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기억을 잃고 사라졌던 첫사랑 한태준. 그가 어느 날 강세린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태준과 이미 달라져 버린 세린의 삶. 끝난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얽히기 시작하면서, 10년 전 사고와 헤어짐 뒤에 숨겨진 진실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View More휴대폰 화면이 손에서 미끄러질 듯 흔들렸다.
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의 약혼녀였다.
불과 몇 달 뒤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던 여자.
그런데 그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남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믿기지 않아 사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시 보아도 사진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의 약혼녀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태준은 겨우 침을 삼키며 사진 아래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태준의 숨이 잠시 멎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담했다. 최소한의 숨만 겨우 들이쉬던 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뭐야, 이거.”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계정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 장이었지만,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화면을 다시 넘겼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여행 사진과 레스토랑 사진,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들까지.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러웠다.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순간 자신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남자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하, 씨발.”
태준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였다.
함께 신혼집을 알아보고, 결혼식 날짜를 정하며 평생을 함께하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약속이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니.
당장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차 안은 조용했다.
시동을 켠 채 도로 옆에 잠시 멈춰 서 있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봄날의 캠퍼스.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던 오후였다.
“태준아.”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자 긴 머리를 묶은 여자가 서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강세린이었다.
“유학 가도 연락해야 돼. 알았지? 바쁘다고 연락 안 하면 나 진짜 화낼 거야.”
태준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너 두고 어디 가겠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안 그래.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때 세린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거짓말하면 죽는다.”
“진짜라니까.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태준은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세린과 자신은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을 저버린 사람은 자신이었다.
유학 생활이 길어지면서 연락은 점점 뜸해졌고, 기다리는 세린의 마음을 외면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세린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함께 꿈꾸었던 미래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태준의 시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웃고 있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갑자기 비틀렸다.
“씨발.”
태준은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시야가 흔들리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순간이었다.
정면에서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역주행하던 차량 한 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어?”
놀란 태준이 브레이크를 더욱 깊게 밟으려는 순간이었다.
쾅!
엄청난 충격이 몸을 덮쳤다.
차체가 크게 흔들리며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안전벨트가 몸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귀가 먹먹해졌고 정신도 흐릿해졌다.
태준은 점점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쓰디쓴 미소만 흘러나왔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봄날의 캠퍼스에서 긴 머리를 묶고 환하게 웃고 있던 여자.
강세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을 텐데.
태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세린아.”
그 이름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순간, 태준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대문 너머의 마당은 세린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잔디 사이로 값비싸 보이는 소나무들이 자리했고, 한쪽에는 물레방아를 닮은 분수대가 잔잔한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담장 가까이 심어진 동백나무와 단정한 산책로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꾸민 흔적이 없었다. 그 뒤로 세련된 회색 외벽의 이층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창문과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구조가 눈길을 끌었다.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와, 정말 멋있다. 여기 네 집 맞아?”“그럼 남의 집에 들어왔겠어?”태준이 웃으며 짐을 고쳐 들었다. 세린은 그의 장난을 받아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건축학과를 나온 태준이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이런 집을 지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대학 시절 도면을 펼쳐 놓고 밤새 설계 이야기를 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려운 말은 몰라도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이 좋았다. 이제는 이름난 건축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소문으로 듣는 것과 그가 직접 지은 집을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멋있네. 신혼집이었나 봐.”무심코 흘린 말에 태준이 피식 웃었다.“강세린, 꼭 처음 온 사람처럼 구네. 그리고 당연히 신혼집이지. 너랑 살려고 지은 집인데.”“누가?”“누구긴 누구야. 내가.”태준은 세린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너한테 이야기 안 했어? 대학 다닐 때부터 우리 둘이 살 집은 내가 직접 설계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세린이 되묻자 태준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병원에서부터 이상했어. 넌 계속 나보다 엄마랑만 이야기했잖아. 내가 들어오면 두 사람 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좀 한 게 뭐 어때서?”“그 정도가 아니니까 그러지. 꼭 나만 빼놓고 둘이 무언가 꾸미는 사람들 같았어.”태준은 잠시 말을 끊고 세린의 가방을 바라보았다.“아까 택시에서 받은 문자도 엄마한테서 온 거지?”세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방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괜히 뜨겁게 느껴졌다.'이 자식은 십 년 동안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어떻게 저걸 알아맞혀?'태준의 기억에는 두 사람이 헤어졌던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과 이모가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이모가 어디까지 이야기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현실을 태준에게 한꺼번에 말할 수도 없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세린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만들었다.“이모랑 내가 무슨 범죄자라도 돼? 둘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한 것뿐이야. 그런데 넌 이제 이모한테까지 질투하는 거니?”태준은 헛웃음을 흘렸다.“내가 누구한테 질투를 한다고 그래? 문제는 네가 자꾸 나만 피한다는 거잖아.”“피하는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래. 사고도 났고, 병원에 계속 있었으니까.”“그럼 집에 와서 푹 쉬면 되
“여기까지 와서 다시 병원으로 가자고?”태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세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팔짱을 단단히 낀 채 차 문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네가 멋대로 데려왔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자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이야.”“강세린, 진짜 끝까지 이럴래?”“응.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이제 좀 알겠어?”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열린 문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이 붙잡힌 순간 세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태준이 조심할 틈도 없이 자신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야! 한태준, 뭐 하는 짓이야!”태준에게 부딪힌 세린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십 년 전과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익숙한 향까지 느껴지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태준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이렇게 가까이 오니까 이제 좀 말할 마음이 생겨?”“누가 네 품에 안기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당장 놓으라니까!”그때 운전석에서 기다리던 기사가 헛기침을 했다.“죄송한데 두 분, 애정 표현은 집에 들어가셔서 하시고 짐부터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다음 손님을 태워야 해서요.”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기사가 보는 앞에서 밀어내자니 소란이 날 듯했다. 세린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너 진짜 이러기야?”태준은 못 들은 척 미소만 지었다.“기사님,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하지만 태준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가 저한테 단단히 화가 나서요. 금방 정리할게요.”“누가 네 여자친구야!”“아이고, 젊은 분들은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딱 그렇네.”세린은 더는 변명하지 못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에서 내려 짐을 챙겼다. 차가 떠나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태준은 입술을 삐죽 내민 세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여름휴가 못 가게 해서 화난 거야?”“누가 여름휴가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그럼 왜 그러는데? 아까부터 입이 댓 발은
이모에게서 도착한 문자는 짧았다.[금방 따라갈 테니 걱정 마, 세린아.]문자를 확인한 세린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이모까지 따라와 준다니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옆에 앉은 한태준이 문제였다.세린은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려다 말았다. 지금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봤자 태준이 곧바로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이다. 방금 전에도 이모와 대화하는 내내 예민하게 반응했던 남자였다.'제발 빨리 와 줘, 이모.'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택시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린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고, 태준은 팔짱을 낀 채 앞만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병원에서 벌어졌던 실랑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먼저 말을 걸 마음이 들지 않았다.태준은 세린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짐까지 챙겨 택시에 태웠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남의 의사까지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사람을 이렇게 멋대로 데려가 놓고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세린이 옆눈으로 노려보자 태준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세린은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태준이 작게 웃었다.세린은 괜히 무릎 위에 올린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이라도 십 년 전의 일을 전부 털어놓고 싶다가도, 자신을 연인으로 믿는 태준의 얼굴을 보면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그에게는 어제 같은 일이 자신에게는 이미 오래된 상처였다.“왜?”“뭐가?”“할 말 있으면 해. 아까부터 몇 번이나 쳐다보던데.”“착각하지 마. 그냥 창밖 보는 거야.”“창문이 내 얼굴에 달렸나 보네.”태준의 능청스러운 말에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십 년이 흘렀는데도 사람 약 올리는 재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운전석에서도 조심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세린은 창문에 비친 그의 옆얼굴조차 편하게 볼 수 없었다. 한때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인데 이제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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