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유소린이 말을 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한두 해 안에 이런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단아 그룹은 진작 끝났겠지. ‘최상위 재벌가’라는 이름도 우스워지는 거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게는 안 써.”하지율이든 주용화든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연씨 가문, 강씨 가문, 심씨 가문, 단씨 가문, 손씨 가문처럼 뿌리가 깊은 가문들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이상, 설령 가주가 사망하더라도 그들을 파산으로 몰아넣기란 쉽지 않았다.게다가 이들 가문의 권력 구조는 복잡하게 분산되어 있었다.가주의 판단 하나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 않도록 의사 결정 권한 역시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 구조였다.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상대를 무너뜨릴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시장 점유율을 분산해서 확보하는 게 현실적이야.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생각보다 많아. 애초에 단종건 회장님이 핵심 자원을 넘겨주지 않았다면...”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단아 그룹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끼어들 틈조차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시작도, 시련도 모두 단씨 가문 때문에 맞닥뜨린 거라고 볼 수 있어.”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지금 단계에서는 완전히 독립할 수 없으니까, 자회사 형태의 브랜드를 만드는 게 맞아. 단아 그룹 명성을 등에 업고 시작하면 사업 확장도 빠르고 시장을 나눠 가지는 과정에서도 단종건 회장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유소린이 물었다.“그 계획으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이익은 잘 알겠어, 다만 리스크는?”하지율이 싱긋 웃었다.“단번에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거지. 상대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그림은 안 나와.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유소린이 어깨를 으쓱했다.“답답하면 어때. 이득을 보면서 불평까지 하는 건 욕심이 지나친 거지. 단종건 회장님이 우리를 돕는 건, 옛 인연이 마음에 걸려서지 단씨 가문을 무너뜨리라고 도운 건 절대 아닐 거야.”단보현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단종건이 하지율
하지율은 눈앞에서 춤을 청하는 가면 쓴 남자를 바라봤다.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고 묘하게 낯이 익었다.하지율은 자기도 모르게 남자를 몇 번 더 찬찬히 살폈다.지난 반년 동안 하지율도 적지 않은 연회에 얼굴을 비췄지만 꼭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대개 춤을 추자는 제안은 받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 하지율이 한참 상대를 바라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유소린이 은근슬쩍 등을 떠밀었다.“지율아, 그냥 한 곡 춰. 지금 이 사람을 거절해도 조금 있으면 또 다른 사람이 올 거야.”하지율은 다시 한번 눈앞의 남자를 훑어봤다.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본 사람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던 하지율은 결국 손을 내밀어 남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남자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하지율의 왼손을 잡았다.그 손끝에는 어딘가 모르게 굳은 기색이 배어 있었다.남자가 쓰고 있는 건 늑대 모양의 가면이었고 얼굴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기에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만 희미하게 보였다.동양인 남자였다.하지율은 그제야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런데 남자는 내내 말이 없었다.하지율이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데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결국 하지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남자는 몇 초쯤 침묵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없습니다.”남자는 일부러 자신의 목소리를 낮춘 듯했다.약간 쉰 듯하기도 했고 발음도 어딘가 흐릿했다.하지율은 자기가 대체 어디서 이런 이상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러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탓인지 하지율의 발이 순간 엇나갔다.그 바람에 하지율은 실수로 상대의 발을 밟고 말았다.그러자 하지율은 얼른 사과했다.“죄송해요.”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괜찮습니다.”그러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한 곡이 끝나자 남자는 짧게 인사했다.“먼저 실례하겠습니다.”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하지율은 남자가 멀어지는
그러자 하지율이 입을 열었다.“이렇게 많이 붙어 다니면 너무 눈에 띄어. 오히려 표적이 되기 쉽지. 난 원래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불편해. 많아도 둘이면 충분해. 한 명은 널 지키고 한 명은 날 지키면 되잖아.”하지율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유소린도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나현우는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가늘고 여려 보여서 언뜻 보면 전혀 싸움을 잘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그런데 막상 실력은 몸이 좋은 경호원들보다도 뒤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은 편이었다.상대가 나현우의 얼굴만 보고 방심하기 쉬운 것도 큰 장점이었다.반면 강원희는 달랐다.체격만 봐도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단련된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두 사람 모두 주용화만큼 눈에 띄게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경호원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돋보이는 외모였다.유소린은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하지율은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다만 너무 피곤한 날이면 가끔 이름을 헷갈려 나현우를 보고 화야 씨라고 부를 때가 있기는 했다.유소린은 나현우와 강원희를 문밖에 대기시킨 뒤, 하지율이 드레스를 갈아입는 걸 도와줬다.유소린은 드레스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맞다. 지율아, 랜스 가문의 가주는 본 적 있어? 듣기로는 여자라던데 그것도 엄청 젊다며? 나도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이력이 보통이 아니더라.”하지율은 고개를 저었다.“본 적이 없어. 나랑 계속 프로젝트 이야기 나눈 건 그쪽 책임자였어. 랜스 가문 가주가 직접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유소린은 고개를 갸웃했다.“이렇게 큰 프로젝트인데 가주가 직접 안 나오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은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밖에서는 너랑 랜스 가문의 가주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이번 협업이 성사됐다는 말까지 도는데 정작 본인은 한 번도 나서서 해명도 안 한다니 말이야.”하지율은 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며 조용히 말했다.“소린아,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유소린의 손길이 순간 멈췄다.“뭐라고?”
하지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소린아, 우리가 습격당한 일을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 없지?”유소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없어. 나도 일부러 기사 안 나가게 꽉 눌러뒀어.”유소린은 하지율의 표정을 살피다가 하지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이건 아마 화야 씨가 한 일은 아닐 거야.”유소린은 주용화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오가는 대화만으로도 유소린은 알 수 있었다.주용화는 이 일을 모르고 있었다.원래는 고윤택이 종종 주용화한테 하지율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고 있었는데 그 일은 몇 달 전에 고지후에게 들켰다.고지후는 고윤택이 자기보다 남의 편을 더 드는 걸 알고는 속이 뒤집힐 뻔했다.결국 고지후는 바로 고윤택을 다시 돌려보냈다.하지율은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그러자 유소린이 말했다.“정말 바이런의 원수들이 한 짓일 수도 있어. 그 인간도 원래 착하게 사는 놈은 아니었잖아. 경쟁자들을 암살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래. 이번엔 제대로 사람을 잘못 건드린 거지. 그런데 상대도 진짜 독하긴 하더라. 시체도 제대로 안 남겼다잖아. 이런 수법은 거의 손형원이랑 비슷해. 뭐... 악인은 악인이 잡는 거지.”하지율은 더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어쨌든 누가 대신 처리해 줬으면 우리도 힘은 덜었네.”원래 하지율이 유소린에게 배후를 알아보라고 한 건, 확인되는 순간 바로 되갚아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실제로 하지율은 이미 반격 계획까지 다 세워 두고 실행만 하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상대가 먼저 죽어 버렸다.다만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유소린은 아무래도 하지율의 곁에 실력이 좋은 경호원을 몇 명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하지율은 끝까지 버텨 보려 했지만 유소린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허락했다.하지율은 자기 몸을 스스로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경호원이 있으면 적어도 유소린까지 지켜 줄 수 있었기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협업은 최상위 재벌 가문의 입장에서도 눈이 뒤집힐 만큼 탐나는 기회였다.수많은 가문이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써 왔다.랜스 가문이 가장 유력한 몇몇 가문 가운데 한 가문을 골라 손을 잡았다면 그나마 말이 됐을 것이다.그런데 랜스 가문은 이름값도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은 신인인 하지율을 선택했다.그 순간 하지율은 단숨에 모두의 표적이 됐다.하지율이 연씨 가문 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온갖 최상위 가문이 일제히 하지율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기 시작했다.유소린은 온갖 루머와 각종 불리한 소문을 하나하나 막아 냈고 하지율에게 튀는 불똥도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 냈다.그런데 상대방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이번에는 기자들 틈에 사람을 섞어 넣고 인터뷰 현장에서 하지율을 기습하려 들었다.하지만 하지율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반응도 빨랐다.주용화가 가르쳐 준 격투 기술은 실제 상황에서 놀랄 만큼 쓸모가 있었다.하지율은 다치지 않은 채 범인과 안전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원래 같으면 그 한 번의 기습이 실패한 순간 상대도 물러나야 했다.그런데 그 자식은 첫 공격이 빗나가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유소린을 노렸다.유소린은 몸을 쓰는 법도 모르고 호신술도 배운 적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흉악한 범인 앞에서는 제대로 맞설 힘이 없었다.결국 결정적인 순간 하지율이 유소린의 앞을 막아섰다.하지율은 대신 칼을 맞았고 동시에 상대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그대로 위험한 상황을 끝냈다.그 일이 있고 나서 유소린은 놀라고 죄책감까지 겹쳐 마음을 놓지 못했다.유소린은 하지율에게 말했다.“지율아, 그냥 화야 씨를 다시 부르자. 저 사람들은 수단이 너무 악독해... 이러다가는 내가 널 못 지킬 것 같아.”하지율의 팔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남았지만 다행히 깊지는 않았고 소독하고 붕대만 잘 감아도 될 정도였다.하지율은 담담하게 말했다.“소린아, 이 일은 절대 화야 씨한테 말하지 마. 화야 씨는 주씨 가문 가주야. 해야 할
계약식 현장.하지율은 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랜스 가문의 책임자와 계약서를 주고받았다.사방에서는 플래시가 미친 듯 터졌고 셔터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20조짜리 초대형 프로젝트의 최종 파트너도 그렇게 마침내 확정됐다.그런데 누구도 이 프로젝트를 하지율이 따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하지율과 연씨 가문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진 집안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재외교포 가문 쪽의 강씨 가문도 있었고 해외의 유력 가문들도 역시 연경 그룹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었다.하지율은 연경 그룹을 등에 업고 있기는 했지만 연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아직 겨우 1년 남짓했다.그전까지만 해도 하지율은 사업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원래 직업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경영은 아예 아마추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하지율이 5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냈고 바깥일도 하지 않았기에 사회와 거의 단절된 삶을 살았다는 사실까지 사람들이 죄다 들춰냈다.20조가 되는 프로젝트를 따낸 뒤로 하지율의 과거는 거의 바닥까지 탈탈 털렸다.요즘은 밖에 한 번 나가기만 해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사생활이라고 부를 만한 건 사실상 남아 있지 않았다.유소린은 이런 장면을 대응하는데 꽤 능한 편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열된 관심 앞에서 유소린도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지금 하지율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예전에는 아무리 독한 사람을 만난다 해도 기껏해야 임채아나 장하준 같은 수준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이제 하지율이 상대해야 하는 여론 자체가 하나같이 돈과 권력을 다 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그런 사람들은 힘도 훨씬 셌고 음모를 꾸밀 때도 훨씬 더 독하고 무서웠다.유소린은 예전까지만 해도 손형원 정도면 정말 보기 드물게 악독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지율의 곁에 붙어 지낸 지난 반년 동안 유소린은 똑똑히 알게 됐다.주변에 숨어 있는 맹수들은 하나같이 손형원 못지않았다.유소린도 그동안 온갖 이해관계와 암투를 봐 오기는 했다.
“지후가 깨어나면 저 여자는 진작 그림자도 안 보일 거야!”함우민이 말렸다.“지후가 응급실로 들어가기 전에 말했어. 자기가 깨어나면 처리하겠다고. 하준아, 홧김에 일 저지르지 말고 지후 말 들어.”장하준은 하지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저 여자가 지후를 죽일 뻔했어. 지후는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여기서 눈엣가시처럼 있는 것보다 빨리 감옥에 보내서 거기서 지내는 게 어떤 건지 알게 해줘야지!”최근 몇 달간 하지율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장하준은 빈틈을 전혀 찾지 못했다.그래서 분노로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은 하지율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었다.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고지후는 더 요구하며 계속 압박했을 것이다.하지율은 쓸데없는 말 대신 가방에서 악보 한 묶음과 소형 플레이어를 꺼냈다.“창작곡인데 임채아 씨와 고지후 씨가 보고 제 제안을 받아들일지 결정하시죠.”임채아는 악보를 받아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다만 그저 슬쩍 보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하지율을 올려다보았다.임채아도 음악을 전공했고 상당한 수준을 지녔기에 악보가 훌륭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었다.하지율이 말을 이어갔다.“난 샤인의 이름을 이용해 누구
임채아는 그 말을 듣고 얼굴에 수줍음이 피어올랐다.“나도 지후가 정말 샤인을 데려올 수 있을 줄은 몰랐어.”“이젠 쓸데없는 생각 안 할 거지?”말하며 장하준은 잠시 멈칫하고 고소한 듯 미소를 지었다.“하지율 처지가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봐. 지후가 고성 그룹에 들여보내지도 않잖아. 너는 말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올라올 수 있는 게 바로 차이야.”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두 사람은 함께 고지후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장하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지 않고 하지율을 깎아내렸다.“지후야, 방금 아래층에서 하지율을 만났어. 송아현 씨
“채아가 스캔들로 유명해지길 원하는 거야?”장하준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유명세가 필요 없다면... 어떤 작곡가도 다 되니까 굳이 하지율일 필요가 없지.”고지후는 장하준을 무시하고 임채아를 바라보았다.“채아야, 샤인의 이름으로 유명해졌다는 건 본인 이름으로도 유명해질 수 있다는 뜻이야. 곡이 어떤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물론 네가 작곡가를 바꾸고 싶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임채아는 편견을 갖고 까다롭게 악보들을 살펴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율의 곡은 정말로 새롭고 창의적인 데다 유명 작곡가들의 틀에 박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