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손형서는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처럼 비틀거리며 병원에 도착했다.병원으로 걸어오는 내내, 거리의 사람들은 연정미 납치 사건으로 떠들어댔다. “이 일로 연정미도 이제 손형원이랑 만나주겠지?”“들었어? 연정미 구하려다가 손형원이 다쳤대.”“와... 이 정도면 요즘 시대엔 보기 힘든 상남자지. 좋은 남편감이야.”질투와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그녀의 귓속에서 울려댔다.병원에 들어서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환자든, 간호사든, 의사든 모두가 연정미 이야기뿐이었다. 손형서는 간호사들의 대화를 엿들어 연정미가 입원한 병실을 알아냈다.현재의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처참할 만큼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 어떤 시선도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병원 전체의 관심, 모든 인력, 모든 시선이 연정미 단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심지어 응급 처치가 시급한 중증 환자마저 연정미 뒤로 밀렸다.예전의 손형서였다면 무심히 웃어넘겼을 것이다.그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먼저 치료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 믿음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손형서는 조용히 그 속에서 원한과 분노의 싹을 틔웠다.‘왜? 내가 왜 연정미보다 늦게 치료받아야 하는 거야?’비척거리며 병실 문 앞에 도착한 손형서는 유리창 너머의 광경에 숨을 멈췄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의사들, 연씨 가문 부자들, 단서현, 그녀의 오빠 손형원까지...늘 냉담하던 그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떠올라 있었다. 친동생이 실종되었을 때조차 저런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손형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문득, 손형원과 서로 없이 살아갈 수 없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들은 서로를 지켰고, 서로의 세계 그 자체였다. 그녀는 확신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손형원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은 자신일 거라고.연정미가 등장해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을 때도, 얼마 전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연정미를 도왔을
남자는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형서를 힐끔거렸다.“세상에,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라니. 우연인가?”손형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아니야! 전부 네가 오빠랑 나를 이간질하려고 거짓 정보를 흘린 거잖아!”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남자는 지루하다는 듯 부하에게 손짓했다.“믿지 않는다니... 좋아, 그럼 이따 나와 저쪽의 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수밖에.”남자의 뜻을 알아들은 비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형서를 내버려둔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비서는 그의 지시대로 라이브를 준비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이 켜졌다. 손형서는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켰다. 화면 속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 그건 단 한 번도 손형원의 곁을 비운 적 없던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최측근 비서였다.손형서의 심장은 서서히 식어갔다. 손형원은 결국 오지 않았다. 그는 먼저 연정미를 구하러 갔다.그때, 휴대전화에서 가면을 쓴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제가 알기로는 손형서 씨가 먼저 납치되었죠. 그런데 손 대표님은 동생을 내버려두고 연정미부터 구하러 가셨더군요?”손형서는 그 말에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것은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시험하는 게임이었다.손형원의 비서가 담담히 말했다.“요구가 있다면 말씀하십시오.”남자는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요구는 하나뿐입니다. 손형원을 직접 만나는 것. 이렇게 하죠, 손 대표에게 전화해요, 오늘 안 오면 소중한 여동생에게 남자의 맛을 보여줄 거라고.”순간, 비서의 표정이 참담하게 흔들렸다. 이 사안을 혼자 결정할 수 없었던 그는 곧장 손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바로 연결됐다.손형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손형서의 귀에 그대로 꽂혔다.“하, 별것도 아닌 일로 유세는. 알아서 하라고 해.”순간, 손형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다.그녀는 그 뒤에 두 사람이 나눈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생각 정리를 마친 손형서의 호흡이 조금 가라앉았다.손형원은 평생을 권력과 음모 속에서 버텨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조악한 함정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손형서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이제... 오빠와 통화하게 해 줄 수 있어?”남자는 순순히 손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손 대표님? 동생분이 그쪽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짧게 말한 그는 수화기를 손형서의 귀에 가져다 댔다.수화기 너머의 손형원은 단숨에 상황을 꿰뚫을 수 있었다.“형서야, 전화 건 사람 누구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손형서는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쏟아냈다.“오빠, 나 납치됐어! 이 남자가 30분 안에 오라고, 안 오면 나한테 남자들을 ...”그러나 남자는 그녀가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멍하니 자리에 굳어 있던 손형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녀는 공포보다 불만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왜 끊어?”남자는 여유롭기만 했다. 그의 목적은 애초에 손형원의 불안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말을 하다 마는 게 네 오빠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올 테니까. 그리고 말이야... 혹시 손형원이 네 순결 따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안 올 수도 있고.”순간 손형서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손형서와 손형원은 M국에서 함께 자라며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배웠다. 손형서가 첫 경험을 남겨둔 이유도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동하는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다가오거나 함부로 손을 대려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랐다.그러나 주용화를 만난 뒤, 모든 기준이 바뀌었다. 그의 신분을 몰랐을 때조차 그와 가까워지는 게 싫지 않았고 이제는 그를 평생의 반쪽이라 믿고 있기에, 손형서는 자신의 처음을 오직 하나의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 소리가 손형서의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순간 숨을 멈춘 그녀는 잠시 자는 척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곧 기계로 변조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깬 거 알아.”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은 손형서는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았다.“당신 누구야? 왜 나를 납치한 거지? 돈을 원하는 거야?”그 말에 남자가 낮게 웃었다.“돈은 썩어 넘쳐나. 그런 건 필요 없어.”순간 손형서의 심장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건가?’“네가 원하는 게 뭔데?”“네 오빠.”남자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비틀려 있었다.“나는 손형원하고 사이가 좀 안 좋거든. 너를 납치한 건 당연히 네 오빠 때문이지. 이곳엔 이미 완벽한 덫을 깔아뒀어. 그 자식이 걸려들기만 하면 돼.”그는 잠시 낮게 웃었다.“듣자 하니 오빠와 어릴 때부터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지? 네가 오빠를 위해 어디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한번 보고 싶어서 말이야.”손형서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누군가 이곳에 나타나 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손형서는 성급하게 손형원에게 연락해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우선 상대의 정보를 끌어내는 것이 먼저야.’“네가 누군데? 우리 오빠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러는 거야? 나는 죄 없는 사람이야. 남자들 싸움에 아무 힘도 없는 여자를 끌어들이는 건 좀 비겁하지 않아?”남자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남자들 싸움? 너희 오빠는 남에게 손을 쓸 때 성별은 따지지 않던데.”“!”손형서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아는, 손형원이 여자에게 손댄 일은 단 한 번, 연정미 때문이었다.‘또 연정미야? 또!? 그년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납치당할 일도 없을 텐데.’손형서의 내면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숨을 고르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
손톱이 피와 함께 빠져나가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잔혹했다.단서현은 숨조차 들이켜지 못한 채 넋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충격에 입이 벌어진 채였지만 그 속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비명은 끊어질 틈 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연정미의 손톱이 하나씩 뜯겨 나가자,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소금물과 고춧가루를 덧부었다.단서현은 외국인들이 어떻게 그런 고문 방식을 고안해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이 정도로 잔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그들은 곧이어 어디서 잡아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독이 있을지도 모르는 뱀 몇 마리를 그대로 연정미의 몸 위에 던졌다.연정미가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다고 해도 그녀는 명문가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다.단서현도 이런 뭣 같은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게다가 이 인간들은 정말 많은 고문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들은 연정미의 몸에 손대지 않겠다고 하긴 했으나 그게 고문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결국 모든 것은 연정미의 고문 영상을 기다리는 석유 재벌과 금융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그때, 누군가 음습하게 웃으며 잔혹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선 모욕감이었다.“우리는 이 여자를 만져서도, 불구로 만들어서도 안 돼. 하지만 괴롭힌다는 목적은 달성해야겠지. 저쪽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며? 머리카락과 눈썹을 전부 밀어버려도 과연 그 미모를 유지할 수 있을까?”“오,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단서현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았다.곧이어 연정미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고 뽀얀 두피가 드러났다.그러나 연정미는 대머리가 되었음에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탓에 여전히 아름다웠다.하지만 눈썹까지 모두 사라지자 그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일순간 뒤틀려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벽 모퉁이에
주용화의 말이 끝나는 순간, 거실의 공기는 마치 한겨울처럼 서늘하게 식어갔다.“만약 임채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손씨 집안 사람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오빠의 재산을 갉아먹는 여자라고 비난했을 겁니다. 이런 친정이라면 평범한 집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죠.”말끝에 맺힌 조소가 파문처럼 번지자 연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은 일제히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화를 내고 싶었지만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연태훈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결국 낮게 사과했다.“지율아... 이건 정말... 아버지가 너에게 미안하다.”주용화는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 이면에는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서늘한 칼날이 있었다.“말만으론 부족합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셔야죠.”연재영은 그의 끼어듦이 더없이 성가셨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연씨 가문 쪽은 할 말이 없는 형국이었다. 억지 변명은 위선만 더 짙게 할 뿐이었다. 그는 억눌린 표정으로 하지율을 바라보았다.“하지율, 네 생각은 어때.”하지율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조건이 있어요. 첫째, 손형원 씨를 지금 당장 연씨 저택에서 내보내 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 집안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세요.”연재영은 주저할 틈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좋다.”그는 그 자리에서 집사를 호출했다.“손형원 씨를 지금 이 자리에서 모시고 나가도록 해.”집사는 공손한 태도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이제 나가 주십시오.”손형원의 눈빛이 순간 예리한 날처럼 차갑게 번졌다. 분노와 굴욕감에 휩싸인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하지율. 오늘 일... 결코 잊지 않으마.”그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하지율은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래요. 어차피 앞으로 기억해야 할 일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텐데요, 뭐.”그녀는 이내 남자의 차갑고 음습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당신이 손씨 가문의 가주라 해도, 연경 그룹과의 협력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여기서는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