을 가지는 것이지.”사여묵이 물었다.“이것이 폐하의 원래 생각이라고 하신다면, 지금은 어떠십니까?”숙청제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는데, 그가 섭정왕의 자리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다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지금은 단신의의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 지켜보려 한다. 하지만 단신의가 궁에 들어오면, 조정의 신하들도 짐에게 태
사여묵은 숙청제가 피로해 보이는 것을 보고, 또한 오 대반이 상주서를 가져온 것을 보며 말했다.“폐하께 한 가지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숙청제가 물었다.“무슨 일이더냐?”사여묵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장춘궁에 한 번 다녀오고 싶습니다.”그러자 숙청제는 곧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이 일로 인해 허어사는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숙청제는 이 문제를 마주하기를 원하지 않아가는 것을 바로 허락했다.사여묵은 물러나 바로 장춘궁으로 향했는데, 황후는 그의 방문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사람을 시켜 그를 들이게 했다.그녀는 송석석이 측비를 들이는 것을 거절한 것이 그녀의 질투심과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남자의 본성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황제는 정사에 열중해 후궁에 자주 들르지 않지만, 그래도 삼궁육원을 두지 않았는가? 마음에 드는 후궁이 있으면 한 달에 서너 번씩 침식을 함께 하기도 했다.제황후는 고양이가 생선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여묵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그리고 그녀는 항상 송석석이 사여묵과 혼인한 것이 고판이라고 생각했다. 재혼한 여자가 왕비가 되다니.비록 그들 사이에 감정이 있다 해도, 질투심은 결국 남자를 불쾌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었다.이 일이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사여묵에게 자신이 형수로서 그를 위해 노력했고, 그의 후사를 걱정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그는 이 정을 받아들여야 했다.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금실로 짠 방석이 깔린 의자에 단정히 앉아 푸른 소나무처럼 곧은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사여묵을 바라보았다.예의는 잊지 않아야 하니, 사여묵이 공손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황후마마를 뵙습니다.”황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어색하게 굴지 말고 얼른 와서 앉으시지요.”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란주 상궁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그러자 사여묵이 몸을 곧게 펴고 말했다.“앉지
황후는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황제마저도 아무리 그녀에게 화가 나 극도로 화를 낸다고 해도, 대개는 많아야 몇 마디 꾸짖거나 금족 처분을 내리는 정도였기 때문이다.“대체 사여묵이 뭐라고 감히 본궁 앞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구는거냐? 본궁은 그가 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의 후사를 걱정해 준 것뿐인데, 그는 정말로 본궁이 한가해서 그의 일을 꼭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좋아할 것이다."황후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화가 났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그녀의 억울함은 란주 상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는 북명왕의 측비를 찾아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왕비를 궁으로 불러들여 그녀를 압박하려는 계획이 아니었는가?어쩌다가 진짜로 황실의 후사를 걱정하는 일이 되었단 말인가?란주 상궁은 황후가 화가 나서 스스로 변명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변명은 오히려 스스로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그녀가 말했다.“황후마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원래도 진심으로 그를 위해 측비를 찾아주려는 것은 아니었잖습니까.”그러자 황후가 다소 못마땅한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본궁의 마음이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는 그를 위해 생각해 준 것이 아니냐. 그는 감사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본궁 앞에서 방자하게 굴었으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다. 너는 왜 이런 기운이 빠지는 말을 하는 것이냐? 이러면 누구나 본궁을 가볍게 보지 않겠느냐?”란주 상궁은 그녀가 너무 화가 난 것을 보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황후는 항상 큰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작은 실패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래서는 어떻게 큰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원래는 북명왕비를 압박하려는 계획이었으니, 실패했다면 실패한 대로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 아닌가?그러나 제황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분노하며 말했다.“그가 본궁을 무시한 것은 폐하마저도 무시한 것과 다름없다. 너는 오늘 밤 대황자를 보러 가 본궁을 대신해 태
제대부인이 궁에 들어갔다. 이번 방문은 제상서의 뜻을 받들어 태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황후는 부친이 이 일에서 손을 떼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차갑게 말했다.“집안을 도와 달라고 하실 때 본궁이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궁이 도움을 청하니 모두 거리를 두고 있군요. 본궁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황자가 황제가 되면 제씨 가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친은 제씨 가문이 앞으로도 반드시 순조로울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하십니까?”제대부인이 말했다.“그는 그저 성실한 신하가 되고 싶으실 뿐입니다. 모든 것을 폐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입니다.”“웃기는 소리입니다!”황후는 화가 나서 웃음을 터뜨렸다.“이미 더러움에 젖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성실한 신하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이 말은 왜 일찍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면 본궁을 이 황실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본궁이 혼자서 싸우고 빼앗아야 하는 상황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제대부인이 말했다.“그는 사적인 덕행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이부에서 이렇게 오래 일하면서 조정과 폐하께 부끄럽지 않게 일했습니다. 매관매직을 하거나 뇌물을 받은 적도 없지요.”황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했는지 안 했는지는 부친이 가장 잘 알겠지요. 모친이 어떻게 아십니까? 부친은 밖에 첩을 두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모친은 아직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황후는 모친을 어떻게 찔러야 가장 아플지 잘 알고 있었다.“마마!”란주 상궁이 곁에서 급히 말렸다.하지만 제대부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일은 그녀에게 아픈 기억이지만, 평생의 고통이 되지는 않았다.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그가 말하길, 황태자 문제는 제씨 가문이 가장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제씨 가문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이유는 미리 준비한 방어책이겠지요. 만약 그가 도움을 준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폐하께서 더욱 경계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황자는 더욱 제위를 바랄
숙청제가 다시 조정에 나섰다. 그의 얼굴 색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오래된 신하들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훔쳤고, 특히 큰 화를 불러일으킬 뻔했던 허어사가 그랬다. 지금 보아하니 황제의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았고, 단신의도 궁에 들어와 치료를 시작했으니 희망이 생긴 듯했다.그러나 숙청제가 예상했던 대로 조정의 관리들은 태자를 세울 것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커졌다.숙청제는 바로 응답하지 않고, 세 황자가 아직 어리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만 말할 뿐이었다. 태자를 세우자는 관리들 중에는 물론 제씨 가문의 문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 동조할 뿐,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숙청제는 제상서가 순수한 충신이 되고자 한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제씨 가문이 최근에 매우 조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숙청제의 경고 이후의 결과였기 때문이다.태자를 세우자는 요청에 즉각 응하지는 않았지만, 숙청제는 북명왕 사여묵을 태자소부로 봉하여 태자와 황자들에게 말 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무예를 가르치게 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태자 책봉이 이미 일정에 올라 있음을 의미했다. 소부는 이름뿐인 직책일 뿐, 사여묵은 여전히 실질적으로 대리시경이었다. 그러나 모두는 황제가 가문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계획 속에 북명왕 사여묵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제서야 모두가 안심했다. 어느새 북명왕은 나라의 기둥이 되어, 외부로는 적을 막고 내부로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견고한 방패와도 같았다.남강과 사국 간의 조약이 경사로 보내졌고, 사국은 영원히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나라 간의 약속은 때때로 마치 휴지 조각처럼 관계가 틀어지면 쉽게 찢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침범하지 않겠다는 사국의 영원한 약속보다는 실질적인 이익이 더 중요했다. 사국은 매년 상국에게 소와 양 각각 오천 마리, 준마 오백 필, 곡식 일만 석, 은화 십만 냥을 배상하기로 했다. 사국은 곡식 생산이 풍부한 나라
소부 사여묵은 봄 사냥 전에 궁에 들어가 세 황자에게 궁술을 가르쳤다. 사실 대황자는 이미 배워야 할 시기가 지나긴 했지만, 황후의 손에서 자라며 극진한 사랑을 받아왔기에 고된 일은 절대 하지 않았었다. 태후의 궁에 들어가서는 태후가 문무를 배치했지만, 그는 정말로 둔하고 게을러서 매일 학업을 따라가기에도 벅찼다. 겨우 겨우 한 과목을 보충할 수 있었으며 두 과목을 보충하기는 어려웠다. 재능이 부족한 데다 노력으로 따라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종종 꾀를 부려 게으름을 피웠다. 요즘 그나마 가장 큰 진전은 매일 서방에 가서 울부짖지 않는다는 것과, 학습 태도가 간신히 바르다는 정도였다.그래서 무예 사부의 존재는 서우에게 유리했다. 서우는 그에게 기본기를 배웠지만 너무 열심히 연습하지는 않았다. 단신의가 그에게 다리를 다시 다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며 서서히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여묵이 그들에게 궁술을 가르칠 때, 서우는 이미 기본기가 있었기에 며칠만 연습했는데도 꽤 좋은 성과를 보였다. 대황자는 활을 당기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조금 연습하면 여기저기 아프다며 연습하기를 싫어했다. 사여묵의 엄격한 태도 덕분에 도망가지 않고 계속 활을 당겼지만, 태도는 매우 대충이었다.이황자도 이틀 동안 활을 당기는 연습을 했고, 셋째 날에는 활을 쏘기 시작했다. 비록 과녁에 맞히지는 못했지만 힘이 있었고 태도도 매우 진지했으며, 힘들다고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사여묵은 그를 며칠 지켜보며 진전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아이의 실력이 사여묵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황자는 이미 궁술을 할 줄 알았고, 힘도 이미 단련된 상태였다. 그의 팔을 잡아보면 알 수 있었다.세 살 난 삼황자는 그냥 숫자 채우기에 불과했다. 그는 활을 당길 힘도 없었고, 화살을 하나씩 던지기만 할 뿐이었으며 그 마저도 멀리 던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굉장히 재미있어 했다. 화살을 하나 던질 때면 깔깔거리며 웃었고, 매우 즐겁게 놀았다. 사여묵 또한 당연히 그에
숙청제도 비록 무예를 익힌 적이 있지만, 그 부분에서는 사여묵만큼 세심하지 못해 이황자가 이미 기본기를 다져 놓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이황자의 태도가 진지하고 엄격하며, 진전이 빠르다는 것만 보아냈다. 이 아이는 천재적이고 영리했다. 황후의 배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고민할 필요 없이 그를 바로 태자로 선택했을 것이었다.봄 사냥 전날, 숙청제는 사여묵을 어서방으로 불러들여 물었다. "짐의 세 황자가 어떠한지 보았느냐?"사여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대황자는 무술을 좋아하지 않고 재능도 매우 부족하며, 태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활 쏘는 자세가 여전히 틀렸고, 매번 교정해 주지만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이황자는 힘이 좋고 자세도 능숙하며, 궁술에 대한 태도도 진지합니다. 기본기가 있어서 서우와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삼황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놀러 온 것이지요."숙청제는 잠깐 놀라 다시 물었다. "기본기가 있다고? 그가 원래 연습을 했단 말인가?""신이 그의 팔을 잡아보고 뼈대를 만져보니, 그는 확실히 무술을 익혔습니다. 특히 궁술을 전문적으로 연습한 흔적이 있습니다."숙청제는 눈살을 약간 펴며 말했다. "재능도 있고 부지런한 아이로군. 가르칠 만하구나."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약 재능으로 태자가 될 수 있었다면 지금쯤 황제 자리는 사여묵이 차지했을 것이었다. 사여묵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숙청제가 적장자를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적장자 신분을 지키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사여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선황제께서 자신을 태자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 적이 있을까? 특히 사여묵이 두각을 나타내고 재능을 발휘했을 때, 그렇게 뛰어난 아들을 보며 아쉬움을 느끼셨을까?’하지만 이제는 역할이 바뀌어 그가 결정을 내리는 입장이 되자, 태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봄 사냥 당일, 광대한 마차들이 끝도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